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카뮈 리뷰

영원한 현대인의 신화

by krov

19세기까지 낭만주의와 모더니즘 아래 유럽을 지배했던 낙관적 전망은 1차 세계대전으로 산산이 부서진다. 극에 달한 민족주의와 낭만주의로 우상화되었던 전쟁의 실체는 실로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참호 속에서 발가락은 썩어 들어가고,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발전된 살상 무기 앞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한 줌의 고깃덩어리로 산화했다. 약 4년, 겨우 전쟁이 끝났을 때는 승전국, 패전국 가릴 것 없이 기진맥진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그들 앞에 놓인 시체의 숫자에 아연실색했다. 현실의 전쟁은 더 이상 낭만도, 신문으로 전해지는 가십거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공포, 도살장 그 자체였다.


그러나 1차 대전이 끝난 지 겨우 20년이 지나자마자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다시금 도살장이, 그 압도적인 부조리가 인간들 앞에 펼쳐진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는 처절하게 맞서 싸웠던 1차 대전 때와는 다르게 나치 독일에 완패하여 점령당하고 괴뢰정부가 세워지기에 이른다. 카뮈의 <이방인>은 바로 이런 나치 독일 치하 프랑스에서 등장한다. 거대한 부조리, 그리고 팽배한 패배주의와 절망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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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는, 좀 천박하게 말하자면 '꼴리는 대로' 사는 인간이다. 그는 법은 물론이고 신, 도덕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이방인, 아니,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면 외계인이나 다름없다. 그를 언뜻 공감 능력이 전혀 없는 사이코패스로 보았다면 지극히 합리적인 귀결이다. 이와 유사한 경우를 꼽자면 영화 <버닝>의 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 <악령>의 스타브로긴과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지하생활자가 있겠다. 이 네 명의 공통점이라면 극의 중심에 있고, 사회적 통념으로는 도저히 정상인이라고 보기 어려운 언동을 하지만 이들을 어떤 식으로든 이해하는 것이 작품 해석의 핵심이라는 점이다.


이들을 사이코패스로 낙인찍는다면 <이방인>을 포함한 위의 작품들은 전혀 어렵지 않다. 주인공들은 정신병자가 되고 그것으로 이야기의 앞뒤가 모두 들어맞는다. 그러나 이런 해결은 작가도, 독자도 원치 않는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작가들은 다양한 단서를 뿌려놓는다. 카뮈 또한 그렇다. 뫼르소로 다시 돌아오면, 그의 기이한 언동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특징이 있다. 바로 정직성이다. 흔히 도덕의 최소한이라고 하는 법은 물론이고 도덕조차 의식하지 않는 인간이 정직성을 중시한다니,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뫼르소는 그렇다. 그는 경찰은 물론이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살인자와 패륜아라고 낙인을 찍는 시선 앞에서도 결코 주눅 들지도 거짓말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이 사회적 패륜아는 단두대 앞에서조차 신에게 의탁하지 않는다. 그 이유도 참으로 간단하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 점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느냐고 묻기에 나는, 그러한 것을 자문해 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내게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뫼르소의 이런 우직한 정직함은 마치 소크라테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도 어찌 보면 언행일치, 즉 자신의 정직성을 증명하기 위해 죽은 것이다. 그 결과로 그는 철학자들의 신이 되어, 이상과 현실의 합치를 염원하는 지식인들의 영원한 우상으로 자리 잡는다. 다만 뫼르소는 그런 우상화조차 원치 않는다. 쉽게 말하면 그는 그리 거창하지도 않다. 그는 소크라테스처럼 화려하고 당당하게 반론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속내를 투명하게 드러내 보인 뒤, 그 결과로 내려진 가혹한 부조리(수감생활과 사형)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적응하기까지 한다. 그의 이런 태도는 일견 짙은 비관주의에서 나오는 절망의 수용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작품 내내 수동적이던 뫼르소가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폭발시키는 최후의 포효는 결코 비관이나 절망이 아닌, 죽음이라는 창을 통한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임을 명백히 한다.


…그러나 내겐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 신부 이상의 확신이 있어. 나의 삶에 대한, 닥쳐올 그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래, 내겐 이것밖에 없어.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굳세게 붙들고 있어. 그 진리가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만큼이나. … 나는 마치 저 순간을, 나의 정당성이 증명될 저 신새벽을 여태껏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1부의 뫼르소는 지극히 수동적이다. 특별히 수그러들어있진 않지만 결코 삶에 적극적인 인간은 아니다. 그는 그저 살아간다. 2부 전반의 뫼르소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재판의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논쟁 밖에 놓인 채 일종의 주제로 다루어질 따름이다. 하지만 2부 마지막, 그야말로 삶의 최후의 최후에 선 그는 소설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감정을 폭발시킨다. 이런 그의 변화를 통해 카뮈는 '사형수의 자유'를 역설한다. 뫼르소는 사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기간 동안 꾸준히 변화하며, 이런 변화의 절정은 최후의 순간에 이루어진다. 카뮈는 이를 통해 죽음을 바로 마주한 인간이 맛보는 자유를 보다 극적으로, 우화적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자유, 소위 '진정 자유로운 삶이 누리는 자유' 아래에 중요한 문제는 무엇인가? 뫼르소는 신을 믿는지를 포함한 아무것도 중요치 않다고 말한다. 삶 그 자체 앞에서 그보다 중요한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고. 카뮈의 이런 주제, 즉 삶 그 자체의 우선성과 삶에 대한 찬미는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서 매우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 이 소리는 꼭 필요하다는 것뿐이다. 니체는 "하늘에서 그리고 땅 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같은 방향으로 복종하는 일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결과 마침내는 가령 덕, 예술, 음악, 무용, 이성, 정신과 같은, 이 땅에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 모습을 바꾸어 놓는 그 무엇, 무엇인가 세련되고 광적인 혹은 신성한 그 무엇이 생겨난다."라고 썼는데, 그는 그 말로써 위대한 풍모의 모럴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부조리한 인간이 가는 길을 보여 준다.
…이와 반대로 알료샤는 분명히 말한다.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 이제 자살과 광기는 문제 되지 않는다. 영생과 기쁨을 확신하는 사람에게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간은 자신의 신성을 행복과 바꾼다. "우리는 서로 만나서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들을 즐겁게 이야기하게 될 거야."…


카뮈는 니체를 통해 부조리 앞에 선 인간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모럴'에 뫼르소가 온몸을 바쳐 증명한 정직성이 포함되리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러했듯, 카뮈 역시 삶의 유한성을 통해 사후세계가 아닌 살아있는 삶의 가치와 불멸성을 역설한다. 이 두 인용구는 기실 형태만 다를 뿐 동일한 주제를 말하고 있다. 현세를 복되게 하는 무언가. 온 힘을 다해 살아가야 할 무언가를 찾고 그것을 지침 삼아 살아갈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카뮈는 영원한 이방인 뫼르소의 당당한 삶과 죽음을 통해 선언한다.






서론에서 언급했듯, <이방인>은 사상 최악의 전쟁으로부터 겨우 20년 후에 더 끔찍한 지옥도가 펼쳐진, 그야말로 부조리의 시대에 쓰이고 세상에 나왔다. 카뮈는 이런 배경 아래에서 기존의 영웅주의, 낭만주의는 물론이고 종교적 신화화, 심지어는 지식인들의 이상론까지 단호하게 배격하고, 그저 순수한 개인으로서 불타는 햇볕이 내리쬐는 모래사장 위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서있기를 선택했다. 이 책이 신화가 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인간의 삶 자체가 부조리임을 설파한다. 전쟁, 불합리한 관료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죽음까지, 부조리는 도처에 깔려있다. 그리고 <이방인>에서 그러한 부조리에 맞서는 삶을 선언한다. 이런 거대한 부조리 앞에 인간은 그저 쓸려나가는 모래알만 한 존재라는 것을 순순히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자신으로서 삶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인간의 원형을 제시한 카뮈의 <이방인>은 영원한 현대인의 신화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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