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도자 이야기>
그릇을 사기 위해 이천에 간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문득 왜 이천이 도자기로 유명할까 궁금해졌다. 밥맛이 좋으니 토질이 좋을거란 대략적인 유추는 가능하다. 하지만 도자기엑스포, 비엔날레하면 이천이 먼저 생각나고 2010년에는 유네스코 공예 및 민속예술 분야에 지정된 근본적인 이유가 알고 싶어 『이천 도자 이야기』를 읽게 됐다.
『이천 도자 이야기』는 이천시로 모인 도예가들의 명맥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래서 한반도의 자기인 청자와 백자의 역사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고려청자, 조선 백자라 배웠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이 사실이 당연하지 못했다. 청자의 존재는 원나라의 침입과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기술자들이 죽거나 끌려가며 전수가 끊기고 고려가 조선으로 넘어가는 시기 청자의 존재를 지우면서 잊혀졌다.
청자가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일제강점기에 우연히 고려청자를 발견한 일본상인 때문이었다. 상인이 청자를 일본으로 가져가자 골동품계는 난리가 났고 그들은 청자를 구할 방법이 고려 시대 무덤을 파야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렇게 청자 수집에 열을 올린 일본인들 때문에 조선 땅에는 도굴꾼들이 넘쳐나게 됐는데, 그 열을 부추긴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이다.
"이토는 있는 대로 고려자기를 싹쓸이 했다. 일왕가와 귀족들 사이에서 고려자기는 최고급 선물로 통했다. 이토가 수집한 완품의 고려자기는 1,000여 점이 넘었다고 한다. 이토가 당시 일왕에게 상납한 최고급 도자 103점은 현재 도쿄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 p.47
청자만이 고난을 겪은 것은 아니었다. 백자 또한 전란 속에서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임진왜란(1592~1598) 기간 중 정유재란(1597~1598)으로 기술자들이 대거 납치당하며 조선의 도자산업이 붕괴되어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어렵게 이어가던 기술은 강점기 때 일본산 제품들이 싸게 들어오며 더욱 회복하기 어렵게 되었다.
한국전쟁까지 벌어져 산산조각 나 있던 도자기들은 1960년대 이후로 이천에서 다시 부활을 꿈꾸게 된다. 그런데 왜 이천이었을까?
"중종 25년에 간행된 『신 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천의 특산품으로 백옥과 함께 도기를 손꼽고 있다. (중략) 이천 도기는 대략 15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에 이르는 100~150년 정도의 전성기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p.75
우리가 알고 있는 지역 특산품은 조선 시대에도 비슷하다. 개성 인삼이라던지, 안성 유기, 제주 감귤 등등. 물론 경기도 광주, 여주도 그릇이 유명한데 왜 이천이었냐면, 작가는 칠기의 존재를 강조한다.
"오늘날 이천이 우리나라 현대 도자기의 메카가 된 것은 칠기가마 덕택이라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해 칠기가마가 천만다행으로 이천에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유네스코가 선정한 공예 도시 이천'이 가능해진 것이다." - p.85
칠기(옻을 칠한 것처럼 검은색 윤기가 나는 그릇)를 만드는 가마들이 호황을 이루며 숙련된 장인들을 필요로 해 그들이 모였고 각 대학 도예 전공 학생들의 기능연수와 실습장 역할을 하게 되었다. 물론 서울과 가깝다는 것, 땔감으로 쓸 소나무가 많고 도자기의 원료인 점토와 사토를 구하기 쉬웠다는 것도 중요한 요소다.
힘겹게 되살린 도자기의 역사 이후 책에는 1세대, 2세대 그리고 지금 유명한 명장들 소개가 있지만 이전에 서평 한 『그릇:도예가 13인의 삶과 작업실 풍경』과 비교하면 딱딱한 설명에 눈길이 안 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감성' 대신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도자기에 대해 확실히 기술된 정보 없이 사람들의 기억을 더듬어 이 책이 만들어졌으니, 명장들의 개개인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듯했다.
그릇을 사러 이천에 간다는 친구의 한마디가 이렇게 긴 탐구로 이어질 줄 몰랐다. 청자의 소멸과 재발견, 백자의 수난과 부활, 그리고 현대 도예가들의 집결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고려청자, 조선 백자'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지, 한 권의 책이 그 긴 여정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