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가방, 그리고 나의 빈 서랍

"아고타 크리스토프 『문맹』을 읽고"

by 드림그릿 박종숙

작년 한 해, 나는 새로운 일들을 시작했다. 다문화 강사와 책 읽어주는 문화봉사단. 그동안 하지 않았던 직업을 갖고 살아가느라 책은 꾸준히 읽긴 했지만 예전처럼 많이 읽지는 못했다. 글쓰기는 더더욱 할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가장 내가 하려던 일은 늘 뒷전이었다.


작년 11월 말, 강사 일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12월 한 달 동안 나는 미친 듯이 책을 읽었다. 못 읽었던 책들을 폭식하듯 읽어댔다. 책상에 쌓인 책들을 하나하나 읽어내는 동안, 정작 정리는 하지 못했다. 책리뷰도 올리지 못했다. 누구보다 기록의 소중함을 알면서도.


아린 가슴을 안고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니, 난 정말 바빠서 글쓰기를 하지 못했던 걸까? 아님 글 쓰고 싶다던 마음은 알량한 자존심의 발로였던가. 느슨했던 글쓰기의 힘을 찾으려면 뭔가 밀어 넣어야만 했다. 그렇게 폭식하듯 책을 읽는 동안,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맹』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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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의 매혹

"나는 읽는다. 잡히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모든 것을 읽는다. 신문, 교재, 벽보, 길에서 주운 종이 쪼가리, 요리조리법, 어린이 책, 인쇄된 모든 것들을."(9쪽)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이 문장엔 한 사람의 삶 전체가 들어 있었다. 1935년 헝가리의 작은 시골 마을 치크반트에서 태어난 아고타 크리스토프.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와 미술을 가르치던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그녀는 네 살 때 이미 활자 중독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읽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직후의 혼란, 소비에트 영향 아래 사회주의 체제로 편입되는 헝가리의 격동기를 통과해야 했다. 전쟁과 결핍 속에서도 책 읽기와 글쓰기는 그녀를 지키는 유일한 방편이자 도피처였다.


어린 시절 기숙학교로 보내진 후 겪은 고립과 소외감은 훗날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로도 불리는 3부작의 냉혹한 분위기와 "쌍둥이/분열된 자아" 모티브의 정서적 자원이 되었다


1956년, 국경을 넘다

그리고 1956년,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바꾼 사건이 일어난다.

헝가리 반공 봉기가 소련군에 의해 진압되면서 수많은 헝가리인들이 나라를 떠나야 했고, 21살의 아고타도 남편과 네 달 된 딸을 데리고 밤에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탈출한다. 그리고 이후 프랑스어권 스위스의 뇌샤텔로 정착하게 된다.


"둘 중 한 가방에는 젖병과 기저귀, 아기에게 갈아입힐 옷이 있고 다른 가방에는 사전들이 들어 있다. 우리는 요세프의 뒤를 따라 약 한 시간 가량 침묵 속에서 걷는다. 거의 완벽한 어둠이다."(69쪽)


두 개의 가방. 한쪽엔 생존을 위한 물건들, 다른 한쪽엔 사전들. 불확실한 미래로 걸어가는 어둠 속에서도 그녀는 사전을 들고 갔다. 아기를 돌보는 엄마로서의 삶과 작가로서의 삶, 둘 다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장면은 언어와 생존이 동시에 달린 도피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문맹이 된다는 것

스위스에 도착한 후 그녀의 삶은 더욱 가혹해진다. 시계를 만드는 공장에 취업하는데, 공장에서는 대화가 금지되어 있었고, 도시 밖 난민 마을에 살며 언어도, 사회적 연결도 거의 없는 고립된 삶을 살게 된다.

헝가리어는 읽고 쓰는 언어이지만 주변에서는 쓰일 수 없고, 프랑스어는 입을 열면 실수투성이의 외국인 언어이자 읽고 쓸 수 없는 문자였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를 "문맹"이라고 부른다. 헝가리어로는 이미 시를 쓰던 사람이었지만, 삶을 둘러싼 실제 언어인 프랑스어에서는 문자 그대로 글자를 읽고 쓸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처음에 하나의 언어밖에 없었다. 사물들, 어떤 것들, 감정들, 색깔들, 꿈들, 편지들, 책들, 신문들이 이 언어였다. 나는 다른 언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인간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단어를 발음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49쪽)


모국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고, 감정을 느끼는 틀이며, 존재 그 자체다. 그런데 그녀는 그 언어를 잃어야 했다. 더 정확히는 버려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프랑스어 또한 적의 언어라고 부른다. 내가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하나 더 있는데, 이것이 가장 심각한 이유다. 이 언어가 나의 모국어를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53쪽)


적의 언어. 그 언어로 써야 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자신의 모국어가 점점 희미해져 간다는 감각은 곧 그녀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이별, 그리고 쓰기의 시작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회상한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이미, 나는 좋아한다. 내가 지은 이야기들을."(19쪽)


그러나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이 생겨난 것은 한참 후였다. 어린 시절을 감싸던 은실이 끊어지고, 불행한 날들이 찾아왔을 때였다. 부모님과 오빠, 남동생과 헤어져 낯선 도시의 기숙사에 들어갈 때, "이별의 고통을 견디기 위한 해결책은 쓰는 일밖에 없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스위스에 온 지 5년쯤 지난 후, 외로움과 망명 생활의 피로 속에서 남편과 이별하고 공장 일을 그만두며, 그녀는 본격적으로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프랑스어는 그녀에게 "운명에 의해 강제로 부여된 언어"였고, 평생 사전 없이는 제대로 쓸 수 없다고 느꼈을 만큼 끝까지 낯선 언어로 남았다.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멈춰 섰다. 쓰기는 선택이 아니었다. 생존이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는 무엇을 견디기 위해 쓰려 했던 걸까. 아니, 나는 정말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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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7년 그녀는 프랑스어로 쓴 첫 장편소설 『비밀노트』를 발표하고, 5년에 걸쳐『타인의 증거』, 『50년간의 고독』으로 이어지는 3부작을 완성한다. 1995년 『어제』, 2004년 자전적 에세이 『문맹』을 출간한다. 이후 각종 유럽 문학상 등을 수상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서건 어떤 언어로든지 나는 글을 썼으리라는 사실이다."


이 문장 앞에서 나는 부끄러웠다. 환경을 탓하고, 시간이 없다고 말하고,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다고 변명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난민 수용소에서도 썼고, 공장에서 일하며 지친 몸으로도 썼고, 서툰 언어로도 썼다.


그녀는 말한다.

"무엇보다,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할 일은 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쓰는 것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누구의 흥미를 끌지 못할 때조차, 그것이 영원토록 그 누구의 흥미도 끌지 못할 것이라는 기분이 들 때조차."(97쪽)


작가가 되는 방법에 대한 그녀의 답은 명확하다.

"우리는 작가가 된다. 우리가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은 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쓰면서."(103쪽)


나의 도전

『문맹』은 불과 40여 쪽 남짓의 짧은 책이지만, "어린 시절의 독서와 글쓰기 → 기숙학교의 고립 → 1956년의 도피 → 스위스 공장 노동과 언어 상실 → 프랑스어라는 적의 언어를 배우면서 다시 쓰기 시작하는 과정"을 군더더기 없이 짚어나간다.


여기서 "문맹"이란 단어는 단순히 글자를 모른다는 뜻을 넘어, 모국어로는 더 이상 쓸 수 없는 난민 작가의 운명, 난민 수용국의 언어를 배우며 느끼는 모멸감과 열등감, 그럼에도 언어를 다시 붙잡아 자기를 재구성하는 힘을 모두 응축한 이름이다.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프랑스어로 쓰는 것, 그것은 나에게 강제된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한 문맹의 도전."(113쪽)


문맹(文盲), 글을 모르는 사람. 자신의 언어를 잃고, 서툰 언어로 쓸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스스로를 문맹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 문맹은 51세의 나이에 『비밀노트』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서툴러도,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일 쓰는 것이다. 완벽한 문장이 아니어도, 누군가의 흥미를 끌지 못해도, 원고가 서랍 안에 쌓일지라도. 두 개의 가방을 들고 어둠 속을 걸었던 작가처럼, 나도 내 가방에 사전을 다시 넣으려 한다. 내 언어로, 내 이야기를,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이것이 『문맹』을 읽고 난 후 나에게 남은 것이다. 핑계가 아닌 실천, 망설임이 아닌 도전. 한 문맹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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