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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Aug 14. 2022

시리아 내전 이야기

과연 시리아 내전은 독재자vs민주화였는가?

https://youtu.be/3JWHn7i1PdU?si=kKWAXZ451-nLlqAD

사실 시리아 내전은 필자가 예전부터 관심 있어왔던 주제이기도 했고 그렇기에 몇번 넌지시 글에서 언급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제대로 각 잡고 써본 적은 없더라. 그래서 이 글을 통해 비록 각 잡고 쓴 것은 아니지만 개략적으로 대충 내 견해를 풀어보고자 한다.


먼저 시리아 내전, 더 나아가 중동 정세에 있어 알아야 할 부분은 바로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의 구분이다. 이 두 집단은 얼핏 보기에 반미라는 교집합을 가지고 있어 같은 세력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차이가 크다. 전자는 아랍 민족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세속적인 민족주의인 반면 후자는 이슬람 종교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범 이슬람주의이기 때문이다. 시리아에 집권했었고, 또 지금도 집권하고 있는 세력은 아랍 민족주의 세력으로 바로 바트당이다. 아사드 일가 자체가 시리아에서 소수 종교인 시아파, 그 중에서도 더 소수인 알라위파이기에 그들은 종교적 정체성을 통해 시리아를 통치하기엔 다수인 수니파가 가만히 있을리가 없었고 그 대신 세속주의적 민족주의를 선택한 것이었다.


당연히 다수인 수니파 국민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아사드 일가의 통치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대표적인 게 무슬림 형제단이 일으킨 하마 봉기였다. 이 사건은 잔혹하게 진압됨에 따라 시리아 정부의 더욱 더 철저한 세속주의 정책으로 돌아왔고 그렇게 하페즈 알 아사드, 즉 아버지 아사드 시기 동안에는 종교적 정체성을 둘러싼 대립이 잠잠했다. 하지만 아들 아사드, 즉 바샤르 알 아사드 시기에 가서는 대분규가 터지게 되는데 이는 아사드 정권이 진행해온 경제 개방 정책이 미국의 악의 축 지정과 이란과의 경제 사업을 둘러싼 불화로 커진 부분도 있다. 2011년 아랍의 봄이 터진 이유도 경제적인 빈곤은 쌓여가는데 비해 SNS를 비롯한 온라인 소통망이 아랍 전역에 보급된 탓도 있었다.

애초에 아랍의 봄 자체의 문제이기도 하나 2011년 시리아 반정부 시위의 총체적인 문제는 중동의 복잡한 정세로 인해 외부 개입이 이뤄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나선 것은 터키였다. 그들은 쿠르드족이 이 기회에 독립 국가를 세우는 것은 막아야만 하기 때문에 초기에는 자유시리아군을, 후기에는 알 누스라 전선을 지원하며 시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자국의 안전을 보장하고자 발 벗고 나섰다. 뒤를 이어 나선 것은 사우디와 카타르였다. 그들 역시 과거 1980년대 소련군에 맞서던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을 후원했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지하디스트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배후였다. 실제로 시리아 반정부 시위가 내전으로 번져가는 시기에 레바논 국경을 통해 암시장으로 시리아 국내에 무기가 대량으로 유입되었었다.


그 다음이 바로 미국과 유럽이었다. 그들은 시리아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강하게 나왔었다. 그러면서 내전 초기 자유시리아군과 일부 "온건한" 반군을 후원했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자유시리아군은 통일된 조직이 아니었기에 지역 토착 조직들과 지하디스트들이 들어왔고 그들 또한 아사드의 정부군 못지 않게 전쟁 범죄를 저질러온 행각이 밝혀지며 터키를 제외한 대부분의 서구세계는 시리아 반군 문제에 발을 빼게 되었다. 시리아 내전 기간 동안 미국 CIA와 국방부는 "온건한" 반군을 대상으로 무기와 훈련 등 프로그램 지원에 15억 달러 이상을 지출했는데 결과적으로 대실패했고 반군의 주도권은 온건한 세속주의자들이 아닌 알카에다와 연계된 알 누스라 전선 같은 이슬람 과격분자 반군들이 가져가 버리게 되었다.


이렇게 시리아 내전은 춘추 전국 시대마냥 대혼란에 빠져들었고 여기에 위기감을 느낀 국가들이 있었으니 바로 러시아와 이란이었다. 특히나 러시아에게는 구 소련 시절 해외에 설치된 항구이자 부동항으로써 지중해로 나가는 관문 중 하나인 타르투스 군항이 시리아에 있기에 만약 시리아에 반정부 세력이 집권한다면 좋을 게 없었다. 거기에 더해 타르투스 군항은 러시아가 해외에서 운용하고 있는 유일한 해군 기지다. 그 외 이유로는 러시아 남부에서 활동 중인 체첸 반군의 후신 "캅카스 에미레이트"라는 테러단체가 IS에 충성을 맹세하고 직접적인 교류가 확인되었기에 자국 내로 이슬람 극단주의 확산을 사전에 차단할 필요성이 생겼다는 것도 있었고.


그리하여 러시아는 항공 지원을 시작으로 전투 병력을 시리아에 파견했고 드보르니코프 장군을 중심으로 오합지졸이던 시리아 정부군을 재편성 시켰다. 드보르니코프 장군의 전술은 말 그대로 초토화 전술로써 병원이나 학교 같은 민간 시설까지 폭격 대상에 삼아 저항 의지를 분쇄하는 것이었다. 다만 이를 비난하기에는 뭣한게 시리아 내전에서 반군은 민간 시설을 방패로 삼아 미디어 전쟁을 펼치고 있었는데다가 그들 역시 2013년 5월 6일 유엔 독립조사위원회의 카를라 델폰테 위원의 주장에 따르면 화학무기인 사린가스를 사용했다는 의혹이 있다고 한다.

화학무기 문제를 자세히 살펴보자면 시리아 내전에서 독가스를 본격적으로 처음 언급한 것은 오바마 대통령이었다. 그는 시리아 정부군이 독가스를  쓰면 개입하겠다고 선언했는데 때마침 2012년 말 자유시리아군에서 정부군이 독가스를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시리아 내전에서의 독가스 논쟁의 시초였다. 2013년 8월 두마 독가스 사태에서 구호대원들이 방호복 없이 사린가스 피해자를 구조했다. 이들은 이상 증세가 아무것도 없었다. 시리아 정부 측은 결백을 주장하며 화학무기금지기구(OPCW)를 초청하였고 반군은 1,500명 피해자, 시리아 인권관측소는 500여명 피해자설을 주장했는데 말이 맞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오바마는 시리아에 개입하지 않고 화학무기 폐기 주장 선에서 그쳤다.

그리고 내전 초반에 화학무기가 보관된 알레포 무기고와 화학공장이 털렸는데 보관 중인 염소가스 패키지들이 행방불명 되었다. 반군은 스스로 화학무기를 쓸 능력이 없다고 주장하였으나 2017년 알 누스라 전선 철수 이후 주둔지에서 염소가스 봄베들이 땅에 묻힌 걸로 확인되었다. 2017년 2월 칸 셰이쿤 Su-22 공습 당시 통상폭탄 사이에 사린가스가 투하되었다고 오전 6시 사건 당시 영상이 공개되었다. 하얀연기가 살포되고 있는데 사린가스는 무색무취, 마찬가지로 보호장비 없이 감기 마스크만 쓴 구호대원들이 지휘하고 있었다. 아내를 잃었다는 피해자는 알고 보니 알 누스라 전선의 지지자로 드러났으며 이스탄불에서 터키 대통령 에르도안을 예방하기까지 했다.

2018년 4월 7일 항복협상을 두고 두마에 화학무기가 투하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때도 보호장비 없이 구출했지만 피해자 상태가 사린가스 중독이라며 서구는 비난했었다. 분노한 시리아 정부는 직접 OPCW를 급히 초청해 조사했다. 조사 결과 피해자의 시신에서 신경작용제는 발견되지 않았고 서구 언론의 보도가 거짓이었다고 밝혀졌다. 애초에 독가스 이슈는 시리아의 각 세력이 심심하면 터트리는 것이었다. 정부군 측에서 반군이 염소가스를 사용했다고 하며 피해자가 눈을 까뒤집고 과산소 치료를 받는 영상을 가끔 공개한 적이 있었고 쿠르드족도 터키군이 사용했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거기에 더해 시리아에서 사용된 독가스 중 2015년 사우디에서 반출된 것도 있었다.

란의 경우에도 사실 생각 외로 시리아와 많이 삐그덕 댄 경력이 있었다. 이란의 최고 지도자였던 호메이니는 생전에 시리아 대통령 하페즈 알 아사드의 이란 방문을 무조건적으로 막아왔었고 헤즈볼라 간부 암살 사건 당시 시리아가 이란의 공동 수사 요청을 거부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애당초 시리아는 비록 알라위파가 고위직에서 득세하는 국가이긴 하지만 엄연히 정책에 있어서는 세속주의적인 정교 분리 정책을 펼치는 국가이고 이란은 시아파 원리주의니 두 국가의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그럼에도 이란이 시리아를 도와준 이유는 딱 하나인데 아랍에서 수니파 영향력이 극대화 되거나 시리아가 파탄남에 따라 그 빈자리에 이스라엘군이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만은 막기 위해서다. 만약 아사드 정권이 무너진다면 시리아 내 시아파는 수니파들에 의해 보복 학살이 벌어질 게 뻔한 상황이다.


따라서 이란은 시리아에 IS 토벌을 명목으로 지원군을 파견하고 시아파 민병대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에 따라 시리아 내전 초기 방관하던 이스라엘도 시리아 내에 이란의 영향력이 커지는 걸 막기 위해 공습을 주기적으로 때렸다. 여하튼 이란이 지원한 시아파 민병대들은 아사드 정권 유지의 버팀목이 되었으며 오합지졸이었던 시리아군의 병력을 채워나갔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감과 함께 이들은 동시에 아사드 정권의 새로운 불안요소로 자리잡았다. 왜냐면 이란과 시아파 민병대가 전쟁 과정에서 역할이 컸는지라 당연하게도 이들 탓에 시리아가 이란에 더욱 더 의존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것이 시리아 내전을 둘러싼 각국의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시리아 국내, 그 중에서도 반정부 세력의 입장은 어떨까? 아마 시리아 반정부 운동의 초기 활동 그룹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자유시리아군일 것이다. 이들은 시리아군 탈영병 출신들로 이뤄졌으며 터키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으나 문제는 조직 하부 그룹을 통제할 역량이 없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유시리아군은 아사드 타도를 위한 싸움의 이름 아래 다양한 무장조직들이 모인 단체인 것이다. 당연히 앞서 말했던 것처럼 지하디스트나 지역 토호 조직들이 중앙보다 힘이 쎈 구조였다. 시신의 신체를 절단하고 심장을 먹어 반군의 민낯을 보여준 조직인 파루크 여단도 자유시리아군의 일부 출신이다.


두번째는 IS와 알 누스라 전선인데 이들은 아예 대놓고 신정 국가 수립이 목표시다. 아사드 정권이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시위를 달래기 위해 정치범을 석방했을 때 지하디스트들도 많이 감옥에서 나와 반정부 그룹에 합류하던 것이 시초로 이들은 매우 극단적인 종교색채를 가지고 있으며 시리아 도심에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일련의 대규모 폭탄테러의 배후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이 그랬던 것처럼 시리아에서도 리비아, 체첸, 아프간, 이라크 등지에서 온 이슬람 용병들이 활약했다. 알 누스라 전선에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으며 이들은 아예 독자적인 여단급 편제까지 다룰 정도였다. 재미있는 건 반군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장비가 좋은데 이는 사우디와 카타르 등 걸프만 국가들에서 시리아 정부를 붕괴시키려는 의도로 이들에게 지원해주기 때문이다.


더 들어가면 복잡해지니 여기까지 설명하겠다. 그래서 결론으로 들어가 시리아 내전으로 가장 이득을 본 국가가 누구인가 하면 바로 러시아다. 자국 내로 체첸과 다케스탄의 지하디스트들이 들어오기 전에 시리아에서 일망타진함과 동시에 타르투스 군항을 지켜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큰 경험이 된 항공 초토화 전술도 익혔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러시아가 가장 이득을 본 부분은 유럽 내부 문제였다. 시리아 내전이 격화됨에 따라, 특히 드보르니코프 장군이 초토화 전술을 사용함에 따라 난민들은 시리아를 떠나 유럽으로 넘어갔고 이들로 인해 사회 문제와 갈등은 더욱 심각해졌다. 이러한 결과는 장기적으로 유럽 내 우익 포퓰리즘의 득세로 나타났다.


시리아 내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단순한 독재vs민주주의 프레임은 매우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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