1969년 4월 동독 튀링엔주의 도시 ‘에어푸르트’에서는 한 중년 남자의 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남자는 코와 입에 심한 외상 자국이 있었고 재판 내내 침울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죄목은 약 25년 전의 전쟁 중 발생한 사건들에 대한 것이었는데 남자는 별다른 표정의 동요 없이 자신의 범죄를 시인했다. 결국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그 죄목이 너무나도 기가 막혔다. 2차대전 중 폴란드의 바르샤바 유대인 게토에서 30만 명 이상을 강제수용소로 추방 한 죄, 직접 본인이 2천명 이상을 살해한 죄 등이었다. 그는 항소했지만 어떠한 배려나 자비도 인정되지 않았고 석 달 후인 1969년 7월 29일 ‘라이프치히’에 있는 교도소에서 목 뒤에 총을 맞는 것으로 삶을 마감했다. 그의 이름은 ‘요제프 블뢰쉐’였는데 당시 나치 친위대 소속 병사였다. 그는 전쟁 후 소련군에 포로로 잡혔고 중노동을 하던 중 체코를 거쳐 동독으로 몰래 탈출하여 살게 되었다. 동독에서 조용히 살고 있던 그가 붙잡힌 것은 2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후였는데 바로 전쟁 중 찍힌 사진 한 장이 그 발단을 제공했다. 과연 그 사진에는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요제프 블뢰쉐는 1912년생으로 체코 보헤미아 중에서도 독일 국경과 가까운 프리들란트 출신이었다. 어릴 적부터 집의 농장일을 도맡아야 했던 그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주변의 독일 극우단체에 가입해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38년에 히틀러가 이 지역을 병합하자 즉시 나치당에 가입했고 1939년말부터는 친위대에 징집되어 근무하기 시작했다. 단기간의 훈련을 마친 그의 부임지는 폴란드였고 이후 유대인 제거를 위한 특수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 (Einstzgruppen: 임무부대)에 소속되어 벨라루스에서 대량 학살에 참여하게 된다. 1942년 중반에는 보안대로 소속이 바뀌었고 곧 그의 악명을 제대로 떨치게 될 장소로 부임하게 된다. 그 곳은 바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위치한 ‘유대인 제한 거주지역’으로서 일명 ‘게토’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게토’ (Ghetto)라는 말은 16세기 베니스에 있던 유대인 거주구역의 명칭에서 나온 단어이다. 폴란드가 독일군에 항복한 1939년 9월 이후 350만 명의 폴란드 거주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어찌될지 모른 체 불안에 떨고 있었다. 나치는 유대인들 통치를 위해 ‘유대인 위원회’를 구성했고 폴란드 각지에 동일 조직을 통해 유대인들을 통제했다. 물론 이러한 통제는 단순한 관리 측면이 아니었는데 1939년 하반기 이후 유대인들은 강제노동에 동원되고 일정 금액 이상의 은행 예금이 동결되었으며 10세 이상은 유대인임을 드러내는 표식을 착용해야 했다. 1940년이 넘어가자 통제는 더욱 심해졌는데 나치는 수도 바르샤바 내 특정 구역에 35만 명의 유대인들을 몰아넣을 계획을 세우게 된다. 1940년 4월부터 기존 유대인 집중 거주지역을 중심으로 건설이 시작되었다. 10월 16일에 ‘바르샤바 게토’가 공식적으로 완공되었고 45만 명 정도의 바르샤바 및 주변 거주 유대인들이 3제곱킬로미터 넓이의 공간에 감금되었다. 게토는 3미터 높이의 철조망 장벽으로 외부와 단절되었는데 비록 학교, 까페 및 공연장 등의 시설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유대인의 감옥’이었고 이곳을 도망치다 걸릴 경우에는 즉결처형을 당했다.
게토 내에서 식량은 유대인 한 명당 하루 184 칼로리로 계산되어 배분되었는데 당시 독일인에게 하루 2,613칼로리가 배급되었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유대인들을 굶어 죽이려는 의도가 너무나 확연히 드러났다. 살아 남기 위해서 사람들은 시계, 보석 및 장신구 등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팔아야 했다. 이러한 귀중품들은 게토 밖으로 몰래 밀반출되고 대신 빵이나 식자재들이 밀반입되어 암시장에서 거래되었다. 하지만 암시장을 이용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굶게 되었고 서서히 죽어갔다. 위생 상태도 형편없어서 각종 전염병들이 돌기 시작했고 이 또한 유대인들의 목숨을 빼앗기 시작했다. 더불어 유대인들은 게토 내에서 순찰을 도는 독일군에게 수시로 폭행을 당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아무 이유 없이 총살을 당하기도 했다. 1942년 여름이 되자 나치는 살인자의 본색을 제대로 드러냈는데 게토 거주민들 중 27만명 이상을 극도의 공포 분위기 속에서 추방했다. 이들 대부분은 ‘트레블링카’, ‘마이다넥’과 같은 강제수용소의 가스실에서 살해된다. 게토 내 유대인 위원회장인 ‘아담 체르니아코프’는 자신의 무력감을 비관하며 독약을 먹고 자살한다. 요제프 블뢰쉐가 바르샤바 게토에 오게 된 것이 이 시점이었다.
블뢰쉐는 게토 내 가가호호를 돌며 숨어있는 유대인 추적에 앞장섰는데 특히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폭행 및 살인을 저지르는 것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1942년 9월에 게토 유대인들에 대한 마지막 단속이 있었고 4만 8천명이 수용소로 끌려간다. 남아있는 소수의 유대인들에게 이제 선택은 분명해졌다. 양처럼 끌려가서 비참하게 죽을 것인가? 아니면 명예롭게 싸우다 자유인으로 죽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후자를 택했고 10월에 게토 내에서 유대인 전투조직이 구성되었다. 이들은 게토 곳곳에 비밀 장소를 만들었고 무기를 밀반입하기 시작했다. 1943년 1월 다시 나치가 유대인들을 추방하기 시작했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유대인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드디어 유대인들이 나치에 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게토 내에서 잠시나마 자신들의 자유를 만끽했다. 하지만 가만히 당하고 있을 독일군이 아니었다. 4월 19일에 독일군은 2천명의 무장친위대 전투부대 및 경험 많은 친위대 장군인 ‘위어겐 슈토프’를 투입한다. 게토의 유대인들에게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슈토프의 부대는 유대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게토의 건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파괴하고 불살랐다. 이 과정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불길을 피해 건물에서 뛰어내렸고 독일군들은 사람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총으로 맞추는 내기를 했다. 이러한 독일군 중에 블뢰쉐도 있었는데 그는 M28 기관단총을 들고 게토 곳곳을 누비며 만행을 저질렀다. 슈토프는 상부에 보고할 목적으로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겼고 여러 사진을 첨부했다. 이 사진들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이 여성과 아이들로 구성된 일단의 유대인들이 손을 들고 나오는 한 장의 사진이다. 특히 맨 앞 열에 있는 소년의 모습이 눈에 띄는데 공포와 두려움이 극대화된 모습으로 독일군들 앞에 끌려가고 있다. 또한, 이 사진에는 기관단총을 들고 대열을 응시하는 군인의 모습이 보이는데 그가 바로 블뢰쉐였다. 이 때의 사진이 훗날 어떻게 그의 운명을 바꿀지 모른 체 그는 열심히 유대인들을 학살했고 게토의 영웅적인 저항은 5월 16일에 공식 종료되었다. 바르샤바 게토의 저항에서 유대인 5만 6천명이 희생되었고 이것은 이듬 해 바르샤바 시민들의 對독일 봉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
종전 후 블뢰쉐는 소련군의 포로가 된다. 그의 잔인한 학살 경력을 잘 알지 못했던 소련군은 그를 단순 포로로 취급해서 소련 내 이곳저곳으로 보냈고 전후 복구 작업에 투입시킨다. 그러던 중 블뢰쉐는 1946년에 체코의 한 탄광에 보내지는데 이곳에서 갱목이 무너짐으로 인해 두개골이 골절되는 대형 사고를 당한다. 흉측한 얼굴이 되었지만 오히려 전범인 입장에서는 숨어 지내기 좋은 상황이 되었다. 그는 동독의 튀링엔주 ‘우어바흐’로 이동하여 결혼도 하고 애도 낳으며 가정적인 아버지로서 평범한 생활을 영위한다. 하지만 이런 생활은 오래가지 못하는데 게토에서 그와 함께 악명을 떨쳤던 ‘하인리히 클라우스터마이어’라는 사람이 1961년 서독에서 전범 혐의로 기소되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슈토프 리포트’의 사진과 관련하여 블뢰쉐의 존재에 대해 증언했고 서독 측은 그가 동독 어딘 가에 있을 것이라 추측하여 확인을 요청한다. 수사망이 좁혀오는 가운데 블뢰쉐는 결국1967년 1월에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에 의해 체포된다. 먼 길을 돌아왔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한 단호한 처벌을 받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찍힌 한 장의 사진에서 비롯되었다. 사진 속 앞 열에 나온 유대인 소년에 대해서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본인임을 주장했지만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사실그 소년이 누구인지는 의미가 없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와 같은 상황에서 극한의 공포를 느끼며 끌려갔다는 것이다. 그 공포는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