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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Nov 28. 2022

1933년, 우크라이나의 홀로도모르 (대기근)

20세기 100장의 사진 2

1933년 봄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시에서 아사한 사람들의 시신

2008년 11월 22일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에서는 경건한 분위기 속에 한 기념관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드니에프르강 한 쪽의 ‘페체르스크 언덕’에 위치한 이 곳은 푸르른 녹지와 어우러져서 기념관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공원 같은 편안한 느낌을 주는 장소였다. 기념관 입구에는 작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는 한 조각상이 서 있었는데 뼈만 남은 앙상한 소녀가 구슬픈 눈으로 밀 한 움큼을 쥐고 있는 모습이었다. 소녀 조각상의 제목은 ‘유년 시절의 씁쓸한 기억’이라는 편안한 녹지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는데 이 뒤로는 거대한 촛불을 형상화한 건물이 서 있었다. 그 날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누구 하나 웃지 않았고 경건하다 못해 침통한 표정으로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이 곳은 대체 무엇을 기념하기 위한 곳이었을까? 이 곳은 우크라이나에서 75년 전에 벌어진 한 비극적 사건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그 사건은 오랜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외부 세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심지어 직접 이것을 경험했던 우크라이나인들은 대부분 침묵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이 사건을 ‘홀로도모르’라 불렀는데 현지어로 ‘굶주림을 통한 죽음’이라는 무서운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917년에 발생한 러시아 혁명은 인류사의 거대한 실험장이었다. 볼셰비키가 주축이 되어 정권을 잡은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는 극심한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게 된다. 반혁명 백군 및 미국, 영국, 일본 등 다국적 연합군과 싸우던 볼셰비키는 ‘붉은 군대’의 창시자인 트로츠키의 출중한 역량에 힘입어 결국 내전을 승리로 이끈다. 이후 소련이 세워지고 1922년이 되자 스트레스와 총상 후유증에 시달린 레닌의 건강이 점차 악화되는데 많은 사람들은 트로츠키를 가장 우선적인 후계자로 예상하였다. 하지만 트로츠키는 자만심이 너무나 강했고 그만큼 다른 사람들의 견제도 강하게 받았는데 이 와중에 나름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던 ‘이오시프 스탈린’이라는 인물이 급부상하게 된다. 카프카즈 산맥의 조지아 출신인 스탈린은 어릴 적 앓았던 천연두 자국이 인상적이었는데 당 기관지 ‘프라우다’ (러시아어로 진실/진리를 뜻함)지의 초대 편집장이었고 러시아 혁명과 내전을 거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그는 트로츠키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겸손하고 상식이 있다는 주변의 평가를 받았고 결국 1922년 4월에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자리에 오른다. 한편 병약해진 레닌은 스탈린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는데 그의 품성이 대단히 거칠고 억압적인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레닌의 판단이 현실로 증명될 때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24년 1월에 레닌이 사망한 이후 스탈린은 권력과 체제를 공고히 하기위한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는데 우선 트로츠키를 포함한 그의 반대파들을 하나, 둘 제거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일부 수용했던 레닌의 ‘신경제정책 (NEP)’을 포기했는데 1928년에는 국가의 기간산업을 강화하는 ‘산업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스탈린은 이러한 산업화를 지원하기 위해 농업을 적극 활용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농업집단화’가 추진된다. 소련의 여러 지역 중 우크라이나는 ‘흑토’라는 비옥한 땅을 가진 전통적인 곡창 지대였다. 이곳에는 자신의 땅을 소유한 상대적으로 부유한 쿨락 (Kulak)이라 불리는 자작농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자신의 땅과 소출을 빼앗으려는 스탈린의 정책에 강하게 반발했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내전 기간 동안 신생 폴란드의 지원과 자생 민족주의자들을 통해 잠시나마 독립국을 세운적도 있었고 공산주의 혁명 추진에 큰 장애가 되었던 지역이었다. 스탈린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는 일련의 사태를 대단히 심각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이들의 관점에서 볼 때 전반적인 상황은 무엇인가 조치가 필요하다고 느낄 정도로 위험했고 마침내 소련 당국에 의한 ‘특단의 조치’가 취해지기 시작했다.


1932년경 소련 당국은 우크라이나의 쿨락을 대상으로 곡물 생산량을 증대하여 요구했고 이들이 요구한 양을 채우지 못하면 농장을 습격해서 저당된 곡물과 심지어는 씨앗 종자까지 빼앗아 갔다. 또한 이들이 소유한 가축들도 징발하기 시작했는데 농민들은 당국에 빼앗기기 보다는 차라리 도살해서 잡아먹는 것을 택했다. 소, 말 등 밭을 경작하는데 쓰일 가축들마저 사라지자 생산성은 더욱 떨어지는 악순환이 발생하게 된다. 1932년 하반기를 지나 추운 겨울이 되었고 우크라이나에는 더 이상 먹을 것이 많이 남지 않게 되었다. 당국은 우크라이나의 식량을 대거 반출했지만 아사 직전의 사람들을 돕기 위한 식량 반입은 제한했다. 굶주린 사람들이 먹을 것을 찾아 소련 내 다른 곳으로 움직이려 했지만 소련 당국은 이들의 출입 역시 철저히 통제했다. 이러한 통제의 의미는 살고 있는 그곳에서 천천히 굶어 죽으라는 ‘암묵적인 명령’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진 사람들은 처음에는 가축을 잡아먹었고 이후 개와 고양이, 그리고 종국에는 쥐까지 먹게 되었다. 하지만 굶주림에 미쳐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해가 바뀌면서 식량 사정이 더욱 악화되자 믿을 수 없는 루머들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식인에 대한 무시무시한 소문이었는데 배고픈 사람들이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소문은 사실이었고 수천 건의 사례들이 당국에 적발되어 처벌받았다. 1933년 봄부터 여름 사이 기근이 절정에 달했을 때 하루 최고 사망자가 2만 명에 육박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유럽의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는 농촌과 도시를 가리지 않고 문자 그대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의 지옥 같은 상황은 당시 소련의 철저한 통제 속에 외부 세계에 차단되었다. 이에 대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취재하려는 일련의 시도가 서방 측 사람들에 의해 행해졌다. 그러한 시도 중 하나는 영국의 언론인인 ‘가렛 존스’의 사례였는데 1933년 3월에 세번째로 소련을 방문한 그는 당국에 의해 정해진 루트로 여행을 하던 중 열차에서 내려 몰래 빠져나오게 된다. 소련 당국의 달콤한 선전과 달리 우크라이나에서 그가 목격한 현실은 지옥도 그 자체였다. 며칠 간의 일탈을 통해 그가 본 것은 대규모로 굶주림에 지쳐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었고 심지어 “잡아 먹힐지 모르니 밤에는 돌아다니지 말라”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경고를 들었다. 이는 당시 ‘뉴욕타임스’의 모스크바 특파원으로서 스탈린 체제 미화에 앞장서며 1932년 퓰리처상을 받은 ‘월터 듀란티’의 기사와 상반되는 것이었다. 존스는 가까스로 영국에 돌아와 그가 경험한 것을 기사로 냈지만 당시 친소적인 영국의 지식인 진영이나 이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대중의 반응은 지극히 차가웠다. 그의 기사는 묻혀 버렸고 가렛 존스는 1935년 내몽골을 여행하던 중 의문의 강도를 만나 살해당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배후로 소련 당국을 의심했다.      


1933년 하반기를 정점으로 기아 상황은 조금씩 개선된다. 스탈린 입장에서는 자영농들의 기반을 철저히 무너뜨렸으니 의도한 목적은 달성했는지 모르지만 우크라이나는 모든 사회 토대가 붕괴되었다. 350만명에서 최대 700만명까지 추산되는 희생자의 숫자는 어디까지나 계산 상의 수치였고 정확한 숫자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참혹한 역사를 겪으며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은 소련 체제를 증오하게 되었고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 이들을 잠시나마 해방자로 간주하게 되었다. 홀로도모르는 공산주의 체제가 유지되던 1990년대초까지 소련 내에서 터부시 되는 주제였다. 우크라이나가 소련방에서 탈퇴하고 독립국이 된 이후 에서야 외부로 알려지고 논의가 가능했던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1998년에 11월 4번째 토요일을 공식적인 ‘홀로도모르 추념일’로 지정했는데 현재 캐나다, 호주, 브라질 등 전세계 21개국이 홀로도모르를 ‘제노사이드’ (인위적인 대량학살)로서 인정하고 있다. 한편 퓰리처 위원회는 2003년에 소련과 스탈린에 대한 왜곡된 기사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언론인 월터 듀란티에 대해 재심을 진행했으나 그의 수상을 유효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홀로도모르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은 진실이 항상 이기는 것은 아니며 세상의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수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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