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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 문화론

평양냉면의 정취

by abecekonyv

문화적으로 평이하다는게 무엇을 말하는가. 사실 그런건 없는지도 모른다고 일축할 말인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글을 읽을 때마다 그런 걸 어렴풋이 느끼는 것 같다. 현재 예전 제 3세계라 불리웠던 국가들의 문학이 서점에 번역되어 올라온다. 그것들을 서서 가끔 읽다 보면 이국적인 맛에 가끔은 부러워 질 때가 있다. 과거 철학과 교수님이랑 밥을 먹은 적이 있었는데, 일본에 갔던 이야기를 하다가 '일본도 우리나라랑 비슷하지 않냐'라는 식의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그 당시 나에게는 일본 조차도 새로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완전히 다르진 않았던 것 같다. 최근 읽은 러시아 관련 책에는 일본이나 우리나라가 서방세계의 경제모델을 증명해주는 듯이 잘 살고 있다는 문장을 본 적있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미국을 모델로 삼아 나아가는 경향이 있고 역사적으로 그것을 인정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두 국가는 미국의 모델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기능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자유주의 진영에서 우리는 서방 세계의 경제모델도 답습하며 세력을 키워나갔으나, 일본하고의 약간의 차이점이라면, 전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차이이다. 이 전통이라는게 결국은 문화와 결부되는 이야기이기에 내가 하려는 이야기에 중요해진다. 전통을 보존하라는 구닥다리 언설은 아니다. 단지 그것이 가지는 힘의 측면을 말한다. 현재 한국 대중문화는 성황을 이루고 있다. 그것을 보통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과거 전통 문화에 대해 알리기 보다는 돈이 되는 것들을 팔아야 한다고 말이다. 사실 전통 문화라는건 경복궁이나 다보탑 같은 문화재 뿐만아니라 국민들의 근저가 되는 사상의 뿌리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사실 우리나라가 가장 자유주의 진영에서 사상적으로 뿌리박힌 동아시아의 미국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경제력 측면에서는 모르겠지만, 정신에 대해서는 그런 측면이 강한 것 같다. 중국이나 일본인들을 보면 그들의 전통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 공고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다만 우리나라에 살면서 나조차도 전통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보지 않았다. 사실 일본이나 중국이라도 젊은이들의 전통관은 미미해지는 추세가 드러난다. 그러나 전통이라는 사상의 측면에서 바라볼 때, 그들의 근기라는게 개성이자 힘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무언가 '우리는 그런게 존재하기라도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동학 농민 운동을 우리나라 정신의 모체로 삼아야할까? 한민족의 정? 사실 특정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애초에 그것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개인적으로 문체에 대한 고민이라는게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다. 글을 쓰면서도 느끼지만 회의를 감출 수 없는 것이, 나의 문체란 그냥 담백하기만 한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의 개성이란건 내가 살아오면서 느낀 전통이 기저가 된다. 인간의 생각이란건 경험에서 촉발되기에, 나의 생각의 결은 한국인의 측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앞서 말한 전통의 단절이 진실이라면, 나 역시도 내 문체에서 그럴듯한 개성을 뽑아내는게 가능한가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사실 담백한 것이 요즘은 장점이라고도 생각한다. 뒤틀리기 보다는 솔직하다는 것 말이다. 그러나 솔직하다는 생각도 중국인들을 보면 깨지게 된다. 가끔 그들의 호방함에 놀랄 때가 많은데, 그것이 우리나라에서는 불쾌하게 여겨질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나치게 솔직한건지, 내가 솔직함의 폭이 좁은 건지 흔들릴 정도이다. 그렇기에 가끔은 '중국과 일본 사이의 솔직함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한국인을 대표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말이다. 따라서 솔직담백한 것도 정도에 따라서 칼과 같기도 하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따라서 나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글을 쓰는 문체 뿐만 아니라 유무형의 모든 것에 관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경험이라는 것도 내가 유도할 수는 있는것이지만, 가끔은 나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도 존재한다. 따라서 경험들이 나를 갈고 닦는다면, 적어도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것들에 한정된 것이다.


미국은 흔히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열등감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긴 역사를 가지고도 전쟁과 제국주의, 정치, 분단 등으로 좌절을 겪었다. 따라서 이 정도가 최선인지도 모른다. 문화에 대한 이야기는 서방 세계의 체제랑 관계 없이 스스로의 자립이 가능한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대부분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 조차 위험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중국, 미국, 러시아, 북한, 일본 등을 신경써야하는 국가의 중립성을 말한다. 따라서 대외적인 외교와 내실을 둘 다 챙겨내야 하는 국면에 처해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내실이라는게 문화적인 작업에 해당한다. 나중을 위해서 우리는 대중문화 뿐만 아니라 문화의 층위를 넓혀야 하는지도 모른다.


트럼프의 맥도날드 사랑은 흔히 미국 감성으로 말해진다. 자신이 햄버거와 콜라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가지는 대중적인 문화를 보여주는 것 같다고 느껴진다. 글 전반이 그런 것에 비판적으로 쓰여지는 것 같다고 느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 담백함 조차도 궁극적인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트럼프가 레슬링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대외적인 콜라 사랑을 광고하는 것은 미국인들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들역시 우리와 비슷한 대중적인 취향에 호소하는 것이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담백함과 비틀림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양극이다. N과S 마냥 우리는 그것을 떼어내기란 힘들다. <책임 정당: 민주주의로부터 민주주의 구하기>에서 저자 프랜시스 매컬 로젠블루스와 이언 샤피로는 양당제가 가장 합당하다고 주장한다. 브렉시트가 영국 대부분의 의사를 반영하지 못하지만, 너무 많은 정당을 양산하여 브렉시트에 찬성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예로 든다. 이 책의 내용은 책임 정당이라는 제목에서도 주지하듯이, 정당들의 의사결정권을 나눠가질수록 의사결정이 모호해진다는 걸 실제 정치와 결부하여 실증해나간다. 이 책을 읽다보면,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이란 무엇인가>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 그는 포스트 모던을 과거에 존재했던 사변적 거대서사(헤겔), 해방적 거대서사(마르크스) 같은 거대 담론을 해체하는 규칙 쪼개기로 보았다. 그러나 그런 규칙 쪼개기가 의사결정을 방해하는 측면도 분명 존재한다. 하나의 입안이 나오면 여러 외부의 규칙들은 자신들의 틀에 맞게 그것을 비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문화라는 것도 너무 많은 쪼개기가 감행되는게 아닐까. 우리는 외부 압력을 견뎌낼 수 밖에 없다. 중국의 대만 침공을 걱정해야하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우리나라와 간접적으로 연결되며, 일본의 경제를 신경써야하고, 미국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의 입안이라는 것은 상급자를 신경쓰는 사회생활마냥 처세를 잘 해내야한다.


우리나라는 두 얼굴이 존재한다. 가면을 쓴 사회생활.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시간이 축적 될 수록 우리의 새로운 문화라는 것도 증대되겠지만, 앞으로도 한국은 자립을 위한 문화적 토대를 쌓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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