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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문 Sep 19. 2023

<시카리오>의 악몽

지옥의 경계선에 서다

지독한 악몽에 시달린 날이었다. 꿈속에서 누군가 높은 양반이 내게 총을 주며 동료 한 사람을 정조준해서 쏘라고 했다. 뒤는 자기가 감당한다고. 이성적 판단이 되지 않는 나는 손을 벌벌 떨었다. 저 착한 사람을 왜 죽이라는 것일까. 머뭇거리는 사이 그 사람은 총을 쏘지 못하는 나를 쐈고, 난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깼다. 그날 저녁 <시카리오>를 보는데 악몽이 다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체험을 했다.


 

저고도 비행으로 내려다본 멕시코 야산의 모습이 흡사 악마의 얼굴 같다. 반건조 기후에서 드문드문 자란 관목들의 목마름을 비웃듯 거리엔 흙먼지가 요란하다. 살육과 납치가 횡행하는 '후아레즈'는 지옥의 별명이다. 지옥엔 물이 없다. 신약성서 누가복음에 나오는 지옥에서 고통을 겪던 이가 제발 물 한 방울 자기 혀에 묻혀달라고 애걸했듯이. 그 건조한 사막 옆 도로를 질주하는 다섯 대의 자동차 타호(Tahoe). 쉐보레 타호는 미국 서부 호수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그 호수 다섯이 줄을 지어 지옥으로 향한다. 하지만 지옥을 적시기엔 턱없이 모자라 보인다. 



그 차에 FBI의 엘리트 요원 케이트(에밀리 블런트)가 타고 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그녀는 침착하지만 재빠른 특등사수다. 애리조나 챈들러에서 벌어진 인질사건 진압작전에서 우연히 수많은 시신을 발견하면서 그녀는 잔챙이 수사가 아닌 몸통 검거작전에 투입된다. 타깃은 멕시코의 제1마약조직 소노라 카르텔. 일인자부터 3인자까지 한꺼번에 검거하기 위한 무지막지한 작전이 시작된다. 총지휘자인 CIA 출신의 맷(조슈 브롤린)의 허풍 아닌 허풍과 정체불명의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의 과묵함이 케이트에겐 낯설고 이상하다.


중저음의 기괴한 배경음악은 계속되고 후아레즈로 진입한 이 올스타들은 본능에 의거해서 작전을 수행한다. 민간인이 보는 앞에서도 살상용 사격이 거침없다. 케이트에겐 도무지 허용될 수 없는 장면. 


<시카리오-암살자들의 도시>는 우리가 살고 있는 별의 아주 어두운 세계를 보여준다. 드니 빌뇌브는 악을 제대로 응시할 줄 아는 감독이다. 일찍이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이 <엑소시스트>에서 소녀를 총체적으로 잠식한 악마의 정체를 낯낯이 그렸다면, 드니 감독은 <그을린 사랑>에서 중동의 모래바람 속에 숨겨진 처절한 지옥도를 공개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멕시코의 잔혹한 마약도시 후아레즈를 선택했다. 케이트가 그랬듯 ‘후아레즈’에서는 우리의 정상성과 규범이 철저히 유린당하고 혼란이 증폭되어 아노미상태를 경험한다. 케이트가 거의 정신을 잃어갈 무렵, 알레한드로는 갑자기 조연에서 주연으로 치고 나온다.



빛이 희미하면 지옥에 가까운 줄 알라. 땅굴이라는 지옥으로 줄지어 들어가는 상남자들을 보며 <엑소시스트>에서 악마를 축출하기 위해 소녀의 방으로 올라갔던 두 신부가 떠올랐다. 다시 들리는 기괴한 중저음에 숨소리가 교차할 때, 흑백 네거티브와 단색의 초록을 오가며 숨 막히는 긴장과 공포를 극사실로 묘사한 촬영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 영화를 두 번 봤다. 처음에는 몇 가지 이해되지 않는 장면으로 몰입감이 방해됐는데 다시 보니 대사 하나하나가 단서였고 인과관계의 고리였다. 모든 게 이해되면서 머리로 이해되던 영화는 마음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어”라고 말하는 악당 파우스토에게 조용히 내뱉는 알레한드로. “내겐 그렇지 않아.” 알레한드로의 이 한마디에 눈물이 쏟아졌다.


누군가에 의해 애초부터 진압작전의 경계가 규정을 벗어나도록 조정되었듯이 우리가 아는 지옥의 경계도 점점 넓어지는 것일까. 사방에 지옥도가 펼쳐지는 현장이 보였다면 이곳은 바로 디스토피아. 정의와 희망이란 단어는 화석화되고 최악을 막기 위한 차악의 수준, 그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깊이 들어갈수록 어둠도 깊어졌다. 그리고 그 차악의 경계에 케이트가 서 있었다. 내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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