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지마 아쓰시中島敦의 <이릉李陵> (1943년 病死 직후 발표) 을 다시 읽었다. 흉노에 포로로 잡힌 이릉과 소무蘇武의 인생행로가 대비를 이루고, 이릉을 변호하다가 궁형을 당하고 <사기>를 쓴 사마천의 에피소드가 병행해서 제시된다. 무제武帝 치하 한 제국의 법은 엄했다. 벼슬아치들과 그 친족들은 모두 언제나 황제가 내리는 칼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흉노를 치기 위해 출정한 이릉은 막북漠北에서 조정으로 사자를 보내 "전선 이상 무, 사기는 매우 왕성"이라고 보고한다. 그 보고를 전한 진보락陳步樂은, 잘못된 보고를 전했다는 이유로, 이릉의 군대가 패해 전멸했다고 알려졌을 때, 자결해야 했다. 이듬해 이릉이 포로로 잡혀 항복했다는 보고가 조정에 도착한다. 무제는 격노하여 중신을 모아 이릉과 그 친족의 처분을 결정하고자 한다. 이릉이 출정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를 칭송하고 축복했던 신하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반역자로 매도할 수 있었다. 칭송한 것은 그의 떳떳함이고 매도하는 것은 그의 죄이므로. 용감한 장수의 떳떳한 행로를 칭송하고, 패한 장수의 용서할 수 없는 반역, 즉 그의 항복을 매도하고 징치하는 것, 그것이 사직의 신하의 본분이었다. 한 제국의 기강은 그런 신하들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신하들의 표변에는 표변하는 세상에 뒤쳐지지 않고 천변만화하는 법의 지엄함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제의 기색을 살피고, 자신과 처자식의 안위를 도모하려는 인간의 비겁함이, 사실상 분리불가능하게 뒤섞여있었던 점에, 이 중신회의의 곤란함이, 난제가 있었다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 난제를 풀 만큼의 지혜가 없는 자는 거북함과 역겨움과 비위 상함을 견딜 수 없는데, 어리석은 행동으로 자신을 망치지 않기를 어떻게 바랄 수 있었겠는가. 바로 그러한 사람, 일개 하급 문신의 한 사람인 사마천은 감히홀로 이릉을 변호한다. 하급 문관이 불손하게 반역자를 감쌌다는 이유로 그는 궁형을 받는다. 나카지마 아쓰시는 이렇게 쓴다.
당시의 태사령 사마천은 하찮은 일개 문관에 지나지 않았다. 두뇌가 명석한 것은 확실해도 자기 두뇌를 과신한, 인간관계가 나쁜 남자, 논쟁에는 결코 남에게 지지 않는 남자, 기껏해야 고집불통에 오만하고 괴팍한 사람으로만 알려졌다. 그가 부형腐刑을 당했다고 해서 그리 놀라는 사람도 없었다.
이는 루쉰의 다음과 같은 평가를 상기하게 한다.
무제 시대 문인으로 부賦는 사마상여를 따를 자가 없고, 문文은 사마천을 따를 자가 없는데, 한 사람은 적막했고 다른 한 사람은 형벌을 받았다. 무릇, 문文에 뛰어난 자는 항상 성정이 사나워서(걸오: 桀驁), 군주의 뜻을 받들고자 하지 않으니,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만나 뜻을 펴는데 있어서 평범한 문인에 미치지 못한다.
또한, 나카지마 아쓰시는, 후일 흉노의 포로가 되어 있던 이릉이, 북방에서 사마천의 궁형 소식을 들었을 때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릉은 그다지 고맙다거나 불쌍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사마천과는 서로 안면이 있어 인사를 한 적은 있어도 특별히 교제했다고 할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쓸데없이 이론만 떠들어대는 사람이라는 기억만 남아 있었다. 게다가 현재의 이릉은 자신 하나의 괴로움과 싸우는 것도 힘들어 타인의 불행을 실감할 여유가 없었다. 사마천의 변호가 쓸데없는 배려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미안하다는 감정을 느끼지도 않았다.
"쓸데없이 이론만 떠들어대는 사람." 사마천의 재앙은 말 잘하고, 논쟁을 좋아하고, 지는 걸 싫어하는 그 자신이 스스로 초래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자업자득, 수원수구랴. 나카지마가 상상력으로 그려내는 궁형 이후 사마천의 심경이 이채롭다.
분노보다는 먼저 놀라움 같은 것을 느꼈다. 그는 참형을 당하는 것, 죽임을 당하는 것에 대해서라면 평소 각오는 했다. 형을 받아 죽는 자신의 모습이라면 상상해볼 수도 있었으며, 무제의 심기를 거스르며 이릉을 두둔할 때도 자칫하면 사형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자신에게도 있었다. 그런데 형벌도 그 많은 가운데 하필이면 가장 추하고 천한 궁형일 줄이야! (...) 그는 늘 인간에게는 각각 그 인간에게 어울리는 사건이 일어난다고 하는 일종의 확신 같은 것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오랫동안 역사를 다루면서 자연히 키워진 생각이었다. 같은 역경 속에서도 강개한 선비에게는 격하고 통렬한 괴로움이, 연약한 하인에게는 느슨하고 구질구질한 괴로움이 찾아온다는 식이었다. (...) 사마천은 자신을 남자라고 믿었다. 문필의 관리이기는 해도 당대의 어떤 무인보다도 남자라고 확신했다. (...)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지론에 따라, 수레에 사지를 찢기는 형벌이라면 그게 바로 자신이 갈 길이라고생각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이 쉰에 가까운 몸으로 이런 치욕을 당할 줄이야!
죽음은 각오했으나 궁형은 의외였다는 것, 그 의외성이 사마천의 살아남은 영혼에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수치를 불러일으킨다. 죽음을 각오하고 전장으로 향하여 다양한 형태의 상처와 수치를 안고 살아남은 사나이들이 열도에 득시글거렸을 1942년 즈음, 이 문장들은 검은 잉크로 쓰인 단순한 글줄을 넘어선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역사가로서의 냉정한 이지理知는 사마천으로 하여금 무제에게 분노와 원한을 품는 것을 금지한다. "무어라 해도, 무제는 대군주이다.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이 군주가 있는 한 한나라의 천하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역사는 엄한 것이다. 그리고 무제는 역사를 움직이는 자 가운데서도 가장 높고 가장 중심에 있는 천자다. 그 천자가 자신에게 형벌을 내린 것이다. 그 천자에 비하면 자신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는 것, 그것이 역사의 냉엄한 진실이다. 무제의 입장에서, 사마천을 주살하든 궁형을 내리든, 길가의 벌레를 짓밟는 소의 발걸음과 마찬가지인,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는 일이다. 그런 한에서, 그것을 명확히 인식하는 한에서, 사마천은 역사가일 수 있었고 앞으로도 역사가일 수 있을 것이었다. 사마천이 감히 무제에게 분노와 원한을 품는 것은 "하늘이 만든 질풍, 폭우, 벽력"을 원망하는 것만큼이나 부조리하고 어리석은 일, 아니 그 이상으로, 역사가로서 자격을 상실하기에 충분한 자기모순적인 우행이었다. 이런 교착이 그의 비분강개를 한층 더 어둡고 끔찍한 골짜기 아래쪽으로 밀어넣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사마천은 결국 살아남았는데, 순전히 <사기>를 완성하고 오래 전에 죽은 아버지와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였다. 천자에 대한 신하의 충성이나 사랑 때문이 아니었고, 한나라에 대한 애정 때문이 아니었으며, 죽은 아버지와의 약속,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사기>라는 텍스트 자체를 불후의 명작으로 완성하겠다는 병적인 집착이 그를 살게했다. 나카지마 아쓰시는, 그 자신도 한 사람의 소설 쓰는 근대 예술가로서, 이러한 사마천의 내면이 (예를 들어) 근대의 '거장의식' 등과 얼마나 다른지 공들여 설명한다.
지금 극히 참담한 고통을 겪은 그의 마음 속에서 아직 수사修史의 일에 대한 생각을 끊이지 않게 한 것은 부친의 말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 일 자체였다. 일의 매력이라거나 일에 대한 열정이라고 하는 즐거운 형태의 것은 아니다. 수사라고 하는 사명의 자각은 틀림없지만, 더욱 의기양양하게 자기를 자부하는 자각은 아니다. 매우 자아가 강한 사람이었으나, 이번 일로 자신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자인가를 절실히 생각하게 되었다. 이상이니 포부니 하며 뻐겨봤자 어차피 나는 소에 짓밟히는 길가의 벌레에 지나지 않는다. 我는 비참하게 밟혔으나 수사라는 일의 의의는 의심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천박한 몸이 되어 자긍도 자신도 잃어버린 후, 그래도 아직 세상에 살며 이 일에 종사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즐거울 수 없었다. 그것은 아무리 번거로워도 최후까지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은 인간들처럼 숙명적인 인연에 가까운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이 일 때문에 자살을 할 수가 없다. 그것도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더욱 육체적인 이 일과의 연결에 의해서인 것이다.
"我는 비참하게 밟혔으나 수사修史라는 일의 의의는 의심할 수 없었다." <사기>를 쓴 것이 사마천이라는 한 역사가의 손이 아니라, 흡사 역사 그 자체, 수사라는 계보 그 자체라는 것. 미미한 한 인간의 역할은, 단지 그의 존재를 빌려주는 것, 아니 차라리 바치는 것일 뿐이다. 그래야 한다는 "의무감"만이라면 결코 "극히 참담한 고통"을 통과할 수는 없는 법이다. 벌어진 사태는, 고통이 오히려 <사기> 저술을 향한 그의 광기를 불사르는 땔감이 되었던 것처럼 보이는, 극히 "육체적인" 과정인 듯하다. 사마천이 <사기>와 맺은 관계는 나카지마에 의해, 인상적이게도, "아무리 번거로워도 최후까지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은 인간들처럼 숙명적인 인연에 가까운 것"으로 비유된다. 그런 인연이란 무엇이며, 단절을 금지하는 것은 누구이며, 최후란 무엇인가, 또 번거로움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 하나하나 뚜렷한 질문이 될 수 있다. 이 질문들은 공통적으로, 시간 속에서 얼어붙거나 부패하는 일체의 인간사, 다시 말해 인간사의 일상다반사인 배반, 그것을 넘어서는 충실성의 테마를 문제 삼는다. 이 테마는 그대로 소설 전체의 중심 테마이기도 하다. 이릉과 소군의 극명히 대비되는 삶의 궤적 역시 이 테마를 둘러싸고 그려질 것이다.
포로가 된 이릉은 처음에 선우單于의 목을 노린다. 그러나 설령 그가 선우를 베더라도 한나라로 도주할 방법이 없었다. 뚜렷한 방도가 없는 상황에서 선우를 살해하는 건 동귀어진과 다르지 않았는데, 이릉은 살아서 투항의 치욕을 씻고 명예를 회복할 좀 더 완벽한 기회를 기다리기 위해, 자살하지도 않고, 섣불리 행동하지도 않았다. "이릉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기회의 도래를 끈기 있게 기다렸다." 그러나 조정에서 그를 매도한 신하들의 추상 같은 떳떳함에 일신과 처자식을 보전하려는 인간의 비겁함이, 분리불가능한 형태로 섞여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살아서 치욕을 씻겠다는 대장부 이릉의 뜻에는, 아이러니하지만 삶을 사랑하여 지조를 가벼이 여기는 방자함이, 인간의 유한한 힘으로는 분리해서 제거할 수 없는 형태로 섞여있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살아서 훗날을 도모하겠다는 결정이 과연 도의를 위해 바쳐진 삶의 합리적인 보존을 이룬 것인지, 아니면 아까워서 집착하고 차마 버리지 못한 알량한 삶을 구차하게 연장한 것인지 하는 여부는, 소급적으로, 그리고 주체적으로 간단間斷없이 재확인되어야 하는 것이지, 군자보구십년불만 (君子報仇十年不晚) 같은 다짐에 의해 미리 결정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1].
애초의 맹세가 부패하고 처음의 결정에 의해 살아남은 목숨이 어떤 뜻과도, 의지와도 관련을 잃고 구차해지는 것, 나아가 처음부터 그 어떤 맹세도, 뜻도 없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현실 역시 언제나 가능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자결도 하지 않고, 선우의 목을 벨 기회만 노리면서도 실행은 하지 않으면서, 보다 더 지혜롭고 떳떳한 길을 추구하느라 흉노족 사이에서 생활하는 삶을 하루하루 늘려가는 이릉의 꾸밈없는, 장렬한 지기志気를 헤아릴 때, 이 점을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흉노의 지배자 선우는 이릉을 성대하게 대접했다. 가끔 이릉을 불러 군사 전략상의 조언을 구했다. 흉노가 한나라 이외의 오랑캐와 싸울 때 이릉은 기꺼이 조언을 제공했다. 하지만 한나라와 싸울 때 선우가 조언을 구하자 이릉은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고, 침묵을 지켰다. 또한 한나라와의 전투에는 동행도 거부했다. 선우는 그럼에도 전과 다름없이 이릉을 우대했다. 선우의 이런 대범함은 이릉에게 좋은 인상을 줬다.
흉노 생활이, 한나라와 다른 세계관을 이릉에게 보여주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릉이 후대를 받은 것은 그가 강한 자의 자손이며, 또 그 자신도 강했기 때문이다. 음식을 나눌 때도 강자가 맛있는 부분을 먹고 노약자에게 나머지를 주는 것이 흉노의 풍습이었다. 여기서는 강한 자가 모욕을 당하는 일이 결코 없었다." 반대로 한나라에서 강자는 강자라는 이유로 시기와 참소의 대상이 되었으며, 무수한 치욕과 때로는 죽음을 감수해야 했다. 한나라에서 가장 강하고 용감한 군인이자 훌륭한 장수였음에도 한직을 떠돌다가 일개 군리의 업신여김에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자결해버린 이릉의 조부 이광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이릉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참으로 천하고 우습게만 비치던 호지의 풍속이, 이 땅의 실제 풍토와 기후 등을 배경으로 생각해보면 결코 천하지도 불합리하지도 않다는 것을 이릉은 점차 이해하게 되었다. (...) 한인의 풍습을 끝내 지키려고 한다면, 호지의 자연 속 생활은 하루도 지속할 수가 없다. 이릉은 지난날 선대 차제후 선우가 한 말을 기억했다. 선우는 한나라 사람이 입버릇처럼 자기 나라는 예의의 나라이며 흉노의 행위는 금수에 가깝다고 말하는 것을 꾸짖었다. 한인이 말하는 예의라는 것은 무엇인가. 추한 것을 표면만 아름답게 꾸미는 허식을 말함이 아닌가. 이익을 취하고 사람을 질투하는 것, 한인과 호인 중어느 쪽이 심한가. 색에 빠지고 재를 탐하는 것, 또 어느 쪽이 심한가. 껍데기를 벗기면 필경 아무런 차이도 없을 터. 단지 한인은 이것을 속임수로 장식하는 것을 알고 우리는 모를 뿐이다.
이릉은 선우의 큰아들 좌현왕과도 친해졌다. 좌현왕은 강자에 대한 순수한 동경과 존경을 이릉에게 아낌없이 보여줬다. 두 사람은 함께 사냥을 다니기도 했고, 늑대들에게 함께 쫓기며 사선을 넘나들기도 했다. 이릉은 좌현왕에게도 정이 든다. 그런데 한나라에서는, 투항한 이릉이 흉노를 위해 한나라 군대를 격파할 전략을 제공하고 있다는 소문이 돈다. 무제는 그 소식을 듣고 예전에 한 번 옥고를 치르고 목숨만은 부지한 채 지내던 이릉의 일족을 모조리 처형했다. 이릉의 노모, 처자식, 동생 등이 모두 이때 목숨을 잃었다. 그 소식을 듣고 이릉은 분노에 치를 떤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적극적으로 흉노를 위해 봉사하기 시작한다. 선우의 딸과 혼인한다. 우교왕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차마 한나라에 칼 끝을 돌리지는 못했다.
이릉은 이렇게 완전한 흉노 사람이 되지도 못하고, 한 제국에 대한 절개를 철저히 지키지도 못했다. 반면 이릉보다 1년 먼저 흉노에 억류된 소무(이릉과는 20년 지기다)의 궤적은 이릉과 전혀 달랐다. 소무는 흉노에게 붙잡힐 때 자기 칼로 자기 가슴을 찔러 죽으려 했다. 치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흉노 의사가 그를 살려낸다. 소무의 몸이 회복되자 선우는 그를 회유하려 한다. 그러나 소무는 불 같은 호통으로 선우의 사자를 돌려보냈다. 결국 그의 신병은 바이칼호 근처로 인계되어 그곳에서 유폐 생활을 강요당한다. 그렇게 그는 20년 가까운 세월을 그곳에서 절개를 지키며 살아갔다. 그 세월 동안 이릉이 흉노 속에 스며들어 적응한 것과 크게 대비되는 삶이었다. 이릉은 소무가 무서웠다. 소무의 존재는 말이 없어도 자신을 꾸짖는 듯했던 것이다. 이릉이 생각하면 할수록 흉노의 회유를 물리치며 극도로 빈한하고 무의미한 삶을 이어나가는 소무의 세월에는 모종의 귀기조차 어려있어서 불가사의하면서도 두려운 것이었다.
상상을 초월한 고생, 결핍, 혹한, 고독을 (게다가 앞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긴 시간을) 평온히 웃어넘기는 것이 고집이라고 한다면, 이 고집이야말로 실로 섬뜩하지만 장대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 게다가 이 남자는 자기의 행위가 한나라까지 알려지는 것을 기대하고 있지 않다. 자신이 다시 한에 받아들여지는 것은 물론, 자신이 이런 무인지지에서 곤궁과 싸우고 있는 것을 한나라는커녕 흉노의 선우에게도 전해줄 인간이 생길 것을 기대하고 있지도 않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혼자 죽어갈 것이 틀림없는 최후의 날에 스스로 되돌아보아 마지막까지 운명을 일소에 부칠 수 있었던 데 만족하고 죽는다는 것이다. 누구 하나 자신의 사적을 알아주지 않아도 관계 없다는 것이다.
섬뜩하지만 장대한 충성. 섬뜩하지만 장대한 사랑. 연인에게 영원히 알려지지 않아도, 또 세상사람 그 누구도 자신의 절조를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의 절조 때문에 극단적인 고통을 당하게 되더라도, 그 일체의 무의미와 고통을 간단히 웃어넘길 수 있는, 그런 충성, 그런 사랑.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과 대단히 유사한 곤경을 통과하고 있는 자기 20년 지기가 이런 무시무시한 사람이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고 불편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릉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흉노에게 항복한 자신의 행위가 바르다고 하는 것은 아니나, 자기가 고국에 바친 것과 그에 대해 고국이 자기에게 보답한 바를 생각한다면, 아무리 무정한 비판자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을 인정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여기 한 남자가 있어, 아무리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되는 사정이 앞에 있어도 단연코 그런 생각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 남자에게는 기아도 추위도, 고독의 괴로움이나 조국의 냉담도, 자기의 고절은 결국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라는 거의 확정적인 사실까지도 평생의 절의를 꺾을 정도의 어쩔 수 없는 사정은 아니었다. 소무의 존재는 그에게 숭고한 훈계이기도 하지만 초조한 악몽이기도 했다.
여기서 나카지마가 그리는 이릉이 다소 안이해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릉은 "아무리 무정한 비판자라고 해도" 자신의 사정을 이해해줄 것이라고생각했지만, 한 제국의 천자와 법의 지엄함, 그 무정함은 그렇게 안이하게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이릉이 몰랐을까? 이릉은 억하심정을 지니고 있다. 위청 같은 집안 좋은 대장군들의 경우였다면, 설령 나와 같은 선택을 했더라도 빽이 좋으니 가족이 몰살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내심 억울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추측이 사실에 가까운 것일 수도 있다. 황제와 친인척인 가문의 장수들의 경우 같은 죄를 지어도 처벌이 경미하거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릉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야 한다. 패전하고 천자의 병사를 죽이고 천자의 보급품을 헛되이 빼앗긴, 죽어야 하는 자신이 살아서 흉노에 투항한 것도 모자라, 선우의 장남에게 활쏘기를 가르치고, 선우의 오랑캐 원정에 조언을 주기까지 했는데, 감히 무거운 처벌을 면하고자 바랄 수 있는 것인가. 자신의 잘못 때문에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하고 가문 전체가 몰살 당하게 생겼는데, 스스로는 돌아보지 않고 한나라와 천자를 원망한다는 것이 이치에 맞는 것인가. 위청이나 곽거병이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처벌을 받거나 받지 않는 것이 도대체 자신이 직면한 이 물음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위청이 편법으로 죽음을 면하면 덩달아 자기 잘못이 잘못이 아니게 되는 것인가. 남들이 기강을 어지럽히고 사악함을 방자하게 퍼뜨린다고 해서 자신의 충실성에 대한 의무가 취소되거나, 그 포기가 정당화되는가. 이릉은 소무가 "숭고한 훈계"이자 "초조한 악몽"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천자와 중신들의 입장에서 소무는 일개 군인의 한 사람일 뿐이다. 그들은 소무를 특별히 칭찬할 이유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소무는, 한 제국의 군인이라면, 천자의 녹을 먹은 신하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소무가 자신의 충절 때문에 조정으로부터의 어떤 칭찬이나 인정을 기대했다면 그 자체가 글러먹은 것이라고 간주되었을 것이며, 심지어는 그로 인해 처벌을 받는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닐 터이다. 소무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칭찬이나 인정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절개를 지킨 것이 이를 방증한다. 소무가 제아무리 섬뜩하고 귀기어린 충성과 사랑을 바친들, 그것 때문에 천자가 식사를 못한다거나 악몽을 꾼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천자와 이릉의 차이다.
이릉은 몇 차례에 걸쳐 바이칼호의 소무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눈다. 하루는 가다가 도중에 무제의 붕어를 알게 되었다. 이릉이 이 사실을 소무에게 알렸을 때 소무의 반응이 가관이다.
북해에 이르러 소무에게 이것을 고했을 때, 소무는 남쪽을 향해 통곡했다. 통곡하기를 며칠, 마침내 피를 토하기에 이르렀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릉의 마음은 점차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물론 통곡의 진솔함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순수하고 격한 비탄에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은 지금 한 방울의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 이전에는 단지 소무의 강렬한 고집만 보였지만 이제 그 속에 한나라 땅에 대한 실로 처절하고 순수한 애정이 가득 차 있는 것을 이릉은 비로소 발견했다. 그것은 의라든가 절이라든가 하는 외부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억누르려고 해도 눌러지지 않는, 늘 용출하는 가장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애정이었다. 이릉은 자신과 친우를 구분하는 근본적인 것에 맞닥뜨려, 싫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어두운 회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수수께끼 같은 문단을 읽기 위해 사전에 지적해두어야 할 것은, "진솔함"이란 외부자가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는 연기'의 문제와 동일하다.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연기를 할 때 연기자는 정말 슬퍼하는 것인가 아니면 눈물만 흘리는 것인가? '연기'라는 생각을 하면 우리는 그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연인을 위해 우는 모든 사람의 경우가 저와 다르지 않다. 연기자가 거짓이라면 연인을 위해 우는 자도 거짓이다(그가 스스로 자동적이고 자발적이며 무의식적이라고 느끼는 그 울음은 사실 역사적이고 사회적으로 학습된 코드들의 결과, 무한한 외물의 작용에 의한 필연적인 수동성일뿐이다). 연인을 위해 우는 자가 진실되다면 연기자도 진실될 수 없을 이유가 없다. 따라서 소무의 통곡이 형식적이고 진솔하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애정"의 결과인가 하는 점을 구분하는 (나카지마에 의해 재현된 이릉의) 의식이 보여주는 것은 그저, 내발성内発性에 특권적 의미를 부여하고 집착하고 싶어하는 어떤 정신의 경향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스피노자를 경모하고 애독한 나카지마가 이것이 '관념의 오류'의 일종임을 몰랐을 리는 없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오류를 지적하는 것은 차라리 간단한 일이고, 이런 지적에만 구애된다면 문학은 쓸 수 없다. 핵심적인 사실은, 이릉이 무제의 죽음 앞에 통곡하는 소무를 보며, 어떤 "근본적인" 차이를 느끼고 "어두운 회의"에 빠진 것인데, 이 사실은 그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순간 정확히 무엇이 일어난 것인가? 나카지마의 펜 아래에서 이릉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定式化하는 것이다. 소무는 외발外発이 아니라 내발内発에 의한 진정한 슬픔과 애정을 통곡을 통해 드러냈고 자기는 그걸 보고, 자기 안에는 그런 내발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말했듯이 기껏해야 '관념의 오류'이며 전혀 명석판명한 의식의 활동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이 "어두운 회의"로 귀결되고 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렇다면 그 순간 정확히 무엇이 일어난 것인가? 피를 토하는 소무의 통곡에서 이릉은 天을 본 것이다. 天을 다시 한 번 본 것이다. 이는 이릉이 天이 무엇인지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릉은 天을 알고 있다. 그는 한때 天을 보고, 天이 무엇이며, '天을 본 자기자신'은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 이야기를 떠올려보아도 좋다. 인간은 동굴 속에서 살아간다. 당신은 우연히, 동굴 밖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곳에는 나무도 있고 풀도 있고 시냇물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태양(이데아)이 있다. 天이 있는 것이다. 天을 본 당신에게 플라톤은 말한다. 너는 동굴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다시 동굴을 나가는 길을, 이번에는 우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조직해야 한다. 동아시아적으로 말하자면, 도道를 너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제시해야 한다. 이릉은 한 번 동굴을 나와 天을 봤다. 동굴로 돌아온 그가 다시 天을 보러 가기 위한, 도를 알아내고 또 실천하기 위해, 왜냐하면 지행은 합일이기에,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것이 天에 대한 충실성이며, 천자에 대한 충성과 사랑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느 순간 天을 저버렸다. 배신했다. (사실 그의 일족이 처형당한 것은 그 배신의 대가를 현세에서 치른 것일 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 사실을 이릉이 차마 직시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우리는 그의 시선이 닿지 않는 소위 고민의 "어두움"의 한 측면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런데 소무가 나타나서, 소무의 통곡과 그가 토한 피에서 이릉은 문득 天을 다시 기억해냈다. (자신이 동굴 밖으로 나와 언어화할 수 없는 햇살 아래에서 바라본 적 있는, 그걸 그때 바라봤다는 그 사실만큼은 어느 누가 와도 부정할 수 없는) 天이란 이런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해낸다. 天이란 소무 같은 사람이 체현하는, 그것을 위해 소무 같은 사람이 삶을 바칠 수 있게 하는 어떤 것. 이릉 자신이 배신한 天이 소무의 처절한 통곡을 통해 그에게 돌아와, 배신자의 등에서 식은땀을 흐르게 하는 것... 이것이 그 순간 일어난 일이 아니었을까.
물론 天 같은 것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나는 한 번도 天 같은 것은 본 적이 없다는, 내가 본 것 가운데 天 같은 것은 결코 없었다는 식의 세계관도 언제나 가능하다. 절대적인 이념, 절대적인 사랑, 절대적인 충성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고, 혹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처음 관료로 선발되어 천자 앞에 불려나갔을 때의 세상이 바뀌는 경험, 그때 느낀 현세를 초월한 듯한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 같은 것들, 천자를 위해 살고 천자를 위해 죽겠다고 맹세하던 그 순간 자신의 상태 같은 것들은 얼마든지, 다른 일체의 일물일사一物一事와 구별될 수 없는, 특권화될 수 없는 제행무상의 무차별적인 에피소드들로 표상되고 해석될 수 있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이릉은 적어도 자신이 소무의 통곡을 볼 때 느꼈던 "근본적 차이"와 그로 인한 어두운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자신은 도대체 왜 그것을 느껴야만 했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어리석은 중생이기 때문이다. 이 이외의 답은 불가능할텐데, 이릉은 그런 귀결을 의식하기엔 너무나도 긍지가 강한 선비라서, 차라리 질문도 설명도 하지 않고 문제를 언어화되지 않은 곳에 가라앉혀두기를 선택할 사람이다.
사마천은 天을 의심하고 자신의 天을 글로 세웠다. 이릉은 天을 버리지도 못하고 天에 충실하지도 못했다. 소무는 天을 끝끝내 지켰다. 나카지마 아쓰시는 <이릉>을 쓰며 일본의 天, 자기 자신의 天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집안은 에도 시대부터 대대로 한학자를 배출한 유학 명문가였다. 조상의 눈 아래서, 병으로 죽어가며, 그는 지금에야말로 일본인들이 그 언제보다도 天을 상기해야 할 것을 요구받는다는 사실, 天을 다시 보기 위한 도道의 조직과 제시를 요구받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로 인해 무수한 이릉과, 무수한 사마천과, 무수한 소무가 동아東亜의 천하에서 무수히 생멸하고 있다는 것, 이 사실들에 애타게 마음을 쓰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것은 그의 임무였다. 에도 말기 이래 그의 가업이 그에게 天(天道!)의 전문가가 될 것을 명하고 있었다. 교사라든지 문학자라는 근대적 외피를 쓰고 있었지만 그는 天의 전문가였다는 점에서 동시대 다른 작가, 지식인들과 구분되는 이채를 발하고 있다. 혁명과 투옥, 구타와 고문과 사찰, 종군과 살해와 살해당함, 내핍과 살얼음을 걷는 듯한 삶, 이 모든 것이 현실로 닥쳐올 때, 어제까지만 해도 무병장수와 소확행을 저해하는 모든 것에 발톱을 드러내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고통과 죽음에,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삶에 이유나 의미를 추궁하게 될 것이다. 天이 사람들을 버린다면 사람들은 비로소 天을 만들어서라도 가지려 한다. <이릉>에서는 시대의 요청에 응하는, 죽음 앞에 선 유자儒者의 긴박감이 느껴진다. 그것이 이 소설을 훌륭하게 만든다.
[1]
사마천의 서술에 의하면, 초나라 사신이 오자서와 그 형인 오상을 수도로 소환하였을 때 돌아가면 죽는다며 도망가자는 오자서에게 오상이 했던 말이 있다. 살아서 치욕을 갚는다면 다행이겠지만, 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몸을 망치고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는 도망쳐서 훗날을 도모하라, 나는 돌아가겠다. 오상이 목숨을 가벼이 여겨 반드시 죽고자 한 것이 아니고 오자서가 목숨을 소중히 여겨 반드시 살고자 했던 것도 아니다. 돌아가면 아버지를 살려주겠다는 초나라 왕의 말을 믿고, 혹은 믿지 않을 수 없어, 돌아갈 것인가, 믿지 않고 도주해서 아버지의 죽음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고 대신 그 원수를 갚을 것인가 하는 기로에서 형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다하기로 한 것일 뿐이다. 덧붙여 형세가 돌이킬 수 없어 패배와 사로잡힘, 죽음을 면할 수 없을 때, 단지 뜻을 굽히지 않는 것에 의해서만 당해 문제와 관련하여 충실성을 지킬 수 있는, 그런 때가 있다는 걸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두 사람은 형세를 서로 다르게 분석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오상의 경우는 이미 절개를 지키는 유일한 길은 죽음이나 다름 없는 소환에 응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고, (이때 살길을 명분으로나마 만들어준 것이 초나라 조정의 계략 가운데에서도 가장 교묘한 부분으로서, 오상으로서는 가장 통절한 급소가 여기서 찔렸던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오자서는 아직 형세가 기울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부기]
리링은 이렇게 평가한다.
이릉이 투항하여 반역을 한 것은 '강요된 반역'이었다. 물론 '반역'이란 말만 놓고 본다면 이릉은 '반역자'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는 흉노의 공주를 아내로 맞아 흉노의 왕이 되어 끝내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반역'이 강요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배후의 손, 즉 자신과 가까운 사람만 기용한 무제, 지휘에 무능한 이광리, 간교한 노박덕, 유언비어를 날조한 공손오, 그리고 불난 집에 부채질만 하는 조정에 득실거리는 대신들이야말로 진정한 '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사기>와 <한서>를 읽다보면 당시 군사들이 얼마나 고난을 당했는가를 알 수 있다. 문제 때 풍당은 "폐하의 법은 매우 엄혹하며 상은 매우 가볍고 벌은 매우 중합니다", 군사들은 "끝끝내 힘겹게 싸우다가 결국 참수를 당하거나 포로가 되며, 큰 공은 장수의 것이 됩니다. 또 한마디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관리들은 이를 법에 적용시킵니다."라고 직언했다. 상은 내리지 않더라도 벌은 반드시 시행되었다. 무제 때 지방의 관리제도는 "가혹한 형벌을 간략하게 바꾸고, 간교함을 버리고 후박함을 제창하여 배를 삼킬 만한 큰 고기도 빠져나갈 수 있을만큼" 관대해졌지만 군대에는 여전히 '법이 엄격했다'. 한나라 <군법>에는 "두려워하고 나약한 자는 참한다", "두려워 도망가는 자는 참한다", "기회를 놓친 자는 참한다", "길을 잃은 자는 참한다", 그리고 생포되어도 사형시킨다고 되어 있다. 이광 역시 생포되어 도망친 관계로 법에 따라 참해야 하지만 평민으로 사해져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기용되었지만 뜻대로 되지 못했다. 마침내 기회를 놓쳐 문무 관료들의 온갖 수모를 견디다 못해 칼로 자결했다. 만약 이릉이 살아 돌아왔다면 그 결과는 참으로 자명하다. 그래서 '조직'의 관점에서 보면 이릉은 억울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