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양 신화
이 영화는 꽤나 노골적이다. 공동체의 남자들은 도덕성이라고는 하나 보이지 않는 짐승들이고, 여자들은 질투와 군중심리에 돌아버린 폭도들 그 자체이다. 화자인 소년은 그나마 봐줄 만한 편이나 결코 좋게 보이진 않는다. 잘봐줘야 방관자다. 피해자인 말레나도 전혀 주체적이지 못한 탓에 영화는 그저 답답하다. 이런 면만 보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저 인간에 대한 회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것도 아니면 끽해봐야 '예쁜 여자라서 당했다' 이 정도? 글쎄, 둘 다 그다지 흥미로운 해석은 아니다.
이런 노골적임(분명히 과하지만) 뒤에는 으레 무언가 숨겨져 있기 마련이다. 이 글에서 논하고자 하는 것도 이것이다. 이 영화는 단순히 위에서 언급한 두 관점으로만 읽어보기에는 그 노골성의 정도가 너무 심하다. 우리는 신화를 읽으며, 폭력의 강도나 수위에 놀라지만 분명 이런 선정성 혹은 직접성에 어떤 의미가 들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단순히 신화를 오줌싸개들의 망상집 정도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물론 말레나가 사전적 의미의 신화는 아니나, 어떤 매체라는 점에서, 그리고 뭔가 숨겨져 있는 것 같다면 그것을 확인해볼 가치는 충분하다. 무엇보다,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영화를 굳이 한두 가지의 피상적인 방법으로 결론 내버리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소비 방식 아니겠는가.
이 영화에 필자가 대보고 싶은 메스는 철학자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이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면, 신화는 소수자에 대한 박해의 기록(중세의 마녀사냥처럼)이며, 그저 다양한 방식으로 이를 가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가 드는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오이디푸스 신화이다. 이를 예시로, 르네 지라르가 말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최대한 간략하게 도식화해보겠다.
1) 공동체의 위기 - 그리스 테베에 페스트가 닥침
2) 희생양의 범죄 - 오이디푸스는 친부 살해와 근친상간을 저지름
3) 희생양 징후 - 오이디푸스는 명백한 이방인이고, 절름발이이며, 왕족임(=소수자)
4) 박해 - 오이디푸스가 처벌을 받고 추방됨(=집단 박해)
2)와 3)을 누명을 씌우기 위한 명분이라고 보면 좀 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한 예시로 나치 독일의 유태인 박해를 보자. 독일 내 유태인 집단은 그들이 속한 더 큰 공동체인 독일에 그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았으나, 당시 독일에 닥친 경제적, 사회적 위기의 원인이자 아리아 민족의 순수성을 저해한다는 명목으로 인종 청소(=박해)의 피해자가 되었다. 오이디푸스도 이와 동일하다. 즉,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집단 폭력과 무질서로 인한 박해이지, 합리적인 인과 분석이 아님을 명심하자. 르네 지라르는 이 외에도 다양한 신화를 가져와 설득력 있는 설명을 펼치고 있지만 <말레나>와 엮어 보기에는 우선 이 정도로 충분할 것 같다.
그럼 말레나에 이를 대입해보자.
1) 공동체의 위기 - 이탈리아의 패전과 이로 인한 내부 모순
2) 희생양의 범죄 - 의식 불참, 문란함, 나치독일 장교 접대
3) 희생양 징후 - 아름다움, 창녀, 미망인(=소수자)
4) 박해 - 집단 폭력과 추방
도식이 들어맞는 것은 물론이고, 그 표현 방식이 오이디푸스 신화처럼 우회적이지도 않다. 오이디푸스 신화와 <말레나>가 다른 점은 <말레나>에는 가해자들에 대한 우회적 표현, 즉 포장이 일절 없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신화는 공동체의 위기를 희생양, 즉 오이디푸스의 탓으로 돌리기 위해 2)와 3)을 이용한다. 오이디푸스가 절름발이였다, 근친상간과 친부 살해를 저질렀다는 등의 비겁한 이유를 갖다 붙여 희생양의 범죄를 정당화함으로써 공동체의 책임회피를 시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말레나>는 이런 포장 없이 가해자들의 추악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영화의 노골성 탓에 전쟁의 흐름과 이에 따른 공동체의 위기가 다소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논하겠다). 앞에서 희생양 메커니즘을 도식화했듯이, 마을의 위기가 심화되는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아직은 소식으로만 전해지는 전쟁 - 말레나 남편의 전사, 변호사의 강간(희생양의 범죄 및 징후)
(2) 배급제로 인한 생활고 가중 - 말레나가 몸을 팔아 생필품을 얻는 것으로 묘사됨(희생양의 범죄)
(3) 본격적으로 마을에 가해지는 폭격 - 아버지의 죽음, 창녀로 전락(희생양의 범죄 및 징후)
(4) 패전과 미군(적군) 입성 - 집단 박해
이렇게 보면 공동체의 위기가 말레나의 고난과 같은 속도로 가중되며, 그 막바지에 희생양(말레나)를 박해함으로써 그 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이 보다 명백해진다. 희생양의 범죄 및 징후(누명)은 이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선 직관적인 희생양 징후의 성립부터 들여다보자. 르네 지라르는 '비정상'을 사회의 '정상', 즉 중산층이 결정하고, 이 정상에서 멀어질수록(강자이든 약자이든 관계없이) 공동체에 위기가 닥쳤을 때 박해당할 가능성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고 보았다. 이 '비정상'은 선천적인 특성이 될 수도 있고, 후천적인 특성이 될 수도 있다. 사실 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합리적인 인과 관계가 아니라 공동체의 폭력과 무질서 해소를 위한 희생양을 만드는 것이니까. 소위 털어서 먼지만 나오면 그만이다. 그런 의미에서 말레나는 너무나 이상적인 희생양이다. 말레나가 가진 세 가지 징후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비정상적인 아름다움, 미망인, 창녀. 이 세 가지는 명백히 정규분포 끝자락에 존재하는, 정상으로부터 한참 먼 속성들이다. 이로써 희생양 신화의 상투적 전형 중 하나인 희생양 징후가 완성된다.
다음은 희생양의 범죄이다. 우선, 말레나는 자신의 남편의 전사 소식을 알리는 집회에 불참한다. 소수자가 공동체 집회에 불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트집거리가 되지만, 이 집회의 모양새를 따져보면 말레나의 범죄는 보다 심각해진다. 전사자에 대한 애도는 그저 명분에 불과하고 그 실제 목적은 군중의 사기 고취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 행렬에 참여하기는 하나, 공동체에게 이는 중요치 않다. 그들에게 최우선되는 것은 집단화이지, 전사자 개개인에 대한 추모가 아니다.
말레나의 문란함에 대해 군중이 덮어씌우는 누명은 영화에서 과할 정도로 조명되니 넘어가도록 하고, 다소 의아스러운 그녀의 범죄는 나치독일 장교 접대이다. 군중은 그녀를 박해할 때 그녀의 죄목으로 분명히 '나치와 붙어먹은 년'을 언급하고, 화자인 소년이 나치 장교와 어울리는 그녀를 보며 보는 환영에서도 나치와 어울리는 것은 대단히 더러운 일인 양 묘사된다. 일견 그럴듯하지만, 사실 이는 굳이 언급하기엔 좀 괴상한 죄목이다. 첫째로 말레나에 대한 여성들의 질투는 이미 차고 넘쳐서, 언제고 그녀에게 집단폭력을 가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집단폭력이 가해지는 타이밍 자체도 매우 의도적이다). 둘째로, 당시 이탈리아는 명백히 추축국의 일원으로서 나치독일의 동맹국이다. 마을로서는 아무리 희생양을 박해하기 위해서라고 한들 이를 죄목으로 내세워봐야 자신들의 흑역사도 같이 언급하는 꼴이라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결정적으로, 감독이 단순히 인간에 대한 회의나 여성 인권 따위를 말하고자 했다면 아예 불필요한 부분이 된다. 감독은 왜 굳이 이것을 언급했을까?
이 영화가 희생양 신화가 되는 지점은 바로 이곳이다. 국가가 전쟁에서 패배했고, 광장에서 적군이 개선식을 올리고 있다. 영화에선 미군의 입성을 마치 경사인 양 묘사하지만, 패전은 한 국가가 겪을 수 있는 최대 위기이자 모순이다. 기존 사회 질서의 붕괴를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인데, 이 경우 공동체 내의 군중이 받는 스트레스는 극단적인 폭력과 무질서라는 형태로 구체화된다. 이때 필요한 것이 희생양이다. '단 한 명만 죽으면' 즉, 폭력이 극에 달해 폭발하기 직전, 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다. 폭력을 막을 수 없다면 최소한 '착한 폭력'으로 '나쁜 폭력'을 방지하자는 것이다. 이탈리아로 은유되는 영화의 마을은 전쟁에 몸 담근 죄를 말레나를 제단에 바침으로써 용서받고, 과거로부터 입을 씻은 채 새로운 질서를 재건한다. 역병은 마녀가 우물에 독을 풀은 탓에 일어났고, 마녀를 화형 시킴으로써 역병은 그들의 추악한 과거와 함께 물러가는 것이다. 이로써 희생양 신화가 완성되었다.
무질서와 폭력이 끝난 후, 말레나는 남편과 함께 돌아와 자신을 그토록 모질게 대했던 공동체에 다시금 섞여들어간다. 그녀는 자신을 박해한 군중에게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지만, 이것으로 그녀가 주도권을 갖는다, 혹은 그들을 용서했다는 등의 능동적인 행동으로 보기엔 그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 그녀의 안식을 위했다면 차라리 시칠리아에서 남편과 재회하는 모습으로 막을 내렸어야 했다. 철저한 피해자로서의 희생양과 가해자들의 후안무치함을 강조하는 결말은 희생양 메커니즘이 지불해야 하는 대가의 씁쓸함을 다시금 새겨줄 뿐이다.
영화에 대해 조금 아쉬운 것은 공동체의 위기와 그것이 가하는 집단 박해가 지나친 노골성으로 인해 가려졌다는 점이다. 리뷰에서 언급한 공동체의 위기는 영화 내에서 꾸준히 암시됨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감이 상당 부분 희석되는데, 이는 남성 개개인의 성욕 및 여성 무리의 질투 등 인간 개개인의 추악한 감정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노골적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이런 노골적인 묘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노골성을 통해 만천하에 드러내고자 한 것을 되려 덮어버리는 효과를 내버렸다. 특히 이는 페미니즘으로 인한 성 이분법이 횡횡한 현재에 더 심각하다. 영화의 주제인 희생양을 통해 모순을 해소하는 집단의 추악함이 아닌, 남성의 성욕과 여성의 시기 자체를 비판하는 것처럼 읽힐 여지가 다분하다. 실제로 <말레나>에 대한 평은 대부분 이런 이분법 아래에 읽혔다. 개인적으로는 참 아쉬운 작품이다. 20년이 지난 지금 봐도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세련되게 느껴질 정도인데, 선정성만 조금 조절했어도 보다 좋은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참고 도서
<희생양>, 르네 지라르 저, 김진석 옮김, 2007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