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문명에 대한 서구적 영향 때문이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가 1, 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시작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당시 과학자들은 육체의 힘을 획기적으로 확장시킨 것처럼 정신의 힘도 그럴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2차 대전 시기 미국 과학연구개발국을 이끈 버나바 부시(Bush, 1945)는 인류 지식의 기계적 저장고를 기획했다. 그 저장고는 책이나 그림의 연속된 정보와 달리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우리의 뇌가 “생각하는대로”(as we may think) 작동하는 것이었다. 이런 구상은 기계의 작동을 “마음상태”(state of mind)로 보았던 앨런 튜링(Turing, 1936)의 천재적 발상에 크게 빚진 것이었다. 부시의 이런 생각은 정보전달의 기술적 문제를 수학적으로 해명하고자 했던 클라우드 썌넌(Shannon, 1948), 그런 정보전달을 의미론적으로나 효과 측면으로 확장했던 워렌 위버(Weaver, 1949), 모든 사물의 작동원리를 사이버네틱스로 치환했던 로버트 위너(Wiener, 1948)에게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그같은 비전은 인간의 사고방식을 기계적으로 구현하려는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으로 현실화된다. 그것은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읽어내는 기술, 정확하게 말하면 정동의 컴퓨팅(affective computing)이다(Picard, 1997). 정동의 컴퓨팅은 컴퓨터가 사물을 구분함은 물론 인간의 활동(표정, 선택, 주장 등)을 읽어들여 그 상황에 최적화된 상호작용을 하는 것을 말한다. 지금의 SNS와 OTT는 정동의 컴퓨팅이 미디어로 현실화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미디어는 1930~40년대 컴퓨터학을 탄생시킨 선구적 시도, 이후 두 차례의 암흑기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 기술을 꾸준히 발전시켜 온 컴퓨터 공학과 인지과학의 성과, 그 위에 쌓아올린 미디어와 콘텐츠의 양식의 진화와 소비문화가 한데 어우러진 ‘플랫폼-미디어’이다. 이는 과거 대중매체의 ‘채널-미디어’와 분명히 구분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의 미디어를 이해하려면 먼저 인공지능이 어떻게 플랫폼의 미디어로 자리매김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정동의 컴퓨팅은 인간의 생각(마음)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기술적으로 구현하려는 튜링의 마음상태와 정확하게 연결된다. 인공지능의 역사 초기에 가장 자주 언급되는 것이 튜링 검사(Turing test)이다. 튜링 검사는 만약 컴퓨터가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넘어 판단과 행동 면에서 인간과 똑같은 양상을 보인다면, 우리는 “컴퓨터가 생각한다”라는 것을 수용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Turing, 1950). 조작주의(operationalist)라 불리는 이같은 태도는 ‘강인공지능’과 ‘약인공지능’ 논쟁을 거치면서 오늘날 최첨단 AI 개발에 이르고 있다. 이는 당시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수학의 성과에 힘입어 1900년 파리 국제수학회에서 독일의 저명한 수학자 힐베르트(D. Hilbert)가 제기한 문제(Entscheidungproblem), 즉 ‘모든 수학 문제를 풀 수 있는 일반적 방법’에 대한 튜링의 해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튜링은 그것이 우리가 아는 어떤 수학 공식이 아니라 어떤 수학 문제도 하나씩 하나씩 풀 수 있는 ‘기계적 프로그램’을 통해 답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기계적 프로그램은 당시의 수학적 범주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상상 밖의 개념이었다; “이 문제(힐베르트의 문제 – 저자 주)를 대답하는데 어려운 점 중의 하나는 도대체 기계적 프로그램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것일 것이다. 그 개념은 당시 일반적인 수학적 개념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 개념을 수식화하기 위하여 튜링은 기계 동작을 기본적인 식으로 나누어 정형화함으로써 ‘기계’라는 개념이 어떻게 수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가를 보이려 하였다. 튜링은 인간의 두뇌도 하나의 ‘기계’로 간주하였다. 그러므로 수학문제를 푸는 수학자의 행동이 무엇이건 그것이 ‘기계적 프로그램’으로 표시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Penrose, 1989/1996, 72쪽). 이렇게 창안된 기계적 프로그램이 바로 튜링기계(튜링은 A기계라 불렀음)이다. 유한한 계산과정을 수행하도록 프로그램화된 장치, 오늘날 추상기계 또는 추상수학의 범주를 도출시킨 유한상태기계(finite state machine)가 탄생한 것이다. 이 기계는 훗날 프로그램 요소라 부르는 변수, 루프, 조건, 입/출력, 서브루틴과 함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날 컴퓨터의 시작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해하는 듯하고 심지어 소통의 기능까지 수행하지만, 사실은 수학적으로 정답이 아니라 ‘모범답안’으로 그런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알고리즘 구조가 완벽하지 못해서일 수 있다. 또는 문제 자체가 너무 복잡하거나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과학 분야에서는 이를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Gödel's incompleteness theorems)라고 부른다. 앞서 힐베르트가 요청한 만능공식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모순적이고 결정불가능하며 심지어 주관적이기까지 하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 위에서 구축된다. 튜링의 기계적 프로그램은 바로 이 점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기계의 계산가능성(computability)과 결정가능성(decidability)이 인간과 소통할 수 있는 장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지금의 플랫폼-미디어는 초기의 튜링기계, 이후 컴퓨터의 발전, 그 사이에 비약적으로 발전한 인공지능 기술이 계산가능성과 결정가능성의 정교화를 통해 인간과 커뮤니케이션하는 기계이다(Chesebro, 1993). 계산가능성은 인간의 두뇌가 일을 하는 것처럼, 기계가 어떤 주어진 문제에 대해 연산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17세기 무렵에 탄생한 ‘생각하는 인간’에 대한 신념과 확신이 무너지는 역사적 철학적 전환이다. 인공지능 기술은 ‘생각하는 기계’, ‘생각하는 미디어’의 존재를 탄생시켰다. 결정가능성은 인공지능이 유한한 연산으로 최적의 결과를 도출할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때 결정가능성은 모범답안을 도출했다는 점을 넘어 인간과 소통하는 인터페이스의 구축을 포함한다. 주지하듯이, 현대 인공지능의 디자인(Russell & Norvig, 1995)이 주어진 데이터를 합리적으로 연산할 수 있다는 합리성의 모델과 그런 연산이 인간과 소통하기 위한 유사 인간(human-like) 모델을 합성한 것이다.
계산가능하고 결정가능한 플랫폼-미디어는 모두 인간의 사고를 닮은 비선형성을 특징으로 한다. 미디어에 있어 비선형성은 인간의 삶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연속적인 현실 정보를 연산하여 각기 다른 결과값으로 표출되는 것을 말한다. 플랫폼-미디어는 연산가능한 수많은 콘텐츠를 데이터베이스화해 있다가 수용자 저마다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특정 콘텐츠를 드러낸다. 이것은 선형적인 전래의 신문과 방송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전통적으로 신문과 방송은 연속적인 현실세계의 사건이나 서사를 연속적인 미디어 형식으로 출력했다. 특별히 텔레비전은 현실의 시간과 똑같이 흘러가는 채널의 시간 위에 연속적인 현실의 어떤 측면을 재현하고자 했다. 미디어와 그 시대의 수용자는 합의된 어느 한 방향을 향해 가고 있다는 강고한 믿음이 있었다.
OTT에서는 이같은 느낌이 사뭇 느슨해진다. 뉴스 소비는 이념의 지형과 관심에 따라 현격히 다른 경로를 걷게 되었고, 부모자식이 함께 소비했던 드라마와 예능 또한 여러 칸막이로 나뉘어진다. 이제 단란한 가족 TV 풍경은 낯선 과거가 되어 버렸다. 오늘날의 미디어는 현실세계의 사건과 서사를 취급하지만 더 이상 현실의 시공간과 동기화된 채 작동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두뇌 속 생각처럼, OTT는 잠재적인 가능성의 콘텐츠들을 저장한 채 수용자 저마다 각기 다른 취향과 관심에 따라 제각각 소비될 뿐이다. 그러면서 어떤 공통적이거나 보편적인 지대를 형성해간다. 헨리 젠킨스(Jenkins, 2006)가 말한 것처럼, 이 시대는 콘텐츠의 자유로운 흐름, 미디어와 미디어간의 협력, 원하는 콘텐츠를 찾아가는 수용자의 적극적인 이주성 행동이 만들어내는 ‘참여문화’가 개화해 있다. 이 시대의 대중문화는 현실의 시공간을 지배하는 대량의 문화가 아니라 개개인의 문화소비 과정에서 공통적이거나 보편적인 관심과 문화가 ‘창발’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