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으로 회복되는 세상
지금까지 우리는 과거의 어떠한 연결이 있었고, 어떤 공간들이 사람들의 소통을 이어주었는 보았다. 또한, 현대 사회의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점점 소통이 단절되다 코로나로 인해 완전히 오프라인 소통이 단절된 사회를 우리는 안다. 다행히 오프라인 소통의 대안으로 온라인이 나오고, 코로나 백신들이 나오면서, 다시금 사회의 소통은 회복되어가고 있다. 이번 코로나로 인해 집에 감금되다싶이한 전 세계 사람들은 사람이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연결되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인류가 추구해야 하는 소통은 어느 정도까지 일까? 인류는 어느 정도 연결되어야 하고, 어느 정도는 단절되어야 하는 것일까? 한옥의 담장은 조상들이 살던 당시의 단절과 연결의 정도를 보여준다. 평소에는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보이지 않지만, 특별한 순간에는 함께 공간을 공유해 줄 수 있는 적당한 크기의 담장이 그 예이다. 그렇다면 현대, 우리들에게 연결과 단절의 선은 어느 정도가 될까? 한번 알아보자.
독일의 철학자인 하이데거는 ‘소외'라는 상태를 연구한 사람이다. 하이데거가 연구한 바로는 갑자기 드는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어!’라는 생각은 소외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생각이며, 이 소외는 세계의 존재를 경이의 감정으로 보지 않고, 기술문명의 이해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태를 뜻한다. 사람은 존재를 있는 그대로 존재의 장으로 보는 것이 아닌, 세계를 단지 하나의 메커니즘으로 바라볼 때 스스로 세계로부터 소외된다. 하이데거의 말에 따르면, 인간은 ‘쓸모가 있는가’라는 관점을 가지고 다가가서 대상을 파악하고, 소유하여, 자신을 위한 쓸모의 존재로 전락시킬 때 그 대상은 스스로의 존재의 빛을 감춘다고 한다.
하이데거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르게 마틴 부버라는 철학자는 대상이 존재의 빛을 감추게 되는 것은 그 대상이 자신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수단화시키려는 주체가 스스로의 세계 속에 갇혀 버린다고 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내가 어떤 사람을 이용해먹어야겠다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나는 나 자신을 냉혹하고 차가운 세계에 나 자신을 밀어 넣게 된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평소에 남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안 하지만, 자신이 무언가 잘못을 하면, 그 뒤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한 잘못을 할 가능성을 찾게 되는 것 같다.
기술 사회에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계속 소외를 경험한다. 이 사회에 단절이 일어나고 있는 이유는 확실히 기계적인 사회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 같다. 소외와 단절은 코로나로 인해 수면 아래에서 드러난 것뿐이지, 그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 것이 아니다.
소외는 단절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소외는 다른 사람들은 도구처럼 이용해 버리려 할 때 일어난다. 결국 단절은 다른 사람들을 하나의 사람으로서 대우하고, 존중해줘야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또한, 코로나로 인한 단절은 회복되고 있지만, 아직 사회의 개인주의 적인 경제 시스템은 그대로이다.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해야 사람들은 다시 연결될 수 있을까? 한 사람부터라도 서로 공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처음 인류는 서로 공감하여 공동체를 만들 수 있었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과거_사람들의 연결고리. 1>에서 말했다시피, 인류는 공감함으로써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왔다. (온라인 공간 또한 단절의 힘듬을 사람들이 공감함으로써 만들어진 해결책이었을 것이다.) 한 사람, 사람이 사회의 문제에 공감하고, 행동을 취한다면, 이 세상은 더 따뜻해지고, 사람들은 서로를 성공하기 위한 도구로써 바라보는 것이 아닌, 서로를 하나의 동료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지성 작가의 <에이트>와 다양한 인공지능에 대한 서적을 읽어보면 앞으로 인공지능이 얼마나 인간을 대체할 것인지 알 수 있다. 특히, 이지성 작가는 앞으로의 한국 99.997%가 인공지능 아래에서 일하거나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0.003%는 어떻게 살아가기에 인공지능 위에 있을 수 있을까? 저자는 인공지능이 따라 하지 못할 인간만의 능력을 봐야 한다고 말한다. 바로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타인의 입장에서 느끼거나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즉 공감이다. 인공지능은 공감을 통해 기존에 없던 것을 새로 만들거나 기존에 있던 것에 혁신을 일으키는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한다. 이미 세계적인 석학들과 인공지능 전문가들은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이 갖춰야 할 필수적인 것으로 공감 능력과 창조적 상상력을 꼽고 인재들을 양성하고 있다고 한다.
혹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을 아는가. 그의 어머니는 청각 장애인이었다. 벨은 어머니의 상태에 대해 매번 마음이 아팠고, 어머니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했다. 그는 어머니의 상태를 공감할 수 있었고, 자신의 삶을 ‘청각 장애 극복’을 위한 발명에 바쳤다. 결국 벨은 현대식 보청기의 기반이 되는 보청기와 전화기를 발명하기에 이르렀다. 또 다른 이야기다. 패트리샤 무어는 요리를 사랑하던 할머니가 관절염 때문에 냉장고 문을 여닫는 것이 힘들어지자 그만 요리를 포기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다니던 디자인 회사에서 노인들을 위한 디자인을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회사는 거절했고, 그녀는 스스로 노인들을 위한 디자인을 하기 위해 스물여섯 살의 처녀에서 관절염을 앓는 여든 살의 노인으로 변신했다. 머리에다가는 흰 가발을, 얼굴에는 라텍스로 주름을 만들었다. 또한, 눈이 잘 보지 않도록 뿌연 안경을, 귀에는 잘 안 들리게 솜을, 팔목과 발목에는 관절을 움직이기 어렵게 부목을, 허리에는 구부정한 자세를 유지하도록 붕대를, 다리에는 걷기 어렵게 철제 보조기를 하고서 미국과 캐나다 도시 116곳을 다녔다. 그렇게 3년간 노인으로 살아가며 그녀는 아이부터 노인까지 누구나 편리하게 쓸 수 있는 제품을 디자인해내었다. 패트리샤 무어가 디자인한 것들은 감자 깎는 칼, 소리 나는 주전자, 양손잡이용 칼과 가위, 고무 손잡이가 달린 조리용품, 바퀴 달린 가방, 계단 없는 저상버스 등 다양한 분야에서 디자인했다.
그 어떤 인공지능이 다른 사람들을 보며 가슴 아파하고 이렇게 공감할 수 있을까? 이는 순전히 인간만의 영역이다. 두 사람처럼 대부분의 위대한 위인들은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려 노력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이 세상의 여러 문제를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혁신을 일으킬 수 있었다. 나는 이 세상을 향한 이타적인 공감이야말로 인간을 가치 있게 만들고 세상을 더 나아지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타적인 공감은 전혀 크지 않아도 된다. 위의 위인들 또한 작은 공감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 가운데 남에게 공감이 되고 도와주려는 태도; 이 태도 안에서 인류는 더 나은 길로 나아갔다. 가끔 주위에서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섬겨주는 날개 없는 천사들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이 세상에서 우리는 그런 이타적인 마음을 통해 희망을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세상이 안 좋아지고 있는 것은 급박하게 안 좋아지고 있는데 어떻게 몇몇 이타적인 공감을 보고 희망을 엿볼 수 있는가? 이 세상과 사람들의 가능성에 대해 너무 낙관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나는 주위 사람들의 남을 위하는 행동과 그 안의 이타적인 공감 능력을 보고 그 행동 하나하나가 줄 파장 효과를 생각한다면 전혀 이 희망이 헛되지 않다고 생각한다.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이자 역사학자인 데이비드 흄은 이렇게 말했다. ‘’ 도덕관은 이기주의와 사람들 사이의 공감이 만들어 낸 주관적인 판단이다.’’ 여기에서 도덕관은 사람들의 행동 틀이다. 사람들은 이 도덕관의 허용 범위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도덕관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한 마음과 서로 공감하는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공감은 사람들에게 길을 제시한다. 공감은 한번 했다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도덕관이 되어 계속 우리 안에서 영향을 준다. 사람들은 공동체를 이루어 살기 때문에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한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가, 무슨 공감을 하며 사는가가 결국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공감 능력을 통해 살아남기 위해 함께 모여 문화를 발전시킨 것을 보았다. 그리고 공감 능력이 어떻게 쓰이냐에 따라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현대 사회는 과거보다 사람들이 서로 공감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그러나 오프라인 공간에서 서로 오감을 통해 공유하고, 이타적인 공감을 할 수 있다면, 세상은 다시 연결될 것이다.
나는 건축에서도 공감이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개인적인 공간과 공동의 공간이 필요한지 알려주는 척도가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안도 다다오나, 유현준 건축가는 이 사회를 공감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간들이 이 사회에 필요하다고 했다. 또한, 옛 조상들도 이웃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알았기 때문에, 한옥 담장을 낮게 만들고,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마당을 설계했다. 그처럼 한 건축물도 그 건물에서 살아가거나, 사용할 사람들과 공동체에게 충분히 공감할 때,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물이 되어 줄 것이다. 좋은 공감이든 나쁜 공감이든 공감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그렇다면 이왕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거 선한 영향을 주면 어떨까? 세상에는 이타적인 공감으로 단절을 연결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부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그 역할을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이데거, 마틴 부버 출처: brunch ; 하이데거의 '근본 기분'에 대하여 _ 진리의 테이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