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이 복잡계인 것처럼 세상을 그대로 복제한 주식 시장 역시 복잡계입니다. 도무지 흐름을 종잡을 수가 없죠. 그런데 영화 특히 사람들이 즐겨 보는 영화는 사실 복잡계가 아닙니다. 영화는 현실의 복제가 절대 아닌 이유는 인과관계와 필연성을 관객들이 반드시 원하고 대부분의 영화는 관객의 기대를 만족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잡계 세상을 복제한 영화가 있다면 그 영화는 어떤 모습일까요? 그 질문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해답을 제시하는 이가 컬트의 황제, 이른바 제 멋대로 찍는 감독 데이비드 린치입니다. 국내에도 출간된 그의 전기 ‘꿈의 방’에 보면 2006년에 자신이 찍은 영화 ‘인랜드 엠파이어’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게는 이 영화 찍을 때 완성된 대본이 없었습니다. 그날 분을 전날 써서 촬영하고 그 다음날 분을 새로 쓰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니 저도 영화의 결론을 몰랐죠. 제작사(프랑스 카날 스튜디오)는 제게 모든 것을 맡기고 제가 알아서 만들라고 했습니다.”
영화 전문 기자가 이 영화 한 번 보고 평론을 쓸 수 있다면 그는 천재 거나 거짓말쟁이 거나 둥 중에 하나라고 한 영화 역사 최고의 문제작입니다. 우리나라 극장에서 5000명 정도가 봤는데 대부분 영화광들이었지만 영화가 진행되는 3시간 동안 졸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하는 전설 같은 루머가 나도는 영화죠. 뚜렷한 내러티브 없이, 관객을 몰입시킬 어떤 미끼 하나 없이 영상과 음악만으로 3시간을 깨어 있게 만든다? 그건 영화감독이 아니라 신의 능력입니다. 오죽하면 린치 감독이 당시 명상에 빠져 있어서 명상용으로 영화를 만들었을 거라는 이야기가 나돌까요.
개다가 이 영화는 관객에게 낯섦을 최대한 선사하려고 소니 디지털 캠코더로 찍었습니다. 도무지 극영화 같지가 않지요. 인공조명을 통한 이야기의 수위 조절, 풍부한 색채감을 잃은 대신 자유로움과 유연성 있는 시각이라는 장점을 얻었죠.
그래도 대충의 줄거리라도 말씀드리면 한 여배우(결혼 이야기에서 스칼렛 요한슨의 변호사로 나온 로라 던이 맡았죠. 얼마 전에 주라기 공원 도미니온에서 그녀의 최근 모습을 보았는데 많이 늙었더라고요. 그녀는 린치 감독이 아끼는 배우입니다. ‘광란의 사랑’에서도 주연을 맡았어죠.)가 영화의 주연을 맡아 기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영화의 감독 제레미 아이언스는 영화의 비밀을 들려줍니다. 이 영화가 실은 폴란드 영화의 리메이크지만 폴란드 영화에서는 살인 사건이 발생해 영화 촬영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거죠. 이 이야기를 영화 1시간쯤 지나서 해주는 감독의 친절함. 관객들은 갑자기 어떤 장면에서는 배우들이 바뀌어 러시아어(폴란드어가 러시아어와 많이 비슷하게 들리더군요. 역시 슬라브족은 비슷합니다,)로 대사를 주고받는데 “도대체 이 게 뭐지”라는 궁금증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화는 영화와 영화 속 영화 2개가 진행되고 있었죠. 원조 폴란드 영화 그것을 리메이크한 미국 영화. 그리고 이들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일상. 중요한 건 이 세 가지를 구분해서 관객에게 보여주는 어떤 노력도 감독은 하지 않는다는 거죠.
게다가 영화 시작 장면에서는 꺼진 TV 보고 우는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역시 설명이 없죠. 사이사이에는 토끼 탈을 쓴 가족이 나와 무의미한 대사를 주고받으며 관객들이 낄낄 웃는 장면이 삽입됩니다. 한 영화에 모두 5개의 이야기가 전혀 연결되지 않고 랜덤 하게 알아서 돌아가는 기상천외한 영화입니다. 관객들은 완전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꼴이죠. “도대체 영화 출구가 어디야?”(사실 이 말은 ‘영화 끝나는 시간이 언제야?’의 동의어입니다.)라고 감독에게 묻는데 감독은 자기도 모른다고 답합니다. 미국 같이 흉기가 소지된 나라에서라면 이 영화 보다가 열받아서 감독과 닮은 사람을 총으로 쏘는 엽기적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철학하는 이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안간힘을 씁니다. 기억에 관한 영화일까? 미래에 관한 영화일까?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무의식 세계의 반영일까? 이 세상에 인과관계는 없다는 걸 말해주려고 하는 걸까? 아냐 결국은 진짜와 가짜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 거야. 감독은 이렇게 답할 겁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이 영화는 극장 개봉할 때 린치 영화 마니아 외에는 다른 관객을 끌어 모을 어떤 구심점이 없었어요 그래서 내건 것이 “이것이 21세기 영화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 영화가 시대를 앞서가는 점이 분명 있어요. 아마 인공지능이 대본을 쓰고 사람이 그 대본을 갖고 영화를 찍으면 이런 영화가 나올 겁니다. 영화란 예술은 공감과 하모니의 총체작이에요. 감독과 배우 스태프가 하나의 생각으로 공감대를 형성할 때 좋은 영화는 탄생합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처럼 모든 걸 혼자 다 알아서 하고 감정을 갖춘 인간들과 소통을 하기 힘든 상황에서 영화를 찍는다면 이런 영화가 나올 수밖에 없겠죠.
인간은 어둠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관객을 수시로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앞이 안 보이고 뒤도 안 보이는 관객들은 묻죠 “여보세요? 거기 누구세요?” 그러면 린치가 말합니다. “나도 모릅니다.” 관객들은 이 영화 보고 “말이 안 되는 영화‘라는 말을 하고 싶을 텐데 린치 감독은 이 말만큼은 분명한 대답을 해줄 것 같습니다. 그게 바로 내가 만들고 싶었던 영화다.
지금부터 제 나름의 해석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영화라는 환상은 완벽을 추구하죠. 그러나 현실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화도 완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린치 감독의 철학입니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은 이 영화에 완벽한 게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음악입니다. 린치 감독이 꿈의 방에서도 이 영화의 음악에 대해서 아주 만족해했습니다. 그중에 몇 곡은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죠. 이 영화를 찍으며 폴란드의 전위음악가 크시슈토프 펜더레츠키를 알게 된 것은 큰 행운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추천하는 명장면 역시 음악 관련 장면입니다. 곡마단 서커스단 수준의 연기를 보여주는 연기자들이 주인공 앞에서 리틀 에바의 ‘로코모션’에 맞춰 율동을 추다 갑자기 사라져요. 마치 오래된 LP를 재생할 때 판이 튀는 것처럼 영화도 튑니다. 가만 보면 우리 인생은 그 어떤 소음도 없는 완벽한 OST가 아닌 듯해요. 악몽 같은 일이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고 사람 일 절대 알 수 없다는 말을 해야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철학과 신학은 보이는 현상 세계와 보이지 않는 본질의 두 세계가 있어 서로 영향을 주며 변화해 간다고 말해 왔습니다. 린치 감독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눈에 보이는 세계만 쫓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즉 영화에서 직접 카메라가 담아내지 않는) 다른 세계를 상상하라는 요구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양자역학적으로도 설명될 수 있죠. 양자 중첩까지 생각하게 되네요. 눈에 보이는 양자 한쪽과 그 대칭을 이루는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는 양자의 다른 한쪽. 영화를 너머 화면 이외의 다른 것을 상상하라!
린치가 영화에 써먹은 ‘로코모션’ 영상을 오랜만에 유튜브에서 감상하다 보니 그 방법이 다소 거칠어서 그렇지 린치 감독이 오히려 현실 세계를 더 잘 반영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만든 할리우드 영화들보다 린치 감독의 이해 못 할 영화가 복잡하게 꼬인 카오스적 인생을 더 잘 더 많이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