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된 후회는 없는지도 모르겠다
후회란 사실 반추 이상의 가치는 없다. 이제는 돌아보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많다. 부엌의 물이 제대로 잠겼나 살피는 강박증 환자 처럼 돌아보는 것을 그만두고 싶기 때문이다. 인생이 단지 청량하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돌아본다는 것은 어떤 찜찜함이기에, 지나친 점검으로 인생이 피로해진다. 나의 후회란 청소년기 운동을 많이 해놓을걸, 잠을 많이 잘걸 등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우울해 하지 말걸 등. 나는 후회를 별로 하지 않는다고 자부하지만, 이 정도의 뉘우침이 있다. 하지만 그런 경험을 겪었기에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게 아닐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면서 실패라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을 자주 돌아보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이 어떤 흐름으로 완결되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나오게 된다. 그러나 그 조차 인생의 일부였다는 것을 망각하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후회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조차 나의 반성과 성찰에 도움이 된다면, 진실한 후회란 과연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런 논리라면 후회는 부유하는 말이 되어 버린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후회라는 말 조차도 실용주의적으로 인생에 녹여낸다면, 후회-일반은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는가. 진정한 후회란 죽음의 속성에 가까운 것 같다. 다자이 오사무의 유명한 첫 문장을 바라보자. 부끄럼 많은 인생을 보냈습니다. 결국 <인간 실격>의 주인공은 마약에 찌들려 죽어간다. 후회가 우리 삶에 용해된다면 후회의 망령은 사라지게 된다.
타인에게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면 보통 사과를 한다. "당신에게 폐를 끼치게 되어 후회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대게 사과는 자신의 뉘우침을 표시해야 한다. 그러나 나의 논리에 따르면 여기서 사용되는 후회라는 말조차 자신의 삶을 위한 이기적 변명에 불과하다. 상대에게 사죄하기 위해서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죽음까지 가게된다. 그래서 죄질이 더러운 일들은 판사가 사형을 선고하거나, 진심으로 부끄러움을 느껴 자살로 이르게 만든다. 따라서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사죄라는 것은 나의 후회를 타인에게 기도하는 것에 불과하다. 타인에게 사죄하는 공손한 태도가 영향을 미칠지언정, 기도를 들어줄지 말지의 판단은 우리와 당연하게도 단절되어 있다. 따라서 후회라는 것은 기도의 속성이다. 기도는 우리의 주일마다 삶에 녹아있다. 따라서 기도라는 것은 타인의 도달이 아니라 우리에게 용해된 행위이다.
언어라는 것은 항상 좌절된다. 그런 편지를 쓰지 말걸,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내 메일에 뭔가 무례한게 쓰여있나? 등등. 우리의 언어는 타인 앞에 좌절 된다. 우리는 언어 보다는 봐야한다. 이 사람이 원하는게 무엇인지를 직관으로 보아야한다. 언어라는 것은 단점 역시 명확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줏대가 강하다는 것은 주도적인 삶으로서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나의 경우 가끔은 그런 것 때문에 돌아가는 일이 많이 생겼다. 그러나 나는 후회라는게 삶에 녹아든다면, 진정한 후회라는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따라서 나 역시 그렇게까지 돌아간 길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이 지나친 자기합리화라고 불리울지는 몰라도 적어도 나에겐 후회라는게 그렇게 다가온다. 애초에 돌아가다보니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며 나는 위로하는지도 모르겠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먹어 봐야 아는지를 항상 물어보지만, 가끔은 찍어먹어봐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세워 놓은 보편적인 기준에 맞지 않더라도 자신이 고수하는 길이 존재한다는 것은, 돈키호테적인 낭만주의적 열정에 불과한지도 모르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삶을 움직이는 강한 추동력이라는걸 나는 알고 있다. 능력이라는게 사실은 그런 두루두루 경험하는 것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아직은 젊지만, 나이가 들어갈 수록 지름길을 고수하는게 그렇게 좋은 생각인건지 희미해지게 되는 것 같다. 돌아보면 나 역시 어떤 부분에선 지름길을 타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나에게 좋지 못한 결과를 안겨주기도 했다.
후회한다는 것은 사실 감정에 불과한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