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Burning(2018) 리뷰

증오, 냉소, 무의미의 바다에서

by krov
무엇을 좇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삶에는 무수히 많은 질문이 있다. 사실상 '이해가 안 간다'라는 말은 조금 비틀면 질문이다. '저거 왜 저렇게 되는 거지?' '쟤는 왜 저래?' 낯익고 낯설고의 문제가 아니다. 의식을 갖고 둘러보면 이런 질문을 던질 것은 하루에도 수십수백 개씩 찾을 수 있다. 질문은 차고 넘친다. 다만 대개의 문제는 답이 없다. 오늘 해는 몇 시에 떴는지 같은 문제들은 아무래도 좋을 일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왜 존재하는가, 어디서 의미를 찾아야 하는가, 이런 것들일 텐데, 이런 질문에 대해서 세상은 묵묵부답이다.


영화 <버닝>의 종수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인물이다. 그에게 세상은 수수께끼이다. 부모, 혜미, 벤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부터 자기 인생까지 도통 이해가 안 가는 것들은 도처에 깔려있다. 수도 없이 이에 대해 질문하지만 세상은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멈춰있다. 알바도 하고, 집 정리도 하고, 아버지 재판도 보러 가는 등 바쁘게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작가가 꿈이라는 인간이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면 우두커니 제자리에서 서있는 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나는 혜미는 어떨까? 자신의 외모와 과거 컴플렉스가 진하게 드러나는 그녀는 미래를 담보로 자신의 과거를 청산하고자 하지만 이런 거래가 성립될 리가 없다. 그녀의 이런 시도(성형, 여행)는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종수가 수수께끼를 풀기를 포기한 채로 정지돼있던 인간이라면 그녀는 수수께끼 앞에 좌절한 인간이다. 자신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방법이 무위로 돌아갔음을 깨달은 그때, 그녀는 그저 하늘거리며 춤을 춘다. 석양 앞에서 흔들거리는 그 모습은 타들어가는 지푸라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마침내, 무의미의 바다에서 한없이 표류하던 그녀는 벤이라는 무풍지대에서 실종된다.


벤은 권태롭다. 가진 게 너무 많기에 냉소와 무관심 말고는 도통 감정이랄만 한 것을 느끼지 못한다. 느끼는 것이 없으니 표현 방식도 냉소와 무관심에 한정된다. 일견 여유 넘쳐 보이는 그의 태도는 그저 웃지도, 분노하지도 못하는 식물인간에 다를 바 없다. 감정적 나병환자라고 하면 적당하지 않을까? 혜미의 서글픈 몸짓을 보며 내뱉는 하품은 그에게 있어 절규에 가깝다. 그렇기에 그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저주를 풀고자 한다. <케빈에 대하여>의 케빈, <아메리칸 사이코>의 패트릭 베이트만과 같다. 자신의 실존 자체가 위협받는다고 판단하고 도덕, 법 따위는 가볍게 뛰어넘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인물들. 케빈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패트릭이 몰개성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벤은 권태이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명백한 사회의 악으로 거듭나지만, 이는 정도의 차이일 뿐 그들에게는 사소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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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오면, 문제는 수수께끼, 즉 '이해할 수 없음'이다. 종수에게 있어 벤은 그저 의문스럽다. 그의 물질적 풍요(개츠비!)는 물론이고, 그가 무엇을 느끼는지조차 종수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관객 역시 벤이 알쏭달쏭하지만, 보통 이 의문은 빠르게 증오('배부른 소리 하고 자빠졌네', '사이코패스네' 등)라는 답에 도달한다. 종수의 의문은 이보다는 오래 지속되지만, 종수의 집에서 모두가 만나는 장면 이후로 그의 의문도 결국 증오와 분노로 바뀐다. 여기에서 혜미와 벤에 대한 오만 감정이 묻어 나오지만, 결국 종수의 결론은 경멸이다. 평등하지 않은 관계에서 시작된 몰이해가 증오로 얼룩지는 것은 흔한 일이지 않은가.


혜미와 벤의 관계 역시 종수와 벤의 그것과 큰 차이는 없다. 혜미의 '의미' 이든 종수의 수수께끼든, 벤에게는 그저 무의미하다. 결국 똑같은 비닐하우스, 권태의 해소 수단에 다름 아니니까. 이 셋은 결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관계가 오래 지속될 턱이 없고, 그 끝은 단절 아니면 파국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면에서 혜미의 실종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일반적인 스릴러나 드라마 영화였다면 그녀의 실종이 전개의 실마리가 될 것이지만, <버닝>은 그렇지 않다. 히로인은 사라졌지만 이 영화에는 히어로가 없다. 종수의 꿈인 작가라는 직업에서 드러나듯 그는 한없이 관찰자에 가깝다. 그저 지켜보고 기록, 끽해야 각색이나 할 뿐, 사건 내에서는 그저 무력하기 그지없다. 그렇게 종수는 몰이해 속에서 방황한다.



영화는 벤의 문제 해결은 어느 정도 명백하게 제시한다. 소위 혜미와 종수를 충분히 갖고 놀고, 태운 것이다. 그가 혜미를 살해했는지는 그리 중요치 않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도 유희의 일환일 뿐이고, 아니라면 그의 유희에 살인까지는 포함되지 않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종수의 갈등 해소는 무척이나 불투명하다. 종수의 세상에 대한 무력감, 증오, 분노는 그저 허공을 맴돌다가 막바지에 이르러 총체적으로 해소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영화의 중반부 이후는 현실인지 종수의 소설 속인지 거의 분간이 가지 않을뿐더러, 결말이 현실이라 한들 영화는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다. 벤 따위의 죽음으로 종수의 수수께끼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종수는 번데기가 탈태하듯 옷을 벗어던지고 나체로 살인 현장을 뒤로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새로운 세상을 맞는 나비가 온당 느껴야 할 기쁨은커녕 혼란만이 가득하다. 수수께끼는 그대로 남아있고, 막연한 증오는 여전히 허공을 맴돈다. 벤은 죽었으나(혹은 죽지 않았거나) 그가 보여준 냉소와 무관심은 아무런 확답도 없이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종수와 관객들을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잘 만들어진 작품은 예술가의 손을 떠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다고 생각한다. 예술가의 의도나 주제 의식 외에도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작품들은 이를 취하는 이들로 하여금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버닝>의 경우는 아예 감독의 의도 자체가 '니들이 알아서 생각해봐라' 인걸로 안다. 어쭙잖은 솜씨였다면 이런 시도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기 십상이지만, 감독이 감독이라 그런지 작품 자체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


다만, 그 의도가 영화라는 매체의 한계를 넘어선 수준이 아닌가 싶다. 소설의 경우는 어지간히 어렵지 않은 이상(포크너라든가..) 텍스트 하나하나를 뜯어 분석하는 것이 용이하다. 이해가 안 되는 문장, 구절은 그 즉시 다시 읽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것이 쉽지 않다. 극장에서는 당연히 리플레이가 불가능하고, 블루레이나 스트리밍을 이용해 보는 경우에나 그것이 가능하다. 이런 면에서 <버닝>은 명백히 완급 조절에 실패했다. 첫 관람에 이 영화에 대해 어떤 명확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 가능할까? 나의 경우는 적나라한 시선으로 바라본 젊은 세대에 대한 조롱으로밖에는 읽히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나마 이 정도 해석을 끌어낸 것도 시간이 꽤 흐른 뒤에 두 번째 관람을 가진 뒤에야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는 생각은, 그 모호함이 너무 심한 탓에 보는 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오류를 범할 여지가 너무 큰 작품이라는 점이었다. 이조차도 감독의 의도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