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카뮈 리뷰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by kr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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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진면목은 위기가 닥쳤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법이다. 그렇기에 수많은 미디어는 현실에서는 보기 어려울 법한 극한 상황을 상정하고, 역경을 마주한 인물들을 그려낸다. 그들은 대부분 영웅적으로 승리하고, 가끔은 처절하게 패배한다. 여기서 극한 상황은 대체로 주인공, 혹은 주변 인물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무언가이다. 전쟁, 자연재해, 괴물, 귀신... 위협의 형태가 다를 뿐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장르가 공포이든, 액션이든 아주 넓게 뭉뚱그리면 생존이라는 장르 아래 들어간다. 아니, 결국 우리가 인간인 이상 결국 모든 매체의 장르는 생존과 죽음이라는 일종의 절대적 관념 아래에 있다.


카뮈의 <페스트> 역시 이런 법칙의 예외는 아니다. 아니, 이 작품의 장르는 사실 죽음 그 자체다. 작가 자신이 죽음을 가까이하고 살았던 탓일까? 인간은 아무리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안다 한들, 노환이 덮치기 전에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고 한다. 혹자는 인간은 자신의 부모를 묻고 나서야 실질적으로 자신의 차례도 찾아올 것이라고 인식한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카뮈는 노환은커녕 젊은 시절부터 타고난 폐렴으로 인해 꿈을 포기해야 했음은 물론이고 죽음의 문턱에 드나들어야 했다. 삶의 전성기에 들이닥친 사형선고는 그야말로 부조리, 불합리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런 그의 삶은 그의 작품에 그대로 투영된다. 다만 이방인이 작품 특유의 몽환적 분위기로 작품의 가장 위층을 안개로 덮고 있는 듯한 느낌이라면, 페스트는 작품 배경부터 작중인물들까지 마치 작가 본인의 실제 삶을 조금씩 잘라내어 그대로 배치한 듯하다. 죽음이라는 절대적 부조리 앞에 선 작중인물들과 그에 대처하는 각양각색의 방법은 실상 개개인(=카뮈)이 살고자 몸부림치며 쥐어짜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카뮈라고 다를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도 결국 인간이니까. 다만 그가 위대한 것은 이런 일련의 '발버둥'조차 죽음 앞에서 무의미할 수 있다는 것을 주시하면서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런 각양각색의 방법 중 작가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메시지는 작품 전반에 펼쳐져 있지만 이것이 가장 강렬하게 돋보이는 것으로 두 장면, 그리고 결말을 꼽을 수 있겠다.


"…나는 영웅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이 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은 살인적인 것임을 배웠습니다.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살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죽는 일입니다."…리유는 갑자기 피로를 느낀 듯이 일어섰다. "…즉,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아닙니다, 신부님." 하고 그가 말했다. "나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고 있어요. 어린애들마저도 주리를 틀도록 창조해 놓은 이 세상이라면 나는 죽어도 거부하겠습니다." … "내가 증오하는 것은 죽음과 불행이라는 것을 당신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원하시든 원하시지 않든 간에 우리는 함께 그것 때문에 고생을 하고, 그것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하느님조차도 이제는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작중 가장 전통적인 선인이자 영웅은 단연코 주인공 리유이다. 그는 페스트의 시작부터 끝까지 묵묵히 고통을 감내하며 타인을, 공동체를 위해 봉사한다. 하지만 그 결과 그에게 주어지는 것은 절친한 친구와 아내의 죽음이다. 또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페스트에 저항한 타루와 파늘루 신부 또한 죽음을 맞는다. 반면, 랑베르는 틀림없는 선인이지만 리유에 비한다면 소인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랑하는 이를 품에 안는다.


카뮈의 가혹함은 일견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작품 내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일종의 가치 우위를 따져보면 답을 찾을 수 있다. 카뮈는 랑베르의 입을 빌려 영웅주의로 대표되는 관념의 배제를, 그리고 리유와 파늘루 신부가 무고한 아이의 죽음을 통해 생명과 신론((神論)이 역시 관념이다) 중 무엇이 우선인지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펼친다. 이 두 대화와 결말을 종합해보면 도출되는 결론은 결국 삶이다. <이방인>에서 철저히 개인을 향해 제시되었던 카뮈의 명제, '삶은 그 무엇에도 우선한다'는 <페스트>에서 보다 사회적이고 다각적인 관점에서 제시된다.


리유, 타루, 파늘루는 각기 다른 방식이지만 자신의 삶을 희생하거나 관념에 몸 바친 이들이다. 타루는 평화, 파늘루 신부는 신을 위해 싸우고, 리유는 자신의 '성실성'을 위해 아내와 자신의 행복을 희생한다. 분명히 이 셋은 모두 숭고하다. 특히 리유는 영웅주의가 자신과 관계없다고 하지만 분명 그는 영웅이다. 하지만 그는 지긋지긋한 페스트가 물러갔음에도 웃지 못하고, 친구의 죽음 앞에서 '다시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것, … 다시는 휴전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을 뿐이다.


이중 둘은 관념에 자신을 바친 대가로 삶을 상실한다. 리유는 본인이 죽지 않으나 소중한 이들의 죽음을 산 자로서 감내한다. 자신의 사랑과 행복에 대한 균형 감각을 견지하고 있는 랑베르만이 온전히 페스트를 이겨낸 보상을 얻는다. 랑베르는 <이방인>의 뫼르소와는 정반대의 결말을 맞는 인물이지만 그들이 작품 외적으로 갖는 위치, 즉 주제 의식을 전달하는 역할은 동일하다.






전력으로 사랑하면서 전력으로 살아라. 시지프 신화, 이방인, 페스트를 연이어 읽으며 읽어낸 카뮈의 메시지는 결국 이게 아닌가 싶다. 성경에도 비슷한 말이 있지 않던가? 이렇게 보면 '하느님조차도 이제는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라는 리유의 대사는 무척이나 오묘하다. 상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리유는 뫼르소와는 다르게 신과 사제를 전력으로 거부하지 않는다. 이 대사는 명백한 포용이다. 리유의 대사는 분명 무신론, 심지어 반신론적인 냄새를 풍김에도 불구하고, 근원적으로 보면 결국 예수가 그토록 설파하고자 한 미덕과 동일하지 않은가. 이런 면에서 보면 카뮈는 영락없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정신적 수양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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