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흐릿해도 몸에 새겨진 감각은 선명하니
때가 낀 갈색 대야에서 넘쳐흐른 물이 시멘트 바닥의 파인 틈마다 고여 있었다. 대야 속에는 포장된 포도즙 봉지들이 가득했는데, 어디선가 터졌는지 맑아야 할 물이 보라색으로 번져 있었다.
뒤꿈치를 꼿꼿이 들고 그 끈적한 물웅덩이 사이를 건넜다. 건강원 문은 늘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앞에 쪼그려 앉은 아줌마는 대야에 고무장갑을 끼고 손을 집어넣어 포도즙 봉지를 하나씩 씻어냈다.
들척지근하고 퀴퀴한 냄새가 훅 끼쳐 왔지만, 나는 그 봉지를 매일 기대했다. 아줌마의 등을 향해 오랫동안 입안에서 굴리던 인사말을 기어이 뱉어냈을 때, 내 손에는 보라색 봉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겨울이면 방방이 위를 솟구쳤다. 콧물이 인중을 타고 내려와 얼어붙을 때까지, 땅보다 하늘에 오래 머물렀다. 발바닥이 딱딱해져 이제 그만 놀아야겠다 싶어 내려오니, 주인아저씨는 나를 끌어다 등유 난로 앞에 앉혔다.
기름 냄새가 밴 공사장갑이 내 발목을 덥석 잡아 난로 쪽으로 당겨주었다. 땀과 녹은 눈에 젖어 눅눅해진 양말이 아저씨의 손바닥에 잠시 닿았다. 엄마도 아닌 낯선 어른이 내 젖은 발을 만지는 게 어색해 몸이 빳빳하게 굳았다. 볼 게라곤 난로뿐이라 멍하니 불꽃만 쳐다보았다.
탁, 탁, 불꽃 튀는 소리가 꼭 초침 소리 같았다. 얼어붙었던 발가락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아저씨의 얼굴을 보는 대신 발등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이제 다 녹았다는 걸 티 내려고, 난로의 열기 위에서 보란 듯이 발가락 춤을 췄다.
어느 날은 유리에 얼굴을 뭉개는 장난이 싫어 발길질을 했다. 그 바람에 현관문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발치로 투명한 칼날들이 위태롭게 흩어졌다. 날카로운 파열음 뒤로 찾아온 잠깐의 정적. 그 서늘하고 적막한 공기는 순식간에 나를 현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언니와 오빠는 약속이라도 한 듯 유리 조각부터 치우기 시작했다. 내가 놀랄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일부러 노래를 흥얼거리고 억지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미 일은 터졌는데, 내 일이 아니어서 할 수 있는 행동이 거슬렸다.
그날의 풍경과 얼굴들은 이제 희미하다. 하지만 특정 사물을 마주할 때면 그날의 감각만큼은 어김없이 ‘톡’ 피어난다.
두 손 가득 담긴 마늘의 무게,
입안에 오래 담아 둔 소리로 받아낸 보라색 봉지,
등유 난로 앞에서 멍하니 구멍 내던 불꽃,
현실 세계를 벗어나게 만든 날카로운 유리 파편 같은 것들.
무엇 하나 이룬 적 없는 서른다섯의 애엄마.
나를 모르는 채 어른이 된 나는 여전히 내가 궁금합니다.
나의 어느 지점은 대체 어디에서부터 온 걸까.
이 질문이 92년생 성장 에세이의 시작이었습니다.
기억은 왜곡되어도 피부에 남은 감각은 선명합니다.
사물을 마주할 때 '톡' 터져 나오는 그날의 공기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나는 흩어진 조각들을 수집합니다.
여전히 자라고 있는 나를 지켜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