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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자차 Mar 02. 2024

[영화] 파묘 Exhuma 후기

핏줄 


나는 간혹 아주 특이한 꿈을 꿀 때가 있다. 한 번을 그렇게 상상해본 적 없는 일을 꿈으로 꾸곤 한다. 그런 꿈은 마치 눈을 떴을 때의 현실과 똑같아서, 나는 그런 꿈을 꿀 때면 언제나 꿈이 아닌 어느 현실로 돌아갔다고 인식한다.

     

영화 초반에 굉장히 중요한 말이 나온다. 한 회장 댁의 묫자리를 보던 지관 김상덕이 자손이 모여 서로 우는 모습을 보며 읊조린 그 말. 뒷이야기를 예고하는 말처럼 내 귀에도 그 무엇보다 가장 정확하고 바른말로 들렸다. 대대손손 이어지는 핏줄의 영향력. 그 집안에 태어나는 이유에 대해, 그 집안의 흥망성쇠에 대해, 풀어지지 못한 원한이 누구를 찾아가는지에 대해서.

     

몇 년 전에 꾼 꿈이 그렇다. 왜 사람은 태어나는가에 대해서 이해하게 된 꿈 말이다.

     

부모와 자식만큼 내리사랑이 확실한 관계는 없다. 자식은 사람이 만들지 않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녀가 만나는 것은 이유가 있고, 그 이유로 길이 열려 자식이 태어난다. 자식은 자신을 만든 남녀의 유전자를 이어받아 계승한다. 한 인간이 받은 유전자엔 무엇이 담겨 있을까. 간단하게 조상이라는 까마득하고 막연한 말에 숨겨진 두 집안 이상의 내력을 품고 있다. 당장 내 부모의 유전자와 내 부모를 낳은 부모의 유전자, 또다시 그 부모를 낳은 부모의 유전자가 셀 수 없을 정도의 축적된 정보로 피와 살과 뼈를 통해 손과 발을 만들고 심장을 만들고 신경을 연결하며 뇌를 구성한다. 그뿐일까. 내 핏줄은 아니지만 어떤 사건으로 내 핏줄이 되어버린 사람의 유전자 또한 핏줄이라는 이름으로 계승된다. 그 수많은 유전자가 살아온 삶을 과연 한 인간이 피할 수 있을까. 난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반드시 이어진다. 내가 태어난 이상.

     

그때 당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죽기 직전 손가락을 가리키며 두 눈으로 한을 적는 일이었다. 미처 이루지 못한 일을 이어가기 위해 소망을 적는 일이었다. 억울한 마음과 깊은 원한이 향하는 곳은 하나였다. 혼이 흩어지고 저승에서 깨달은 것은 살아온 삶이 원인이 되고 죽는 순간의 모습으로 인연을 맺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 오래도록 궁금해했던 탄생의 비밀이었다.

     

나는 곧 태어났다. 나에게 칼을 겨눈 자의 자손으로, 그의 집안의 가장 귀한 핏줄을 이어받았다. 내게 칼을 겨눈 자는 독기와 악기로 가득한 얼굴로 나를 해하였는데, 그의 가장 귀한 핏줄이 되어 다시 만난 그는 한없는 자애로움과 사랑을 보내왔다. 나와 주변의 목숨을 뺏었던 자들은 우리의 존재를 지키는 자들로 충성을 바쳤고, 기꺼이 자신의 삶을 내놓았다. 그중 가장 악독하게 나를 해한 사람은 오직 나를 위해 아낌없는 내리사랑을 퍼부었다. 나는 그 사람이 가장 아끼는 자식이었다. 다시 만난 우린 못다한 영광을 누렸고, 직접 망가뜨렸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복수였다. 인연에 의해 태어난 우리가 그저 운명이 이끄는 대로, 피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걸었을 뿐이었다.

     

이미 죽은 조상은 자손에게 족보를 남긴다. 족보는 유전자다. 핏줄이다. 나의 피에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조상의 정보가 전해진다. 분명 아름답게만 살아온 족보는 아닐 것이다. 전쟁으로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있을 것이고, 남의 것을 빼앗아 내 배를 채운 탐욕스러운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살아남고자 누군가의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익을 위해 진실을 외면한 자도 있을 것이고, 비인간적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내 핏줄의 근원과 역사를 모르나 핏줄이 만들어낸 운명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삶에서 비롯된 불행과 어려움을 핏줄 탓하는 것이 아니다. 결과를 보지 못한 원인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라는 뜻이다. 내 안엔 많은 원인이 있을 테고, 때를 기다리듯 숨고 있을 테다.

     

그 꿈은 ‘나’의 단편이었지만 장편 속의 단편이기도 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말은 한 인간 그 자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한 인간 하나의 생명은 모두 근원이 존재하니까. 순수하고 맑게 흐르는 냇가에 더러운 물이 흐른다면, 그 더러운 물을 부은 사람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냇가에 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더불어 이미 더러워진 냇가를 정화해야 한다. 올바른 방법으로. 얼마나 많은 고통과 시간이 걸릴지라도. 때론 억울함도 비추겠지. 하지만 감당해야 한다. 그렇게 가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올바른 방법일까. 영화에선 이에 대한 답을 화림과 상덕의 모습으로 비유해준다.

     

영화 속 백두대간의 척추에 깊이 박힌 일본의 귀신이자 철심을 없애는 방법은 자연의 이치 그 자체였다. 영화가 끝으로 갈수록 풍수사의 역할이 무엇일지 궁금했는데, 이렇게 마지막 점을 확실하게 찍어주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되자 영화가 더 마음에 쏙 들어왔다. 나는 학문이란, 당시 세상을 이해하고 싶던 사람이 가장 잘하는 방법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무엇을 공부하든 그 학문을 통달한 사람은 결국 하나의 진리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원리에 의해 원인-결과의 과정을 겪는지 풍수사와 물리학자의 견해가 크게 다를 수 없는 이유다. 일본 귀신을 우리나라의 방식으로 없앤 것도 그런 이유이지 않을까. 원리는 같으니까. 그렇다면 우리네의 아픈 역사도 얼마든지 우리의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한을 풀 수 있을 것이다.

     

봉길이 누워있던 병원에서 상덕과 화림이 나누던 대화도 절묘했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항일운동을 한 독립운동가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한 이유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땅이고,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면, 우리가 하겠다. 내가 하겠다. 국가와 민족과 영토와 역사를 지키겠다는 더럽혀질 수 없는 명분과 고결하고 폭발적인 삶들이 지금의 핏줄을 잇도록 해주었다. 자신의 온 힘을 다해 일본 귀신을 죽이고 나서도 딸의 결혼식을 떠올리며 저승에서 다시 돌아온 김상덕처럼. 그런 우리들의 피가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계속해서 흐르고 있는 그 증거가 아닌가. 이 핏줄을 닦고 닦아 영원토록 계승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미 우리네의 핏줄엔 그날의 기억이 깊게 새겨져 있으니까. 강렬한 기억으로, 계승하지 못한 이들의 핏줄까지.

     

그래서 그들도 이 계승되는 핏줄에 무언가를 새기고 싶었을 테다. 일본의 주술사는 그 당시 그들이 믿던 방법으로 원을 세웠다. 지금까지도 통용되는 방법이든 아니든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 그 원을 세울 때의 그 순간 이미 원인이 심겼다. 씨앗이 뿌리내렸다. 영화는 조선을 점령했던 일본의 야욕을 백두대간의 척추에 그들의 원을 담은 철심을 심는 것으로 표현했다. 한 번 심긴 원이 세월이 지났다고 사라질까. 찾아내어 해결되지 못한 원인은 때를 기다리며 숨죽이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부모에게 유전자를 받았다고 그 모든 것이 드러나지 않듯, 나를 건너뛰어 그 다음 세대로 또 그 다음 세대로 넘어가 운명처럼 드러나듯이 말이다. 이 원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원을 심은 자의 바람대로 된 것이 아닌가. 척추에 뿌리내려 대대손손 핏줄로 타고 내려가는 가족처럼. 숨겨진 원이 때를 만나 발현돼 봉길에게 씌워진 것이 그저 뭐에 홀린 모습일 뿐인가.

     

상덕이 영근과 화림에게 했던 말, 이 땅은 우리의 후손이 살아가야 하는 땅이고 이 일은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한다는 그 말은 그런 뜻이지 않을까. 우리의 모습이 봉길이 아니라고 할 근거는 없다. 우리가 아니라면 우리의 후손이 봉길처럼 또 앓아누울 것이다. 일본 귀신이 우리의 후손인 봉길의 허리를 통해 해를 가했듯, 하필이면 우리가 보고 넘긴 그 빈틈으로 비집고 들어갔듯. 그러니 우린 봉길이고, 우리의 후손도 그와 같다. 그 네 명의 무리에서 봉길이가 가장 막내고 화림의 곁에 있으면 그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보국사에 보관된 묘를 파는데 쓰인 장비들과 그 원인의 서적들. 수없이 파내고자 했던 여러 명의 김상덕, 고영근, 이화림, 윤봉길, 이원봉. 그날 그들이 풀지 못해 핏줄에 새기고 후손에게 전달했던 그 강한 의지는 오늘이 돼서야 드러났다. 그 뜻을 깨달은 핏줄의 발에 탁 걸려 그 피가 이끄는 운명으로 걸음을 옮겼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가장 미신과 맞닿은 일을 한다는 사람의 손으로. 죽음과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의 시선으로. 어느 곳도 포함되지 못한 경계에 있는 사람의 부름으로.

     

보국사를 세운 원봉스님과 그 보국사에 모인 네 사람은 각자의 방법으로 길을 열었다. 우리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손가락을 가리키며 눈으로 한을 새기고 이 땅에 파묻혀 있을까. 영화 파묘에서 척추에 박힌 관을 빼내고, 우리의 방법으로 그를 없앤 것으로 충분히 위로받지 못할 것이다. 충성을 바친 우리 집안의 묘에 왜 그런 것이 있는지 정말 모르겠다는 고모의 말은 그래서 틀렸다. 아무래도 믿을 수 없다는 노인의 말도 틀렸다. 그래서 내 아들을 살려달라는 남자의 말도 틀렸다. 충성을 바쳤기 때문에 그 핏줄 전체를 바친 것이다. 스스로 척추에 박힌 심이 되겠다고 한 것이 우리가 아닌 타인의 완력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이 땅에 무엇을 심었나. 내 그림자엔 무엇이 감추어져 있나. 내가 이 땅에 해가 될 것을 심었다면 부디 내가 죽기 전에 깨달아 스스로 파낼 수 있기를. 흔적도 남기지 않기를. 나와 함께 영원히 사라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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