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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SL Dec 18. 2023

포털 뉴스의 책임성 실현을 위하여

‘포털 콘텐츠(뉴스/검색) 평가협의회’(가칭)를 제안

정치의 포털 길들이기

지난 4반세기 대한민국 저널리즘의 역사는 포털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울어진 언론 지형에도 불구하고, 욕심많은 일차규정자들(primary definers)은 포털 장악에 대한 유혹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들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겠지만 사실 효과가 있었다는 그 어떤 증거도 없다. 오히려 국민경제를 좀 먹고, 국권을 쇠잔하게 하는 무지와 무책임의 소치였다.


저 멀리 2008년 “네이버 평정”에서부터 국정감사장에서 포털 대표에게 개인정보 제공 여부를 공개적으로 질의한 것, 그리고 최근 알고리즘 공개 요구까지 정상적인 국가의 정상적인 위정자라면 해서는 않되는 소행을 계속해 왔다. 생각해 보면, 공개된 장소에서 위정자가 개인정보 제공 여부를 언급하는 것은 참으로 어이없다. 만약 “예”라고 대답하플랫폼 사업자가 민감한 개인정보를 권력기관에 넘기는 꼴이 되고, “아니오”라고 답하면 국가이익을 외면하는 일이 되니 말이다. 플랫폼 경제가 작동하는 어느 나라에서도 플랫폼에 공개적으로 그같은 요구를 하지 않는다. 알고리즘을 공개하라는 요구 역시 마찬가지이다.      


뉴스를 대하는 포털의 태도

그렇다고 포털이 뉴스 제공에서나 개인정보 보호에 진심이었냐라고 하면 그것은 결코 아니다. 지금의 포털 뉴스 논쟁은 포털이 자초한 일이다. 뉴스라는 공공재를 포털 성장을 위한 ‘미끼 상품’으로 삼은 결과 뉴스는 물론 포털의 독립성과 공공성, 민주성은 오간데 없게 되었고, 그런 조건에서 개인정보 역시 쉽사리 이곳저곳에 팔릴 운명이었다. 최근 다음이 제휴 매체 외 매체의 뉴스노출 중지를 선언한 것은 그 연장선 상에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뉴스를 존재하지 않게 만드는 포털은 신의 경지인가? 이는 ‘상호접속’과 ‘차별금지’라는 인터넷 기본정신을 망각한 폭거이다. 지난 25년간 유지해 온 ‘플랫폼 이용자 유입’과 ‘책임전가’라는 이율배반의 포털 뉴스정책이 빚어내는 또 하나의 촌극이다.


포털은 뉴스를 존재하게도 존재하지 않게도 하는 위대한 신인가?


20세기 후반 다음과 네이버 포털이 출범한 이래 2000년 네이버 뉴스 인링크 서비스 시작, 2001년 네이버 메인 페이지에 뉴스 서비스, 2002년 다음의 ‘미디어 다음’ 선언 등 새로운 세기 초반 포털은 뉴스 서비스에 많은 공을 들였다. 뉴스가 로컬 플랫폼의 주목경제(attention economy) 또는 정주경제(domiciliation economy)에 지대하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만큼 기존 신문사와 방송국의 온라인 서비스가 위축되었고, 급기야 포털에 대한 전방위적 공격이 이어졌다. 그 핵심은 뉴스를 직접 생산하지 않는 포털이 뉴스를 제공하는 것의 성격 논쟁, 그러니까 ‘포털의 언론 여부’ 논쟁이었다. 그 결과 포털은(특히 네이버는) 자신이 언론이 아니라 여러 콘텐츠 중 하나로서 뉴스를 제공할 뿐인 콘텐츠 사업자임을 분명히 했다.


그같은 전략은 대충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포털의 뉴스 서비스를 인위적으로 막지 못하는 기술혁신의 바람 위에서 포털 스스로가 자처하여 ‘감히’ 언론이 아님을 선언하는 것만으로 기성 언론사와 정치권이 수용할 만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는 어이없는 논쟁이었다. 재매개도 매개이기 때문이다. 포털이 언론인지 아닌지와 무관하게 포털은 뉴스를 (재)매개하는 커뮤니케이션 기관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포털이 언론 딱지를 떼어냄으로써 기성 언론과 정치는 언제든 포털을 손 볼 수 있었고, 포털은 그런 외부 압력에 떡 떼어 주듯 선심성 정책을 내놓으면 그만이었다. 포털이 뉴스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방안을 낼 때마다 뉴스를 제공하는 중소 언론사는 생사를 넘나드는 몸살을 앓아야 했다.


‘비언론’ 포털이 뉴스를 버릴 결심

이로써 포털은 자신의 뉴스 서비스가 ‘비언론’ 행위임을 증명하기 위한 온갖 방식을 가져다 썼다. 2006년 아웃링크 시작, 2009년 뉴스 캐스트(언론사의 뉴스 박스 편집), 2013년 뉴스 스탠드(언론사 아이콘 선택 후 이용)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책임지지 않는 포털과 제휴 언론사의 노골화된 어뷰징이었다. ‘저질’의 포털 뉴스 담론이 이 시기에 폭발적으로 늘어나 오늘에까지 이른다. 전세계적으로 저널리즘이 이렇게 저질화된 데에는 포털의 책임이 가장 크다.


2015년 출범한 ‘뉴스제휴평가위원회’는 포털의 뉴스 책임성을 제도적으로 외주화한 것이었다. 포털에게 있어 뉴스는 수익과 영향력의 원천이지만 사회적 책임은 지기 싫은 상품이었다. 때마침 네이버는 쇼핑에서, 카카오는 SNS에서 새로운 BM을 찾았고, 그런 만큼 뉴스에 대한 집착도 한결 늦춰졌다. 네이버가 PC와 모바일 모두의 메인화면 중간에서 제공했던 뉴스 모듈을 삭제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렇다고 포털이 뉴스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뉴스는 여전히 그들의 BM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콘텐츠 형식이다.


포털이 뉴스와 결별하지 못하는 이유는 혁신이 기업생존의 핵심 조건인 플랫폼 기업의 미래 혁신안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코로나19의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플랫폼 효능감이 최고조에 달했지만 곧바로 거품이 빠져버렸다. 챗GPT라는 생성 AI 국면에서 네이버와 카카오는 로컬 플랫폼으로서 차별성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포털은 여전히 언론과 정치권의 요구에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위기를 넘기고 있다. 거의 해마다 포털 최고 경영자가 국회에 소환되고, 때로는 구속의 위협도 지만 말이다. 비록 지금의 포털이 억울한 면이 없지 않지만, 뉴스를 통한 이용자 유입으로 수익은 챙기되 책임은 전가해온 그간의 전력이 크게 한 몫 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포털 대주주를 탄압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국민과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현실과 괴리된 뉴스, 여전한 저질(선정적) 뉴스의 발호, 이해하기 힘든 알고리즘 등은 뉴스 소비자와 국가를 병들게 한다. 뉴스 소비의 일차 시장 포털에 대한 습관화된 뉴스 소비행태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뉴스 소비자가 포털의 정주경제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스스로 그것을 바꾸어야 한다.      


설명책임으로서 ‘포털 콘텐츠 평가협의회’(가칭) 제안

포털이 정치 바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유일한 방법은 포털 스스로 뉴스에 대한 설명책임(accountability)을 다 하는 것이다. 뉴스 서비스에 있어 설명책임이란 왜 그같은 뉴스 서비스가 제공되는지를 사회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포털 뉴스를 그에 합당한 주인인 수용자에게 돌려주는 이다. 왜냐하면 포털 플랫폼의 수익의 원천은 이용자의 이용 트래픽과 이용 데이터이기 때문이다. 뉴스제휴평가위원회도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포털이 비용을 대면서도 직접적으로 이해관계가 있는 단체를 평가위원으로 위촉하는 구조에서 포털을 견제하는 것은 애초에 힘든 일이었다. 평가위원은 자신이 대표하는 언론사의 이익을 위해 활동할 뿐이고, 포털은 그것을 독립기관화하여 마치 해야할 일을 다한 듯 생색냈다.


문제는 설명책임의 ‘독립성’과 ‘전문성’이다. 이를 위해 유관 학계와 자발적인 시민들이(시민단체가 아니라) 참여하여 연간 2~4회 포털의 뉴스 및 검색 서비스의 경향을 연구, 참조, 모니터링하는 ‘포털 콘텐츠(뉴스/검색) 평가협의회’(가칭)가 필요하다. 협의회는 뉴스와 검색 서비스를 모니터링할 수 있는 연구(research)와 사회적 설명의 장으로서 회합(conference)을 조직할 수 있을 것이다. 조직의 성격 면에서 위원회라 해도 무방하겠지만, 예민한 이슈가 있을 때마다 임기응변으로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위원회 천국이라 협의회가 더 좋아 보인다. 현실을 모르고 내뱉는 규범적인 주장이 아니다. 플랫폼이 금과옥조로 여기지만 결코 티내지 않는 바로 그것, 뉴스와 검색에 투여되는 이용자들의 자유노동(free labor)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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