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 300원어치가 가르쳐준 무결한 세계

나의 오답조차 정답이 되던 작은 손바닥의 기록

by 사소한수집가
세상이 정한 정답보다 무거웠던 300원의 무게


​“학교 다녀왔습니다!”



​씩씩하게 인사를 건네자 엄마는 주방에서 나와 나를 반겨주었다. 도마 위의 칼 소리, 끓어오르는 냄비의 열기, 바쁘게 냉장고를 여닫던 엄마의 뒷모습을 구경하는 일은 꽤 즐거운 놀이였다.

​그러다 엄마가 중얼거렸다.



“마늘이 없네.”



​눈이 동그래진 내가 “엄마 왜? 마늘 없어?” 하고 묻자, 엄마는 잠시 고민하더니 내게 물었다.



“예진아, 너 마트까지 혼자 다녀올 수 있겠어?”



​반사적으로 “할 수 있어!”를 외쳤다. 횡단보도를 무려 네 번이나 건너야 하는 큰 길가의 대형마트. 아홉 살 아이의 걸음으로는 왕복 40분이 족히 걸리는 ‘생애 첫 원정 심부름’이었다.


​엄마는 내게 카드를 건네주었다. 주머니에 든 카드의 빳빳한 감촉을 느끼자 갑자기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신발을 신으며 비장하게 물었다.



​“엄마, 마늘 몇 개 사 와?”



엄마는 햇살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예진이 두 손 가득 사 와.”



​별거 아니네, 라고만 생각하고 달려왔는데 마트 한복판에서 마주한 ‘두 손 가득’이라는 네 글자는 학교에서 배운 그 어떤 받아쓰기보다 어려웠다. 마트 지하 식품코너, 수북이 쌓인 마늘 앞에 서서 나는 비닐봉지를 뜯었다. 그리고 신중하게 마늘을 집어 들었다. 엄마 말대로, 두 손에 담을 수 있는 만큼 꽉 채워 담았다.


​그런데 비닐에 담긴 마늘을 보니 문득 겁이 덜컥 났다. 어린 눈에도 그 양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던 것이다.

‘엄마는 두 손 가득 사 오라고 했는데, 정말 이만큼이 맞나.’


​마늘 다섯 알을 더 넣었다가, 너무 많은 것 같아 다시 두 알을 뺐다. 다시 한 알을 집어넣어 보았지만, 봉투 안의 마늘은 이게 맞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쭈볏거리며 계산대로 향했다.


​기계가 뱉어낸 스티커에는 ‘300원’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박혔다. 300원이라는 숫자가 찍히는 순간, 입도 없는 바코드 스티커가 날 비웃었다.


​‘엄마의 요리가 고작 300원이겠어? 자신 있다고 했으면서 넌 틀렸어! 틀렸어! 틀렸어!’



​“카드로 할 거니?”



아줌마는 대수롭지 않게 물었지만, 내 손에 들린 카드가 너무 커 보여 마음이 무거웠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줄 무기 같았던 카드는 그 순간 힘을 잃었다. 너무 적은 금액이라 거절당하면 어쩌나 하는 공포가 카드의 빳빳한 모서리를 타고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계산을 마치고 큰 봉투에 꽉 차게 담아가는 어른들이 나의 봉지를 비웃는 것 같았다. 엄마의 요리 재료가 내 새우깡보다 저렴할 리 없다는 아홉 살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숫자였다.


​‘아줌마가 실수한 걸까? 아니면 정말 이게 맞는 걸까?’

묻고 싶었지만 내게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아줌마는 너무 당당해 보였고, 내 마음은 이미 속절없이 작아져 있었다. 결국 나는 그 숫자가 정답인지 오답인지 끝내 묻지 못한 채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내 그림자는 바닥에 축 처진 채 나를 따라왔다. 현관문 앞에서 마늘 봉지를 꽉 쥔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생겼다. 일 년 전, 오줌 지도를 그려둔 이불을 숨길 때 느꼈던 그 비릿하고 축축한 마음이 손끝에서부터 다시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엄마, 다녀왔습니다!”



​나는 평소보다 훨씬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내 얼굴에 서린 당혹감과 떨림을 엄마가 채 읽어내기도 전에, 목소리로 그 시선을 가리고 싶었다. 나는 잔뜩 굳은 표정을 씩씩한 함성 뒤로 밀어 넣으며 억지로 어깨를 폈다.


​내 인사에 엄마의 시선이 내 손의 마늘 봉투에 닿았다. 하지만 엄마는 그때 젖은 이불에 대해 묻지 않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가격표 따위는 보지 않았다. 대신 엄마는 마늘 봉투를 꽉 쥐느라 발갛게 달아오른 내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엄마는 내 작은 손을 가만히 감싸 쥐며 말했다.






“우리 예진이 손이, 이렇게 작았구나.”




​세상은 나에게 300원어치의 초라한 오답이라고 말했지만, 엄마는 내 손이 작아서 담지 못한 정답들을 이미 다 읽어내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세상이 정한 숫자 따위에 내 가치를 맡기지 않기로 했다.





무엇 하나 이룬 게 없는데도 이상하리만치 무너지지 않는다.
내 오답을 두고 그저 손이 작아서일 뿐이라고,
너는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주던 엄마의 웃음, 목소리, 눈빛.
스르르 퍼지던 아홉 살의 안도감.
​그 무결한 세계 안에서 나는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나를 키워낸 건 이토록 무조건적인 지지의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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