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의 여주 광주 양주 파주, 강원의 원주, 충청의 충주 청주 공주, 전라의 전주 나주 광주, 경상의 경주 상주 영주 진주. 이 지명들의 공통점은 형제자매의 이름 돌림자처럼 주州가 붙는다는 것이다. 주州가 붙은 고장의 공통점으로는 강이나 개천을 끼고 있는 너른 땅이 있고 (엄연히 말하자면 뭍을 끼고 있는 물이 있고) 이 때문에 농사짓기에 유리해 예로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제주도 역시 주州가 붙지만 뭍사람들의 입장에서나 바다를 건너야 (제주도의 제濟는 물을 건넌다는 뜻이다.) 당도할 수 있는 하나의 고장이지, 섬사람들 입장에서 제주도는 엄연한 나라이기 때문에 위 목록에는 포함하지 않았다. 제주의 옛 지명인 탐라耽羅는 신라新羅, 가라加羅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국가를 뜻하는데, 라羅는 펼쳐놓은 그물처럼 너른 땅을 나타낸다. 살기 좋은 너른 땅을 가리키는 건 동일하나 주州는 고장을, 라羅는 그보다 큰 단위인 국가를 가리킨다. (그래서 탐라국, 신라국, 가라국라고도 부른다.)
나주를 언급하고자 이렇게 서론이 장황했다. 물리적 크기도 그렇거니와 지명이 품고 있는 면적은 아마 우리나라에서 나주가 제일 아닐까. 라羅도 그렇고 주州도 그렇고 넓게 펼쳐진 땅이라는 글자를 겹으로 그 이름으로 삼고 있으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큰 평야가 나주에 있다. 두번째로 크지만 쌀 생산량은 가장 넓은 호남평야를 앞지른다. 라羅에 주州까지 쓸 자격이 차고도 넘친다. 이런 고장에서 난 특산품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소반이다. 작을 소小에 밥상 반盤을 쓴다. 반盤은 본디 소반을 일컫는 것이어서 대반大盤이라 할지라도 소반 중에서 크다는 뜻이지 잔칫상 같이 너른 밥상을 뜻하지는 않는다. 요약하자면 소반은 작디 작은 밥상이라는 뜻으로 작다는 단어가 겹쳐져 사용된 단어다.
나주소반. 넓다는 뜻이 중복된 나주와 작다는 뜻이 거듭된 소반. 한 단어가 품고 있는 콘트라스트가 몹시 격하지만 부드러운 발음 덕분일까, 그 격함은 이 단어를 소리 내는 이를, 밥상을 떠올리는 이를 짓누르지 않는다. 심상에 떠오르는 건 오히려 포근함이다. 나주의 평야는 넓디 넓은 것이지만 바다처럼 속을 알 수 없고 언제라도 돌변할 수 있는 카오스의 공간이 아니다. 마음에 안정을 주는 격자형 형태 위에 사계의 변화를 느슨히, 여실히 일러주는 벼가 나고 자라는 코스모스의 공간, 심리적 넉넉함의 자리.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나주를 생각할 때 마음을 놓게 만들지는 않는지. 소반은 또 어떠한가. 상이 담담淡淡할수록 먹을 수 있다는 감사의 마음은 오히려 농농濃濃해진다. 마치 음양의 관계 같다. 상이 아무리 작다 한들 그 위에 올려진 귀한 먹거리조차 하찮을 것인가. 내 몸에 들어와 내 몸을 이루는, 나를 살게 하는 근원이 되는 것을 안다면 이 작은 상 위에 올려진 것들의 무게가 얼마큼인지 다소간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 무게를 말없이 떠받치고 있는 소반의 의연함 또한.
작은 티끌 하나가 온 세상 머금었고 一微塵中含十方
짧은 순간이 곧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라네 一念卽是無量劫
의상대사는 방대한 『화엄경』의 내용을 이렇게 간명한 게송으로 읊었다. 티끌과 온 세상의 관계가, 일순간과 영겁의 거리가 서로 반대쪽 먼 데 있지 않음을 게송 자체로 증명한 셈이다. 일터를 오가는 길목의 어느 골동품 상점에서 마주한 나주소반이 문득 이 게송을 마음에 맺히게 한다. 평야의 일 년을 머금은 한 톨의 쌀이 밥이 되어 소반이라는 또다른 평야에 오르는 일상의 기적. 작은 상이 유장하게 품고 있는 평야의 광활함. 형이상학의 관념이 실생활의 경험으로 바뀌는 순간. 바로 나주소반을 대하는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