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를 배우러 왔다가, 인간을 다시 읽었다

by 드림그릿 박종숙

재작년 여름, 세종시의 한 강의실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반짝이는 눈과 예리한 질문을 가진 그녀는 건설회사에서 단련된 '전투력'과 암을 이겨낸 '생존력'을 동시에 장착한, 그야말로 우리 모임의 '알파고'였다.


그녀의 제안으로 시작된 책 만들기 모임. 우리는 그녀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때의 그녀는 참 따뜻했고, 서로 호흡도 잘 맞아 모임 자체가 즐거웠다. 뭔가 멋진 걸 함께 만들어가고 있다는, 그 설렘이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이야기가 '엔딩 맛집'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책이 완성될 무렵, 그녀는 갑자기 '영상'이라는 새로운 궤도로 환승을 선언했다. 오타 교정도, 마무리 모임도 "바쁘다"는 세 글자 앞에서 멈춰 섰다.


최종 인쇄본을 받기로 한 날, 센터에 도착한 건 나 혼자였다. 참석하지 못한 분들 책까지 챙겨 놓고 돌아오는 길. 내 마음은 마치 '잉크 부족' 램프가 깜빡이는 프린터 같았다.


그 후 두 번 정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즘 영상 작업으로 바빠요."


피곤한 듯 흘러나온 짧은 대답이었다.


한 달 뒤, 용기 내어 다시 전화했을 때도 답은 같았다. 이제 더 이상 인연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는 카톡방에서 아무 말 없이 나갔다.


함께 모임을 했던 다른 분이 내게 서운함을 토로했다.

나는 오히려 그녀를 감싸며 "바쁘다고 하니 이해해야죠"라고 했지만, 솔직히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나도 새 일자리를 얻어 바빠졌고, 그녀를 정말로 잊었다. 아니, 잊었다고 생각했다.

오랜 직장생활을 하며 참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외부 모임에서의 인연은 여전히 어렵다. '서운함'이라는 감정이 내 마음의 저장 공간을 슬금슬금 차지하고 있을 무렵, 운명처럼 AI 수업 강의실에서 그녀를 재회했다.


"어머, 선생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10개월 만의 재회. 반가움에 로그인을 시도하는 내게, 그녀는 0.1초의 로딩도 없이 대답했다.


"아, 네. 제가 지금 커피를 좀 담아와야 해서요."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녀는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찾아 떠났고, 나는 그 자리에 남겨진 구형 모델이 된 기분이었다. '바쁘다'는 그녀의 철벽은 챗GPT 서버 다운보다 견고했다.


순간 서운함이 훅 올라왔다.


그런데, 고개를 들자 강의실 모니터 속 AI 문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아, 인연에도 유통기한이 아니라 유효기간이 있는 거구나.'


어쩌면 그녀는 지금 자신의 삶이라는 영상을 편집하느라, 과거 프레임인 나를 잠시 잘라내기(Cut) 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픈 몸을 이끌고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느라, 그녀에겐 '스몰 토크'라는 데이터조차 사치였을 테다. 아니, 어쩌면 그녀도 나처럼 바빴던 거라고, 정말로 바빴던 거라고 이해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의 뒷모습이 차가운 기계가 아니라, 치열하게 하루를 버티는 한 사람의 뒷모습으로 보였다.


덕분에 나는 오늘 AI 수업료를 톡톡히 냈다.


기계의 지능을 배우러 왔다가, 타인의 사정을 헤아리는 '인간의 마음'을 복습했으니까.


그녀가 마시는 커피가 부디 아주 따뜻하고 달콤했으면 좋겠다. 그 에너지로 그녀가 꿈꾸는 멋진 영상을 완성하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나는 오늘 브런치에 새 글을 올리며, 내 마음의 '서운함' 폴더를 비우고 '이해'라는 이름의 새 파일을 저장한다.


휴지통 비우기 완료. 용량 확보 성공.


속상한 일을 겪어도 이렇게 한 편의 글로 털어낼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덕분에 오늘 내 브런치는 한 뼘 더 풍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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