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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문 Sep 17. 2023

<언컷젬스>의 대박

인생은 일장춘몽

가끔 외국에서 모르는 발신자의 이멜이 온다. 대충 내용은 비슷하다. 아프리카의 어떤 나라에 사는 여성인데 남편이 죽고 100억 원의 유산을 받았다. 정부가 이 재산을 몰수하려고 하니 이를 전액 송금해서 좋은 일에 쓰고 싶다. 자신은 현재 말기암 환자라서 희망이 없는데 재산을 빼앗기기는 싫으니 자기에게 연락하면 송금하겠다는 내용이다. 보나 마나 스팸메일이라서 지워버린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든다.


얼마 전 역시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서 이메일이 왔다. 지우려다가 한번 읽어보는데 내용이 좀 달랐다. 상속유산이 200억 원인데 자신의 10살 아들을 한국에서 교육시키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대신 아들을 입양시켜 대학을 졸업시키고 직장인으로 살아가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상속유산에 대한 근거는 자신의 죽은 남편이 보석광산에서 일을 했는데 그 광산에서 귀금속의 일부를 가족에게 남겼고 이를 스위스 은행에 넣어뒀다는 것이었다.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고 사연도 절절했다. 스팸메일의 문장패턴을 구글에서 검색해 보면 금세 가짜라는 판명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번 메일은 스팸메일 사례에 없었고 집주소도 나와 있고 이메일 주소도 본인의 이름을 딴 구글메일이었다.



며칠 후 넷플릭스 영화 <언컷 젬스>를 보는데 소름이 쫙 끼쳤다. 영화는 2010년 에티오피아 웰로 광산을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주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거기서 오팔의 원석을 캐는 아프리카 유태인들의 모습이 화면에 잡힌다. 영화를 멈추고 이메일을 다시 뒤졌다.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에티오피아 귀금속 광산은 실제 존재했고 교육열이 높은 것으로 보아 유태인 계통이 아닐까. 갑자기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유태인 혈통의 사프디 형제가 연출한 <언컷 젬스>는 뉴욕의 보석상 하워드(아담 샌들러)의 일확천금을 향한 집념을 냉소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농구도박에 빠져 사방에 빚을 진 하워드의 보석상에 보스턴 셀틱스의 센터 케빈 가넷(실제 농구선수)이 찾아온다. 물론 그를 보석상까지 끌고 오는 데는 당연히 중개인의 작업이 있었다. 마침 그날 하워드가 꿈에 그리던 에티오피아의 오팔 원석이 도착한다. 유태인인 하워드는 여러 경로를 거쳐 어렵사리 원석을 구할 수 있었다. 생선 뱃속에 잘 감춰져 배송된 원석은 보기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멋이 있었다. 하워드는 경매시장에서 못 받아도 100억 원은 챙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허풍쟁이가 그만 케빈에게 그 원석을 보여주며 자랑하기 시작한다. 원석을 보고 반한 케빈은 하루만 빌려달라고 하고, 그 보석의 힘으로 게임을 승리로 이끈다. 돌 속에 박혀서 영롱한 빛을 내는 오팔의 모습은 신비함 그 자체였다. 다음 날 2억을 줄 테니 팔라는 케빈에게 하워드는 월요일 경매에서 최소 60억 원을 받을 거라고 단호히 거절한다.



문제는 하워드의 평소 신용이었다. 그는 물건만 생기면 전당 잡히고 그 돈을 농구도박에 걸었다. 그러다 보니 빚쟁이들의 독촉이 이어지고 급기야 채권자 중 한 명인 친척 형에게 잡혀 죽을 고비를 넘긴다. 하지만 하워드는 겁내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을 한 판에 바꿔줄 가공하지 않는 보석(언컷 젬스)이 있으니까. 드디어 경매의 날이 다가왔는데 이게 웬일인가. 전문가의 감정가가 1억 7천만 원 수준에 그친다는 날벼락같은 소식이었다. 케빈에게 2억에 팔아버릴 걸 그랬나 후회하는 하워드는 장인(주드 허시)을 동원해 감정가를 1억 9천만 원까지 부풀려 사들인다. 그리고 급히 케빈에게 1억 8천만 원에 되파는 해프닝을 벌인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그 돈을 전부 농구도박에 걸어버린 것이다. 원석의 새로운 주인이 된 케빈과 그의 팀 보스턴 셀틱스에게.



돈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빚쟁이들을 점포 내에 감금한 채 농구경기를 지켜보는 하워드. 케빈이 득점할 때마다 그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환호한다. 빚쟁이들은 두 시간을 갇힌 채 하워드의 광적인 도박의 현장을 지켜봐야만 했다. 과연 케빈의 리바운드와 승리, 득점 세 가지 경우의 수를 모두 맞춰 원금의 10배인 22억 원을 벌 수 있을 것인가.


주변 사람들이 주식과 부동산에 영끌한다는 소식은 잔잔했던 내 마음에도 파문을 일으킨 게 사실이었다. A는 주식투자로 10배를 벌었다더라, H는 몇 십억을 벌었다더라, K가 몇 년 전 분양받은 아파트는 세 배가 되었다더라. 은행 금리가 무의미해진 지금 저축은 더 이상 재테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주식을 할 목돈도 없다. 로또복권으로 희망고문 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와중에 에티오피아에서 날아온 이메일은 진위여부를 넘어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다시 찬찬히 읽어보는 동안 상상의 나래는 벌써 10년 뒤의 미래를 날고 있었다. 입양한 아들은 20살이 되어 한국의 대학생이 되었다. 유태인 혈통이라 역시 똑똑하고 수학을 특히 잘했다. 서울의 모 대학 경제학과에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에티오피아의 우월한 DNA를 가진 아들은 아마추어 마라토너로 벌써 비공식 세계 기록에 접근하고 있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황영조에 이어 두 번째 금메달이라고 벌써부터 스포츠 기자들은 연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인천공항에서 태극기와 에티오피아 국기가 함께 펄럭이는 현장이 그려지며 흐뭇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과연 사람을 길러낸 기쁨으로 웃는 것인가, 유산으로 받은 돈 때문에 웃는 것인가.

저녁 식사 때 아내와 아이에게 에티오피아 200억 이야기를 했다. 돌아오는 얘기는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미쳤구나! 당신 같은 사람이 스팸사기에 걸리는 거야” 과연 스팸사기에 걸려서 얼마 남지 않은 잔고마저도 털릴 뻔한 위기였을까. 하긴 그 큰돈을 어디서 어떻게 수령한다는 것인가. 차라리 하워드처럼 생선 뱃속에 넣어 운반한 원석이라면 모를까. 어쨌거나 그날 저녁 고이 저장해 둔 이메일을 삭제하면서 200억 스토리는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달려가는 걸 바라보다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보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살 일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만악의 근원이라고 성서는 말하지 않았는가.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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