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타르인의 사막 / 디노 부차티

희망, 절망, 시간

by kr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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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푸른 하늘에서 구름은 더 이상 고요히 흐르지 않고 서로 포개어지며 도망쳐간다. 구름은 너무나 급히 사라진다. 그러면 우리는 시간이 흘러 어느 날 길은 끝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기대와 공포는 종이 한 장 차이다. 낙관주의에 기초한 미래는 돌연 미지에 대한 공포로 돌변하곤 한다. 그럴 때면 체호프의 말마따나 '모든 소리에서 개소리를 듣고 모든 새에게서 올빼미를 보게' 되는 것이다. 내일에 대한 기대는 한편으로는 현재를 담보로 내놓을 것을 전제하므로, 세상만사가 장밋빛으로 보이는 와중에도 그 뒤편엔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타타르인의 사막>은 이런 기대와 공포,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한평생 줄타기하는 인간 군상을 그려내고 있다. 즉, 부조리극이다. 주인공은 기나긴 사관학교생활 끝에 임관하여 한 요새로 발령을 받아 명예와 영광을 꿈꾸며 고향을 떠나고 그렇게 그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된다. 마치 사막의 신기루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이 요새는 일종의 무중력의 공간이다. 수비 작전이라는 이름의 한없이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주인공과 병사들의 시간은 마치 이 무중력 세계에서 떠있는 물 덩어리처럼, 흐르지 않고 정지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시간은 결코 멈추는 일 없이 무자비하게 흘러간다.


35.jpg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작가는 이 무자비한 시간 앞에서 말 그대로 녹아내리는 인간의 모습을 독자 앞에 투사한다. 그 안에는 우리가 부조리라고 부르는 무언가가, 그리고 그 부조리 안에서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우리의 모습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주인공의 정체성과 주변 상황은 일견 명확해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이 소설은 한없이 <고도를 기다리며>와 유사해진다. 다만, <타타르인의 사막>은 고전적인 소설의 틀 안에서 부조리를 그려내고 있기에 훨씬 친밀하다. 이 친밀함은, 다르게 말하면 무서우리만큼 직접적으로 와 닿는다는 것이다. 제4의 벽을 뚫고 들려오는 듯한 건조한 서술로 대표되는 이 소설은 시간의 묵시록 그 자체라 할만하다.







'부조리 문학'하면 떠오르는 것은 단연 카뮈의 <이방인> 일 것이다. 이제 이 소설이 한 편의 신화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리라. 하지만 카뮈의 부조리는 아무래도 좀 순한 맛이 없지 않아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탓인지, 여하튼 <페스트>에서든 <이방인>에서든 카뮈는 삶에 대한 찬미를 아끼지 않는 경향이 있다.


반면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나 카프카의 <심판>(=소송)은 그야말로 무자비하다. 한없이 무기력한 인간은 부조리 앞에서 그야말로 으스러진다. 개인적으론 일면 코스믹 호러를 연상시키는 이런 요소가 부조리극의 강렬한 매력이라고 생각하는데, <타타르인의 사막>은 그 매력을 잘 살리고 있어서 작품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가 참 마음에 들었다. 한편으로는 군대 생활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지금 내 인생이 떠오르기도 하고.. 여하튼,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이 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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