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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OTT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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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SL May 29. 2023

<파친코>와 OTT 서사의 리얼리티

'수용자 자원론'에 관한 메모

1. 서론: 글로벌 OTT와 역사 재현의 새로운 도전    


2019년 11월 출범한 애플TV플러스는 2021년 11월 한국 서비스 시작과 더불어 <파친코>(2022년 3월)를 출시하여 전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파친코>는 평론가들로부터 높은 호평을 이끌어내며 방송계의 퓰리처상이라 불리는 피버디상(Peabody Awards) 엔터테인먼트 부문 수상 외 수많은 상을 거머쥐었다. 원작을 각본하고 제작을 책임진 수 휴(Soo Hug)는 “국경을 초월하는 현대 TV의 글로벌하고 미래지향적인 비전을 제시한 작품”이라고 수상 이유를 설명했다. 


<파친코>의 무엇이 ‘글로벌’하고 ‘미래지향적’일까? 우리의 이야기지만 ‘우리 것’이라 단언할 수 없는 이들 콘텐츠가 위치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나마 초기 OTT 콘텐츠의 제작사나 감독, 배우, 스탭 등은 한국 콘텐츠 산업에 속한 것이었지만, <파친코>에서 제작과 감독은 한국계 미국인이었고 배우와 스탭은 그들에게 고용되었을 뿐이다. 한국의 역사가 차용되었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수 휴의 해석은 <파친코>가 글로벌 시각에서 제작되었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한국은 물론 대부분의 민족국가 서사물에서 익히 없던 일이다. 아무튼 그렇게 미디어 대중문화의 리얼리티는 다시 쓰이고 있다. 


전통적으로는 텔레비전이, 2023년 이 시대는 OTT가 미디어 리얼리티를 실현하는 대표적인 문화기계(cultural machine)이다. 문화비평에서 리얼리즘은 19세기 낭만주의 또는 신고전주의에 대한 반기로서, 현실모사가 예술의 중요한 역할임을 자처하는 예술 사조이다. 여기에서 핵심은 무엇이 현실을 그럴 듯 하게 보이게 하는지 그 ‘방법’에 관한 것이다. 현실의 이데올로기나 관계를 객관적으로 묘사하여 재현된 현실로서 실제 현실을 자연화할 수도 있고, 이상적이라고 여겨지는 세계에 적합한 인물상과 그런 인물들간의 관계를 총체성의 수준에서 그려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현실과 극적 세계를 오가며 서로에게 말을 걸거나 특별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강조하여 수용자가 현실을 지각하도록 촉구할 수도 있다. 


리얼리티의 실현 방법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 조건에서 일차적인 것은 창작을 위한 물질적 요소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독일의 악행을 그린 그 숱한 영화는 헐리우드를 움직이는 수많은 유대인 창작자, 유대자본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실제 헐리우드 7대 영화사 중 파라마운트, 20세기폭스, MGM/워너브라더스, 콜롬비아, 유니버셜 등 주요 영화사는 유대계 J.P 모건과 록펠러, 듀퐁이 설립했거나 대주주들이다. 하켄크로이츠 문양이 터부시된 데에는 ‘패전국’ 나치와 이항대립하는 ‘승전국’ 미국의 지위도 있지만 기호투쟁에서 승리한 문화산업의 공적도 한 몫 했으리라. 


그렇게 보면, <파친코>를 만든 애플이라는 플랫폼 자본의 영향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파친코>는 역사의 직접적 당사자가 아닌 글로벌 플랫폼이 (한국계) 미국인의 작가와 감독을 고용해 완성시킨 작품이다. 그들은 <파친코>를 제작함에 있어 대한민국 수용자도 어느정도 고려하지만, 그보다 훨씬 큰 글로벌 수용자를 보다 중요하게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그들의 최종 목적은 전세계를 시장으로 삼는 OTT의 가입자 유치와 ‘멤버 유지’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는 또한 전통적인 TV 방송사가 민족국가 내 창작산업에서 광고주 자본에 기댔던 것과 달리, OTT 플랫폼 자본이 전세계 가입자 재원에 기대는 새로운 현상을 목도하게 된다. 전자가 콘텐츠로 모여드는 수용자를 광고주에게 판매하는 수용자 상품론(audience commodity)으로 설명된다면, 후자는 전 세계 수용자의 재원이 콘텐츠 생산의 바탕이 되는 수용자 자원론(audience resource)으로 설명된다. 역사 재현의 새로운 국면이 도래한 것이다. 


이 글은 민족국가 내에서 유통되는 기존 TV의 채널-미디어 콘텐츠와 다른 OTT 플랫폼-미디어 콘텐츠의 리얼리티에 대해 논의한다. 특히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는 OTT 서사물이 기존 TV 드라마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그 목적의 한 켠에는 전통적인 미디어 정치경제학과 다른 플랫폼 정치경제학의 새로운 도전도 포함한다. 수용자의 재원과 데이터로 작동하는 주목경제(attention economy)의 지평 위에서 역사적 사실의 새로운 재현은 과연 어디를 향하는가?       


2. OTT 서사극 <파친코> 읽기     


1) 굴종의 푼크툼, 인간존엄의 생존법

20세기 헐리우드 영화는 유럽, 중국, 일본, 인도, 아프리카 등에서 이야기의 소재를 가져오지만 항상 헐리우드 방식으로, 즉 미국식 캐릭터와 미국식 서사구조로 이야기를 구성했다. 가령, 20세기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1956년작 <왕과 나>(Walter Lang Director)는 아시아 군주의 야만성이 서구 문명인을 만나 개화하고 국가도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한다는 서구적 시각의 서사이다; 시암(태국)의 왕(율 브린너 분)의 초청을 받아 영국에서 방콕에 도착한 젊은 미망인 안나(데보라 커 분)는 거칠고 문명화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왕에 실망해 돌아가려한다. 하지만 곧 이어 그 왕이 야만인이 아니고 오히려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알고 그를 돕는다. 이후 어떤 오해로 둘 사이는 다시 파국을 맞고, 왕을 만나주지 않는 안나로 인해 왕은 서재에 틀어박혀 책만 읽다가 병을 얻는다. 왕의 진심을 알게된 안나는 다시 왕과 화해하고 시암의 근대화를 위해 헌신할 것을 약속하지만 왕은 끝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이 근대화의 위업을 이어간다. <왕과 나>는 감독과 배우는 물론, 서사의 주제와 서술 방향이 모두 제작국인 서구적(미국) 가치에 입각해 있다. <라이언 킹>, <뮬란>,  <포카혼타스>, <정글북>, <미녀와야수>, <겨울왕국> 등 그 외에 숱한 헐리우드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이다. 


그에 반해, OTT는 현지화(localization)에 좀 더 다가간다. 그렇다고 OTT 콘텐츠가 해당 국가의 현지 장르관습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아니다. OTT는 국가마다 다른 로컬의 장르관습을 글로벌 장르관습과 적절히 섞는 길을 택한다. <파친코>는 그간 한국 TV 드라마가 선택해 온 식민지 조선인들의 고난에 찬 삶 또는 결연한 저항이 아닌 디아스포라 가족의 연대기를 그린다. 그것은 한국적 시각도 그렇다고 일본의 시각도 아닌 글로벌 시각에 가까운 서사이다. 엄밀히 말해, <파친코>는 특별히 피식민자와 그 후손의 가족 연대기를 허구적 연출로 창작한 민족지 영화, 즉 영상인류학에 가깝다. 


<파친코>에서 일제 강점기가 로컬 코드라면, 글로벌 코드는 디아스포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파친코>는 로컬 코드를 포함하지만 글로벌 코드에 좀 더 무게가 실린 서사이다. 한국 TV 드라마에서 식민지 조선의 디아스포라는 일제나 지주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또는 독립투쟁을 위해 만주로 이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1980년대 조총련이 깊게 개입한 것으로 그려진 재일조선인북송 관련 드라마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에 반해, 강제납치에 강제이주를 당한 아프리카 흑인, 20세기 나치 체제하에서의 유대인, 일본 및 미국 거주 한인 동포, 그리고 최근 유럽으로 이주해 간 시리아 난민 등 글로벌 차원에서는 오래되고 빈번한 일이다. 대중문화를 이끌고 있는 미국은 이주민이 만든 국가이다. 


따라서 <파친코>는 포스트식민주의(post-colonialism) 시대 디아스포라된 자이니치들의 정체성과 인간존엄의 문제에 대해 말한다. 수사법은 부분으로서 전체의 속성을 대변하는 제유(synecdoche)이다. <파친코>의 자이니치들에게는 크게 두 세대로 구분되는데, 민족을 내면화하고 있는 주인공 선자 같은 1세대 자이니치와 민족을 타자화할 뿐 아니라 일본, 미국 등 다국적 정체성을 골고루 내면화한 손자 솔로몬 같은 2, 3세대 자이니치가 그들이다. 선자는 절름발이에 언청이지만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준 아버지와 일제 강점기 이전 조선에서의 삶을 뒤로 하고 식민자의 땅 일본에서 치열하게 살아간다. 솔로몬은 그런 선자로부터 사랑을 받고 한민족 문화에 대해 교육받지만 한국과의 직접적인 삶의 접촉점은 거의 없다. 오히려 일본과 미국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려는 글로벌 시민을 지향한다. 하지만 선자는 물론 솔로몬도 일본과 미국 모두로부터 때로는 노골적으로, 또 때로는 미묘한 차별을 받는다. 서양과 동양, 일본과 조선, 미국과 일본의 대립적 삶의 조건에서 후자에 속하는 선자 가족은 숱한 차별을 딛고 어떻게 삶을 긍정하며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파친코>는 절름발이로부터 상징되는 피식민자 4세대의 연대기를 통해 인간존엄의 생존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는 서사극(epic)이다. <파친코>는 인물에 대해서나 서사적 세계에 감정이입하기보다 그런 상태에 처한 사람들을 이해하기를 원하는 콘텐츠이다. 이들 가족의 뿌리가 조선임에도 일본으로 미국으로 흩어져 살아갈 뿐 아니라, 이제는 조선이 오히려 낯선 것이 되어 버렸다는 탄식에서 디아스포라 가족의 정체성을 보게 된다. 선자에서 시작해 그녀의 아들 모자수, 손자 솔로몬으로 갈수록 조선사람보다 일본인 또는 미국인과 더 정서적으로 교류한다. 선자 또한 조선으로 돌아와 옛 사람을 찾는 기회를 맞지만 자신과의 인연은 매우 흐릿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이들 가족이 조선과 유일하게 연결되는 것은 쌀밥, 체취, 젓갈 같은 냄새이다. 

<파친코>에서 냄새는 그들의 정체성이지만 굴종의 상흔을 남기는 푼크툼(punctum)이다. 푼크툼은 영상 텍스트의 여러 장면, 즉 스투디움(studium)이라 불리는 관습적이고 일반적인 이미지 가운데 수용자에게 뜻밖의 어떤 감정을 활성화하는 것을 말한다. 이 용어를 조어한 바르트(Barthes, 1980/1998 35쪽)는 “그것 스스로가 마치 화살처럼 그 장면을 떠나, 나를 꿰뚫기 위해서 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푼크툼은 인물의 대사, 제스처, 눈빛 등 이야기를 구성하는 연속적인 시퀀스(sequence), 개별 장면(scene), 특정 숏 등에서 수용자로 하여금 감동을 넘은 격동, 전복, 충격 등의 의식과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일컫는다. 스투디움이 문화적으로나 관습적으로 이해되는 가운데 즐거움(plasisir)을 유발하는 평이한 약호라면, 푼크툼은 분노, 허무, 사랑, 슬픔 등 수용자의 어떤 감정을 찌르듯 돌파하는 일종의 쾌락(jouissance)이다. 1920-34년 동안 실시된 식민지 조선 내 ‘산미증식계획’은 일본의 부족한 식량을 채우는 대신 조선인들은 굶주리고 냄새나는 족속으로 만들었다.      



일제 강점기 피식민자 조선인들은 일본순사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부동자세를 취해야 했다


   

냄새와 함께 <파친코>에서 또 하나의 강렬한 푼크툼으로 일본순사 앞 고개숙인 피식민자들이 있다. 그가 일본순사라는 이유로 피식민자들은 일본순사가 지나가면 하던 생업을 멈추고 부동자세를 취한다. 불경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포승줄에 묶여 잡혀가는 선자네 집 하숙인의 건장한 신체와 그를 잡아가는 외소한 일본순사는 자연 그대로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풍경이기에 더욱 충격적이다. 이같은 장면은 피식민자들의 자존감이 얼마나 무너져 있는지를 단번에 보여준다. 내 땅에서 나지만 먹을 수 없는 쌀을 찾아 헤매는 선자 엄마나 일본순사에 부동자세를 취해야 하는 조선인의 모습은 강렬한 굴종의 푼크툼이다. 이같은 장면은 인간존엄의 생존법과 극적으로 배치되어 <파친코>가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가늠자 역할을 한다.      


2) <파친코> 일본순사의 새로운 이미지

<파친코>에서 우리는 일본순사에 대한 표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한국의 여러 서사물은 일본순사를 비열, 악독, 잔인, 무자비, 차별의 인물로 그려왔다. 이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다. 일제강점기 초기 1910년대는 무단통치기로서 ‘헌병경찰’이, 이후 1920년대 이른바 문화통치기에는 ‘보통경찰’이 있었다. 헌병경찰은 군인이 경찰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헌병경찰은 군복과 칼, 총을 패용하고 있으며 태형과 같이 조선인을 억압적으로 단속했다. 실제로 1912년 일제는 ‘조선태형령’을 만들어 치안유지를 명목으로 조선인을 물증이나 정식 재판없이 태형을 가했다. 이후 1920년대 보통경찰은 군복이 아닌 일반 경찰복을 입고 다소 완화된 치안행정을 보였지만 보통경찰 역시 여전히 칼을 차고 있었고 조선인들은 그런 일본순사에게 똑같이 고개를 숙여야 했다. 


<파친코>의 일본순사도 그간 TV 드라마나 영화처럼 강압적이고 비인간적이 지배자로 재현된다. 그들은 식민지 지배자의 위엄을 나타내는 깔끔한 제복, 단단한 걸음걸이, 피식민자로부터의 경배, 피식민자에 대한 계몽 등을 체현한다. 대다수 조선인들과 달리 위생적이고 말쑥한 옷맵시를 가진 그들은 (식민)국가의 국민들이 궁극적으로 닮아야 할 근대적 인간형처럼 보인다. 하지만 <파친코>에서는 전래의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목격되는 ‘비열한 일본순사’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가차없을지언정 비열한 웃음을 흘리는 인물로는 보이지 않는다. 


<파친코> 1화는 이를 잘 보여준다. 극 중 선자네는 시장에서 하루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숙을 치는데, 하숙집에서는 가끔씩 술판이 벌어진다. 그런 중에 하숙인 ‘아재’는 식민지 조선과 자신의 처지에 대해 한탄과 푸념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식민자를 비난하는 푸념은 일제가 엄격히 금지하는 것이었다. 어느날 일본순사는 불령선인이라는 이유로 하숙인 아재를 잡아들이며 선자 아버지를 취조한다. 언청이인 선자 아버지는 일본순사에 주눅이 든 채 하숙객의 그 어떤 불평불만도 계획도 알지 못했다고 다급히 말한다. 이에 일본순사는 “어디서 감히 말을 끊어!”라고 다그치지만, 곧 이어 “너무 밟으면 꿈틀거린다”고 자기네끼리 말하고는 “이번만 봐 주는줄 알아”라고 호의를 베푼다. 그리고 식민지 신민으로서 불평불만자는 당연히 신고해야 한다고 계몽하듯 말한다. 심지어 자리를 나서며 선자 엄마에게 “아줌마가 음식을 잘 한다며?”라고 호기심 어린 대화를 건넨다. 그에게는 작은 미소도 엿보인다. 그러고는 언젠가 멋을 보러 오겠다고 말한다.      


<파친코>에서 일본순사는 조선인을 겁박하기도 하지만 조선의 문화에 대해 호기심도 나타낸다

     

이같은 일본순사의 모습은 지금까지 한국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일찍이 없던 이미지이다. 심지어 한국음식을 조롱거리로만 삼았던 기존의 식민자 시각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장면이다. 이는 오랜세월 헐리우드 영화가 그렸던 ‘비열한 독일군’ 모습과 그 괘를 달리한다. 오랜 세월 헐리우드가 재현해 온 비열한 독일군은 그간 대한민국 영화와 TV 드라마가 그렸던 일본순사의 이미지와 똑같다. 그렇다면 왜 이런 차이가 생겨났을까?  

    

3) 미디어 자본과 리얼리티: 민족국가 자본 vs 플랫폼 자본

콘텐츠를 창작하는 미디어 자본의 성격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래 표는 2차세계 대전을 재현하는 1993년작 영화 <쉰들러리스트>와 식민지 조선을 재현하는 <파친코>를 비교한다. 유대인을 구하는 독일인 이야기인 영화 <쉰들러리스트>는 주로 유대인 학살을 보여준 여타 다른 헐리우드 영화와 달리 순화된 서사라는 점에서 <파친코>와 비교할 만 하다. <쉰들러리스트>는 애초에 로만 폴란스키 감독에게 연출이 의뢰되었으나 자신이 홀로코스트 가족이라는 점에서 객관적 연출이 불가능하다고 고사하여 역시 유대계인 스티븐 스필버그가 최종적으로 연출한 작품이다.              

                                     

민족국가 자본과 플랫폼 자본의 서사: <쉰들러리스트> vs <파친코>


<쉰들러리스트>와 <파친코>는 자본의 형태, 쓰기 주체, 서사 구조, 서사 목표, 극 형식, 극의 역할 등에서 대조적이다. <쉰들러리스트>는 유대인들의 민족성이 반영된 자본과 피해자들의 의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명확하게 이분화된 서사이다. 극중 오스카 쉰들러는 비록 독일인이지만 유대민족의 편에 서 있기 때문에 선한 사람이다. 실제로 그는 예수살렘에 묻힌 유일한 나치 당원이다. <쉰들러리스트>는 선과 악이 부딪히는 운명에서 어떤 일을 행하는 것이 옳은지 명확하게 알려주는 교훈주의 드라마이다. 이같은 특성은 역시 피해자인 대한민국에서 생산되어 온 그간의 일제 강점기 TV 드라마나 영화의 재현방식과 동일한다. 시청자는 악인과 구분되는 주인공에 감정이입하여 민족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재확인한다. 


그에 반해, <파친코>는 제3의 플랫폼 자본에 의해 생산된다. 선악구도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보다는 피식민자들의 생존투쟁에 보다 무게가 실려있다. 인간존엄의 생존법은 조국을 떠난 자이니치들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기 반영의 결과이다. 이는 인물과 사건에 감정이입하기를 기대하는 TV 드라마와 달리, 디아스포라 가족이 부딪히는 삶의 불가피성, 제국주의와 인종주의라는 시대와의 불화에서 삶이란 무엇인가 질문하는 서사극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물론 전세계 어느 누구도 이해할 수 있는, 심지어 가해자인 일본조차도 이해할 수 있는 일류 보편의 서사이다. 


이 점은 작가 이민진이 지난해 하버드 대학교 강연장에서 한 말과 일치한다. 그녀는 “우리가 역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면, 그때부터 한국과 일본이 화해를 고려해볼 수 있는 시기일 겁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파친코>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단순히 ‘일본이 나쁘다’는 민족주의적 발언이 아니라 ‘잘못된 역사를 잘못됐다 말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악이다’라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녀의 메시지는 한국 측의 지배적인 정서도, 일본 측의 지배적인 정서도 아닌 ‘인류보편의 정서’이다. 


결국, 비열한 독일군이 유대자본과 2차 세계대전 승전국 미국의 이상향과 대비되는 모습이라면, 비열한 일본순사는 후기 식민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상이다. 2차 대전을 그리는 헐리우드 TV 드라마와 영화, 일제강점기를 그리는 대한민국의 TV 드라마와 영화는 모두 민족국가라는 이념적 지향으로부터 태동한 이미지이다. <파친코>는 이와 비교된다. <파친코>에서 일본순사는, 일부 그런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지만, 그런 전형성으로부터 어느정도 떨어져있다. 기능적 행위자의 표상은 지금까지의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익히 없던 이미지이다. 서사 또한 마찬가지로 강력한 선악구도로 피아를 구분하기보다 피식민자와 그 후세들이 처한 시대를 이해하고 그들의 선택을 옹호하며 그들의 삶에 대해 성찰하도록 돕는다. <파친코>는 역사적 경험을 내재한 기존의 민족국가 미디어 서사와 달리, 플랫폼 자본의 OTT가 타민족의 역사를 어떻게 서사화하는지 하나의 전형을 보여준다.   

   

3. OTT 서사극의 리얼리티: 수용자 자원론     


우리는 이같은 관찰로부터 OTT 서사극의 리얼리티가 미디어 정치경제학적 테두리에서 발현됨을 지각하게 된다. 오랜 세월 미디어 정치경제학은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이 자본의 성격과 결부되어 있다고 통찰해 왔다(Mosco, 2009). 민족국가 안에서 벌어지는 텔레비전 비즈니스가 독자시장과 광고시장이라는 물적 토대에 의해 작동한다는 것이다. 수용자 상품론은 이를 설명하는 정전같은 이론이다(Smythe, 1981). 하지만 대중매체 시대가 저물고 OTT와 SNS 같은 인터넷 기반 양방향 서비스가 보편화되면서 수용자 상품론이 미처 다 설명하지 못하는 도전이 도래하고 있다. 수용자가 플랫폼 기업의 자원으로 새로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시청자의 미디어 이용은 노동(labor)이자 지대(rent)적 성격을 동시에 내포한다(김동원, 2015). 시청행위는 TV가 광고주와의 거래를 통해 수익활동을 펼칠 수 있게 하는 노동이다. 이는 마치 일반 기업이 노동자를 고용하여 생산물을 만드는 것과 같다. 하지만 시청자는 일반 노동자처럼 산업 생산물을 직접 만들지 않는다. 대신 시청자는 미디어가 만든 콘텐츠가 ‘상품성’을 가질 수 있게 한다. 미디어가 광고주와 거래할 수 있는 것은 시청자의 시청행위로 콘텐츠가 상품성을 띠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특별한 집합성이 궁극적으로 광고주가 판매하고자 하는 재화의 소비자를 뜻이기 때문이다. 


수용자 상품론을 제시한 스마이드는 미디어 제1의 생산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메시지, 정보, 의미 등은 효과(effect)로 치환해 인식하는 주관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개념일 뿐이라고 말한다. 스마이드에 의하면, 그것은 실제 삶의 과정과 유리된 피상적인 겉모습(superficial appearance)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삶을 구성하는 물적 토대로서 생산물이 무엇인가이다. 미디어 생산물이 물적 토대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미디어 효과는 실제로 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는 음식이나 옷, 자동차, 아파트 등과 같이 외면할 수 없는 물적 요소가 있고 미디어는 상품화된 그런 물적 요소를 판매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콘텐츠를 제공하기 때문에, 미디어 수용자가 하는 일에는 미디어 콘텐츠를 시청하는 것 외에 그런 광고주들의 상품을 구매하는 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디어 제1의 생산물은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개념으로서 수용자,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미디어 생산물을 경유하여 광고주에게 판매되는 계량화된 수용자의 양이다. 


수용자 상품론은 광고주에게 팔리는 수용자 (크기)에 상응하여 콘텐츠가 생산된다는 점을 지시한다. 겉으로 보면 미디어가 수용자에게 콘텐츠를 판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 전체의 삶의 과정에서 보면 콘텐츠 제작에 비용을 들인 광고주에게 수용자를 판매하는 것이다. 이는 미디어 콘텐츠가 미디어 기업과 광고주의 비즈니스가 일어나는 민족국가의 규범에 충실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둘 다 해당 사회의 제도화된 집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성 TV 드라마는 동일한 역사와 생활세계를 공유하는 구성원들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서사이다. 수용자 상품론은 미디어 거래에서 수용자가 상품처럼 취급된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수용자가 향유하는 콘텐츠가 생산될 수 있는 물적 토대는 물론 창작의 방법론과 결과물의 상태까지 제한한다. 


하지만 수용자 상품론을 OTT 환경에까지 확대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OTT에서 이용자는 월 단위로 비용을 지불하여 시청활동을 영위하고, 부가적으로 그런 활동과 결부된 갖가지 데이터 제공한다. 다시 말해, OTT 이용자는 OTT 사업자에게 매월 구독료를 지급함은 물론 시청행위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데이터, 가령 어떤 종류의 콘텐츠를 선택했는지, 얼마나 집중적으로 또는 산발적으로 시청했는지, 어느 시간대에 어떤 디바이스로 시청했는지 등과 같은 데이터를 제공한다. OTT 사업자에게 구독료는 콘텐츠 제작과 플랫폼 운영을 위한 재원이고, 데이터는 개인의 미학적 취향에 최적의 솔루션을 제공하기 위한 자료이다. 이는 한편으로 개개인의 미학적 취향에 최적화된 추천과 만족으로 보상받는 지대이다. 토지 사용에 대해 지불하는 지대의 원래 뜻을 상기해 보면, OTT에 지불하는 구독자의 월 구독료와 데이터는 해당 미디어를 언제든 이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이용자 지위에 대한 임대료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를 수용자 자원론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 하지만 수용자 자원은 자기자본이나 혁신기술처럼 미디어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수용자 자원은 미디어가 채널-미디어에서 플랫폼-미디어로 전환하는 가운데 플랫폼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의해 주어진 외부효과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매달 창출되는 현금흐름과 매일매일의 데이터이다. 이 두 자원은 OTT 내부의 절대지대, 즉 콘텐츠 혁신과 추천기술 혁신과 조응하여 OTT라는 기차가 계속해서 달릴 수 있게 한다. 일차적으로, 구독자가 직접 지급하는 현금은 콘텐츠라는 절대지대와 거래한 보상이다. 그 보상은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재생산되어야 한다. 이에 OTT는 이용자와 콘텐츠가 얼마나 원활하게 거래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NQT(Netflix Quantum Theory, 넷플릭스 추천 알고리즘)와 같은 기술혁신을 추구한다. 데이터는 그런 기술을 작동시키는 자원이다. 내부의 절대지대로서 콘텐츠가 외적 자원인 현금에 대응한다면, 추천기술은 데이터와 대응하는 셈이다. 


OTT 플랫폼이 콘텐츠와 기술 혁신을 외적 자원과 결합시키는 이같은 구조로부터 우리는 인간의 지식과 정서, 감정의 결과물을 생산하고 소비케 하는 인지 자본주의(cognitive capitalism)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조정환, 2011). 인지 자본주의 체제에서 플랫폼-미디어 참가자들은 제공되는 콘텐츠로부터 얻는 만족 외에 플랫폼 활동에 기여하는 데이터 정동 노동에 대한 별도의 보상을 주장하지 못한다(Terranova, 2000). 인간의 사회적 상호작용이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거대한 ‘사회적 공장’에서 하나의 일(work)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가 되지 못하게 되었다. 디지털 전환 이후 정신과 감정은 그것을 연산하는 OTT나 SNS 같은 자동화된 기술 안으로 모든 것이 포섭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볼 때, OTT 서사극은 민족국가의 서사가 아닌 트랜스내셔널 ‘제국’(empire)의 서사이다. OTT는 민족국가 단위에서 수행해 오던 텔레비전 방송이 탈영토화하여 전지구적 지배를 구조화하는 제국의 전형적인 사례이다(Negri & Hardt, 2000/2001). 넷플릭스 같은 OTT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번성했던 경직된 제국주의 시대와 달리, 유연하고 합리적인 21세기 제국, 국민이나 시민이 아닌 다중의 취향 공동체의 플랫폼-제국이다. 여기에서는 누구라도 특별한 미학적 취향의 어떤 계열로서 포섭된다. 그렇기 때문에 OTT 서사물, 특별히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서사물은 국민국가의 역사적 기억과 무관하게, 즉 국적과 인종, 그리고 역사적 맥락에 따라 제작된 기존 TV 드라마와 달리, 보편적인 관심이나 취향을 겨냥하여 제작된다. <파친코>도 그런 경향 위에서 제작된 것이다.     


4. 결론: 착한 일본순사는 존재하는가?      


<파친코>가 수용자 자원을 토대로 탄생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파친코>가 글로벌 시청자의 문화적 보편성을 지향하는 콘텐츠라는 점을 의미한다. 그간 TV 드라마는 해당 국가의 지배적 관념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2021년 3월 SBS에서 방송된 <조선구마사>는 역사왜곡 논란에 따른 광고주와 지자체의 압력으로 방송 2회만에 폐지되었다. 김치와 한복에 대한 중국의 ‘문화공정’(文化工程)의 여파가 여전한 가운데 중국풍의 조선시대가 시청자에게 수용되지 못했고, 결국 광고와 지자체 촬영 지원 중지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비슷한 시기에 방송된 JTBC의 <설강화>는 민주화 운동을 왜곡했다는 비난이 있는가 하면, 거꾸로 남파간첩과 안기부를 미화했다는 논란도 불거졌다.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 3일간 연속편성했지만 한 번 외면된 드라마는 시청률을 회복하지 못했다. 광고주와의 마찰과 협찬 취소도 잇달았다. 그럼에도 <설강화>는 <조선구마사>와 달리 방송이 도중에 하차하지는 않았다.


이 두 드라마는 TV 드라마의 국가성과 민족성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TV 드라마는 ‘정서적 리얼리즘’이 함의하는 “현실에 대한 지배적인 감각”(dominant sense of reality)을 생산한다(Fiske, 1987, p.21). 여기에서 지배적인 감각은 단순히 의복이나 말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특정 시대를 바라보는 드라마의 시각이 국민국가의 보편적인 가치이가의 문제이다. 미디어와 광고주, 수용자는 보편적인 가치로 상호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선구마사>가 의복과 음식에 관한 문제인 것처럼 보임에도 도중하차하고 <설강화>가 사실을 왜곡한 것처럼 보임에도 계속 방송할 수 있었던 것은, 전자와 달리 후자의 서사를 관통하는 가치가 적어도 국민국가 구성원에게 용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OTT 서사극은 ‘현실에 대한 지배적인 미학’(dominant aesthetic of reality)의 생산한다(임종수, 2023). 지배적인 미학은 텔레비전의 지배적 감각이 초래하는 그 사회의 대표적이고 평균적인 문화가 아닌, 각기 다르게 콘텐츠를 소비하는 가운데 어떤 특정한 콘텐츠가 개연성 있고 아름답다고 여기는 정서적 경험을 말한다. 다시 말해, 개인마다 당대의 삶을 이해하는데 기여하는 보다 재미있으면서, 보다 설득력 있고, 보다 완성도 높은 것을 말한다. 따라서 OTT 서사극은 누군가에게는 더 없이 즐겁고 아름다운데 반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루하고 어설프기 그지 없을 수도 있다. OTT는 국민국가 구성원이 내면화하는 가치와 무척 낯선 것들을 만들어낼지 모른다. 


현실에 대한 지배적인 미학을 문화의 지형으로 치환하면 OTT가 창출하는 문화는 민족과 국가, 지역, 인종, 성 등으로 구분되지 않는 보편문화(cultural universal)이다. 보편문화는 인간문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요소나 패턴, 특성 또는 제도를 일컫는다. 기성의 대중문화가 민족국가 내 지배적인 감각으로 대표되는 공통문화(common culture)였다면, 이 시대의 대중문화는 인간으로서 누구나 공감하는 보편문화이다. 하지만 그런 보편문화 또한 엄밀히 말하면 서구적 이상에 부합하는 문화적 보편성일 확률이 크다. 그렇다 보니 보편문화는 민족국가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롭고 긍정적인 것일 수도 있고, 민족국가의 금기를 건드리는 위험천만한 것일 수도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엄브렐러아카데미>에서 욱일기는 일본 우익의 상징도 오염된 제국주의의 기호도 아닌 2차 세계대전 시기를 상징하는 기호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한민국의 금기를 건드린다. 욱일기는 하켄크로이츠와 동급임에도 서구 플랫폼의 시각에서 보기 때문에 중립적인 것처럼 표상된다. 


이는 마치 <파친코>에서 계몽하는 일본순사, 타자의 문화에 호기심을 드러내는 일본순사를 보는 것과 같다. 일제 강점기 어느 ‘착한 일본순사’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한민국 TV 드라마가 재현하는 서사물에는 아직까지 착한 일본순사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착한 나치’가 없는 것과 같다. 오스카 쉰들러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표현능력을 갖춘 국민국가가 용인할 때만  예외적이다. OTT는 어느날 갑자기 이같은 법칙을 무시하고 타자들의 역사 한 가운데로 불쑥 뛰어들었다. OTT가 그럴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수용자로부터 제공되는 글로벌 재원과 데이터가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수용자들의 정동의 에너지를 비즈니스의 밑천으로 삼는 21세기 미디어가 재현의 기회를 열지 위기를 열지 지켜볼 일이다.           



참고문헌

김동원 (2015). 이용자를 통한 미디어 자본의 가치 창출, <언론정보학보> 통권 70호, 165-188.

조정환 (2011). <인지자본주의>, 갈무리.

Hardt, M. & Negri, A. (2000). Empire,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윤수종 역 (2001). <제국>, 이학사.

Mosco, V. (2009). Political economy of communication, 2nd edition, London: Sage.

Smythe, D. (1981). On the audience commodity and its work, In Dependency Road: Communications, Capitalism, Consciousness, and Canada(pp. 22–51), Norwood, NJ: Ablex.

Terranova, T. (2000). Free Labor: producing culture for the digital economy, Social Text 63 Available at https://web.mit.edu/schock/www/docs/18.2terranova.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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