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맨 Birdman(2014) 리뷰

불협화음도 화음이다

by krov
"A thing is a thing, not what is said of that thing."



누구나 비상을 꿈꾸기 마련이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어떤 이상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이상은 으레 현실 앞에 주저앉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은 반항하기를 선택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을 이런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반항한 좋은 예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현실 앞에 수도 없이 좌절했음에도 지하로 내려가서라도 자신의 반항을 포기하지 않는 지하 생활자나, 부조리한 현실에 냉소하지만 누구보다도 이상향을 소원하는 이반 카라마조프가 그러하다. 그들은 반항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외적, 사회적 모습은 물론이고 때로는 내면까지도 기괴하게 일그러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혹은 그렇기에?) 그들은 아름답고 낭만적이다. 그러한 반항에는 분명 인간이 지향하는 어떤 삶의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이 더 삭막해진 것인지 아니면 원래 이랬던 것인지 몰라도, 버드맨의 감독을 포함한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이런 낭만적인 문학적 진실이 들어설 자리조차 없어 보이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 현실과 이상의 균열 앞에 선, 슈퍼히어로도 아니고 소설 속 숭고한 주인공도 아닌 우리들은 어떻게 균열에 맞서야 할까.


Michael-Keaton-Birdman-success-Alejandro-G-Inarritu-2014.jpg


리건 톰슨은 한때 잘 나가는 슈퍼히어로 영화의 주인공이었다. 왕년은 한참 전에 봄 물결처럼 흘러가고 젊은 시절의 빛나는 모습은 깊이 팬 주름 속에 조금이나마 남아있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와 술집에서 수많은 이들은 그를 기억한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리건의 자의식은 끊임없이 한때 불꽃처럼 빛나고 순식간에 스러져 늙은 퇴물이 된 자신을 질책한다. 여하튼, 그 늙은 퇴물이 돌아왔다. 다만 그가 귀환을 선언한 것은 자신의 연고지인 영화계가 아니라 브로드웨이, 즉 연극계였다.


영화는 이 늙은 퇴물의 귀환 속에서 터져 나오는 수많은 갈등을 담아낸다. 영화 내의 이런 갈등과 괴리는 참으로 각양각색이다. 선뜻 생각나는 것만 적어봐도 신세대와 구세대, 평론가와 배우, 예술성과 대중성 등등. 흔히 이런 식으로 온갖 의제를 다 다루면 균형 감각이 무너지기 십상이지만 감독은 영리하게도 어떤 하나에 집중하는 우를 범하지 않고 수많은 갈등이 제멋대로 발산하는 파열음과 그것이 얽히고설켜 내는 불협화음 그 자체를 관조하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이를 표현하기 위한 연출도 실로 탁월하다. 클래식과 드럼 난타가 끝없이 교차되는 음악 활용은 극에 긴장을 배가하고, 지금 봐도 놀라운 롱테이크는 그저 주역들의 발걸음을 묵묵히 좇으며 그들의 행보를 담아낸다. 주로 대화, 가끔은 쌈박질, 또 가끔은 미친 짓을 하는 그들을.


Birdman_(2014)_(1080p_BluRay_x265_afm72).mkv_-_팟플레이어_2020-12-25_오후_12_58_09.png


이런 불협화음의 정중앙, 태풍의 눈에 있는 것은 단연 주인공인 리건이지만, 영화 전반부까지 스크린에 등장할 때마다 폭발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는 인물은 마이크이다. 그는 첫 등장부터 리건과 관객을 압도하며 일분일초가 아깝다는 듯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한다.


낭만주의 문학에서 갓 튀어나온 듯한 아우라에 걸맞게, 그는 무대 위에서도 배역의 화신 그 자체다. 그가 첫 리허설에서 만취한 채로 연기 아닌 연기를 하며 리건을 질타하는 장면은 이런 면에서 무척이나 상징적이다. 그는 무대 위에 서서 리건과 자신에게 야유하는 관객을 향해 당당하게 외친다. '취한 연기를 하려면 당연히 취해있어야지, 넌 왜 안 취했는데?' '여기서 나 말고는 아무도 진실에 관심 없는 건가?' 카뮈가 연극은 인생의 축약판이고, 배우는 두세 시간 남짓한 무대 위에서 배역의 아바타(화신)가 되어 그의 생애를 구현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불사른다고 했던가, 이런 의미에서 마이크는 이상적 배우 그 자체이다.


하지만 그의 무대 위의 완전무결한 모습과 현실의 속살은 좀 다르다. 현실 속의 그는 발기부전 환자에, 그의 여자 친구 레슬리의 말을 빌리면 '사기꾼'에 불과하다. 사기꾼이 아닐 게 있겠는가? 무대 위에서는 이상을 논하며 이상을 연기하지만 현실 속의 그는 한없이 초라하다. 남자 구실 못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인기와 대중성을 비웃으며 연극의 예술성을 드높이지만 정작 리건(보잘것없는 대중 영화계의 퇴물!)을 반기는 대중 앞에서 겨우 카메라 셔터나 눌러주는 그는 연극계에서 평론가의 찬사를 받는 배우니 뭐니 해도 늙은 퇴물보다 못한 무명배우로 비칠 따름이다. 이러한 그의 괴리는 외적 갈등으로 표면화되어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킨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의 이런 폭주기관차 같은 성질이 주변 인물들이 갖고 있는 콤플렉스를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면서 이의 해결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다는 점인데, 이런 면에서 그는 신화 속 트릭스터 캐릭터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렇다면 트릭스터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떨까? 그의 괴리는 리건의 딸 샘과 만나면서 해소된다. 둘의 진실게임(truth or dare)이 상징적인데, 여기서 샘은 시종일관 벌칙을, 마이크는 진실을 선택한다. 여기서 진실과 벌칙은 어떤 은유로도 볼 수 있겠다. 마이크가 연극인으로서의 어떤 문학적, 낭만적 진실을 통해 이상에 치중하는 반면, 샘은 어떤 방향으로든 현실에서의 행동을 통한 증명(SNS가 이에 상통한다)을 우선한다. 마지막 진실게임에서 변함없이 진실을 택하는 마이크에게 벌칙을 요구하는 그녀와 이에 응답하는 그의 모습은 샘과 마이크의, 그리고 현실과 이상 간의 일정한 타협을 의미한다.


이 장면 이후로 마이크는 사실상 퇴장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의 갈등과 괴리가 해소된 이상 그가 이 이상 화면에 등장하는 것은 낭비에 가깝다. 이런 면에서 보면 영화 전반부의 주인공은 사실상 마이크라고 볼 수 있다. 그에 관련된 문제가 해결되고 난 뒤, 그와 유사한 갈등을 품고 있으나 보다 복잡다단한 리건의 괴리에 대해 논할 차례가 오는 것이다.


1_2eIljXVOQDwy022f6dcU4A.jpeg


리건과 얽힌 갈등을 하나하나 나열하려면 아예 글을 하나 따로 작성해야 할 정도이다. 이 글의 주제에 한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기도 하고. 주목해야 할 것은 샘과의 갈등, 그리고 그 자신(버드맨) 과의 갈등이겠다.


그에게 현실과 이상의 괴리, 그리고 이로 인한 열등감을 끊임없이 주지 시키는 것이 버드맨이라면 그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샘이다. 샘과 리건의 대화는 하나하나가 뼈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괴리에 대한 것은 중반부에 샘의 대마 문제로 촉발된, 서로에 대한 감정 폭발이겠다. 여기서 그녀가 리건을 거세게 몰아붙이며 내세우는 논조도 마이크와의 타협에서 보이는 그것과 무척 유사하다. '고상한 의미고 이상이고 다 핑계고, 세상 틈바구니에 끼지도 못하는 게 불안해서 이 고생하고 있는 거 아니냐' 그녀는 일갈한다. 이에 대해 리건은 반박하지 못한다. 애초에 그가 주장하는 중요한 무언가도 그저 무언가(something) 일 따름이다. 그는 이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지만 샘은 그간 쌓인 감정을 토해내면서도 지극히 객관적인 근거를 대며 무자비한 현실을 주지 시킨다.


이렇게 그들의 갈등은 절정은 찍는다. 마이크가 그녀 덕택에 괴리의 타협을 성사시키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문제는, 리건이 반박하지 못했을 뿐 순응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 생활자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2x2=5'라고 억지를 부리는 그런 모습 말이다. 하지만 그는 지하 생활자처럼 은둔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그의 갈등은 여전히 천상도 지하도 아닌 지상에, 그리고 연극이 펼쳐지는 무대 위에 있다.


maxresdefault.jpg


 버드맨은 끝없이 그에게 빛났던 과거와 놓쳐버린 기회, 화려한 귀환을 속삭이며 포기를 종용하지만 그는 집요하게 자신이 설정한 이상에 매달린다. 그의 이런 집요함은 영화 내내 거의 광기에 가까운 형태로 드러나지만 평론가 타비사에게 내뱉는 불꽃 튀는 롱테이크 독설 중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잃을 게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잖아.
하지만 난 염병할 배우고, 이 연극에 모든 걸 걸었어.



하지만 그가 이렇게 혼을 토해내거나 말거나, 타비사는 너무나 간단하게 그를 일축한다. '내일 당신의 연극을 죽일 거예요'라고. 무대 위의 굴욕부터 샘의 일갈, 마이크를 향한 열등감 등 온갖 고난을 감내하며 바라보았던, 연극계에서의 성공이라는 그의 이상이 산산이 박살 나는 순간, 즉 그의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봉합 불가능 판정을 선고받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 또한 괴리의 해결이라면 해결이다. 마이크와 샘의 그것처럼 결코 긍정적인 방향은 아니지만. 리건은 하룻밤을 술에 절어 폐인처럼 보내고, 다음날 아침에는 그전까진 청각적으로만 그 존재를 드러내던 버드맨이 아예 시각화되어 그를 질타하기까지 하지만 결코 절망을 수용(흔히 극에서는 자살의 형태로 표현된다) 하지는 않는다. 그가 옥상 위에 올라섰을 때 대화가 이를 증명한다. '영화 찍는 거예요, 아니면 진짜예요?' '영화예요!' 잠깐, 그는 연극을 찍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을 일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영화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 즉 리건의 비상이 이 장면 직후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리건은 그야말로 벼랑 끝에 몰린 순간, 일말의 희망마저도 처참하게 무너진 그 순간에 날아오른다. 영화의 결말만큼이나 해석이 분분한 장면이 바로 이 장면일 것이다. 그가 진정 미쳐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혹자는 그가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했고, 그 이후의 장면은 모두 환상이라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 영화가 모호함을 지향하기에 각양각색의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카뮈를 가져오는 것은 어떨까.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를 정면으로 마주한 인간(부조리한 인간), 즉 사형수만이 삶에 대한 순수한 열망, 즉 기가 막힌 자유를 맛본다고 역설했다. 나락에서 비상하는 리건이 카뮈의 부조리한 인간에 오버랩되어 보인다면 너무 비약일까? 카뮈가 논한 최대의 부조리, 즉 불멸을 소원하는 인간 앞에 놓인 필멸이라는 현실은 리건 앞에 놓인 온갖 괴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Birdman_(2014)_(1080p_BluRay_x265_afm72).mkv_-_팟플레이어_2021-01-03_오후_1_05_12.png



그리고 리건은 무대 위에서 자살을 기도한다. 왜일까? 그가 진정 죽고자 했다면 죽을 기회는 이미 있었다. 옥상에 선 그 순간 말이다. 그때의 죽음과 지금의 죽음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첫 리허설에서 마이크의 깽판을 떠올려보자. '나 말고는 아무도 진실에 관심 없는 건가?' 연극이란 것은 오묘한 것이다. '연기'라는 명백한 거짓을 통해 삶의 진실을 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수많은 사상가들을 매혹시킨 이 모순이 핵심이다. 리건은 이 모순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방아쇠를 당김으로써 거짓과 진실, 현실과 이상, 불멸과 죽음, 예술성과 대중성 등 그의 앞에 놓인 모든 괴리를 관통한다. 그의 자살로 모든 것이 합치되고, 동등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화(化) 한다. 이른바 미학적인 죽음이다. 이로써 그의 괴리는 마침내 해소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는 죽지 못했다. 그가 눈을 뜬 곳은 여전히 지상이다. 비루한 육체는 여전히 그를 놓아주지 않았고, 황색언론은 처음 그를 마주했을 때처럼 쓰레기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조금 달라진 것이라면 그를 그토록 증오하던 평론가가 그의 연극에 찬사를 보내고, 대중을 그를 위해 기도한다는 점이겠다. 생각해 보면 이것이 그가 원해마지않던 이상이 아닌가? 관객도, 그의 친구도 그에게 묻는다. 그는 무감한 말투로 그렇다고 대답한다.


모두가 떠나고 혼자 남은 그는 화장실에서 새 코가 붙은 얼굴을 바라본다. 코뿐만이 아니라 눈까지도 열상으로 새빨갛다. 그 모습은 이미 리건의 얼굴이 아닌 버드맨의 그것에 더 가깝다. 그가 벼랑 끝에서 맛본 자유와 함께 당긴 방아쇠는, 클리셰대로라면, 어떤 방향으로든 그의 결말이 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죽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는 다시 벼랑에 선다. 하지만 이전의 그것과는 다르다. 드높은 마천루보다도 높은 곳을 날아오르는 새들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드럼 난타가 울려 퍼지고 관객은 그렇게 그의 마지막 모습과, 하늘을 바라보며 웃는 샘을 바라본다.






그는 하늘로 날아올랐을까? 아니면 추락하여 그저 한 구의 시체로 전락했을까? 이에 대해서 영화는 답을 내놓지 않는다. 리건이 외친 '중요한 무언가'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듯 말이다. 이렇게 영화는 영화를 지배한 리건의 괴리가 해소되었는지조차 알려주지 않은 채 끝나고 관객들은 엔딩 크레딧에 의해 반쯤 강제로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마치 답을 내는 것은 관객들의 몫이라는 듯하다. 리건이 비상했든, 아니면 지하에 잠들었든 간에, 현실과 이상의 균열은 결국 지상에 발을 딛고 서있는 나, 너, 그리고 우리들의 문제라고.

keyword
작가의 이전글버닝 Burning(2018)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