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즙] 내가 내 아이의 인사만큼은 강요하는 이유

아이가 받은 한 봉지, 그 무구한 선의에 대하여

by 사소한수집가
아홉살의 나를 지켜주던 포도즙


​코가 찡할 정도로 달콤하고 텁텁한 약 냄새가 끈적끈적한 골목 공기를 타고 흐르면, 그 길 끝에는 어김없이 빨간색 파란색 구멍 뚫린 바구니들이 널브러진 건강원이 있었다.

건강원 아주머니는 매일같이 작은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분홍 고무장갑을 끼고 갈색 대야에 물을 가득 받아 포장된 포도즙을 박박 씻어내고 있었다. 대야 속에는 은박 무늬 포도즙 봉지들이 물고기 떼처럼 둥둥 떠 있었다.


​아주머니의 분홍 고무장갑에는 항상 검은 보랏빛 얼룩이 때처럼 엉겨 붙어 있었다. 장갑 낀 손이 물속을 휘저을 때마다 찰랑찰랑 물이 날렸다. 바닥에는 호스가 뱀처럼 몸을 뒤틀며 사방으로 물을 뿜어대 건강원 앞은 사계절 내내 물이 흥건했다.


​그곳은 동네의 모든 소리가 모이는 길목이었다. 자동차 소리, 학원 가는 아이들의 달음박질, 장 보러 가는 아줌마들의 수다와 자전거 벨 소리. 나는 양말이 젖지 않게 하려 물이 덜 고인 바닥을 징검다리 걷듯 지나갔다.


​늘 아주머니의 시선은 대야 속 포도즙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아주머니와 가까워지면 마치 오줌이 마려운 듯한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매일 똑같이 건네는 인사였지만, 나는 매번 어떻게 인사할지 속으로 한참을 고민했다.


​아주머니는 매일 포도즙을 주지 않았다. 내가 인사를 잘한 날에만 포도즙을 건네주셨다.


​어떤 날은 목소리가 작았는지, 뱀처럼 뿜어져 나오는 호스의 물소리와 기계의 웅웅 거림에 내 인사가 힘없이 묻혀버렸다.

아주머니는 고개를 들지 않았고, 내 인사는 갈색 대야의 구정물 속으로 흩어졌다.


​또 어떤 날은 내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아주머니가 황급히 건강원 안으로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덩그러니 남겨진 채, 방금 한 내 인사가 몇 점짜리였을까 혼자 생각해보곤 했다. 인사가 통하지 않은 날, 나는 그저 내 목소리가 아줌마가 뒤돌아볼 만큼 예쁘지 않았나 보다며 속상해할 뿐이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이때다 싶을 때, 있는 힘껏 반 옥타브 높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고개는 아주머니를 향했지만 눈동자는 대야 안의 포도즙 봉지들을 곁눈질했다.



​“안녕하세요!”



​바닥을 향하던 아주머니의 굽은 등이 서서히 펴졌다. 까무잡잡한 얼굴 위로 환한 웃음이 번졌다. 팍 쓰여 있던 인상에 깊게 패어 있던 이마 주름이 매끈하게 펴지고, 대신 눈가에는 물결 같은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깊어졌다.


​꾹 다물려 있던 입매가 느슨해지며 하얀 치아가 보였다. 검보랏빛 얼룩이 엉겨 붙은 고무장갑 너머로 아주머니의 이빨이 유난히 하얗게 드러났다. 늘 무섭게만 보이던 아주머니의 얼굴이 내 인사 한마디에 어린애처럼 귀엽게 변하는 순간이었다.


​“하이고, 벌써 4시네. 학원 가는구나.”


​아주머니는 내가 지나는 시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를 다 알고 있다는 아주머니의 말에 등 뒤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렀다. 아차, 오늘은 내가 학원에 늦었는데. 아주머니의 시선이 시계로 향할까 봐 나는 더 바짝 입꼬리를 올렸다.


​아주머니는 앉아 있던 나무의자를 뒤로 드르륵 밀어내며 자리를 넓혔다. 그러고는 고무장갑 낀 손을 물속에서 천천히 빼내더니, 내 앞에서 ‘앞으로 나란히’ 자세를 취했다.


​톡, 톡. 아주머니의 손끝에서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아주머니는 대야 안에서 포도즙 하나를 조심히 꺼내 들더니, 그 봉지를 자신의 뱃살 부근에 대고 슥슥 문질러 건네주셨다.


​손에 쥔 봉지는 차가웠다. 아주머니가 미처 닦지 못한 끄트머리에만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나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예쁘게 하고 뒤돌자마자 이빨로 봉지 귀퉁이를 뜯어 포도즙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집에 있는 냉장고에 쌓여 있는 포도즙은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아주머니가 건네주신 이 포도즙은 왜 이리 달기만 한지 모를 일이었다.







​아줌마의 옷에는 또 물 얼룩이 생겼다.

유일하게 마른 부분이었던 자리를 내게 내어주셔서 결국 아주머니의 옷은 얼룩으로 가득해졌다.






​아이에게 인사만큼은 잘하라고 수백 번 말한다.
다정한 인사가 때로는 가장 단단한 보호막이 된다는 걸 알기에.
내 싹싹한 인사의 시작이 포도즙이었을까.
​포도즙을 기대하며 높였던 반 옥타브의 목소리를 아주머니는 이미 아셨을 것이다.
물 한 방울 튀기지 않으려 불편한 자세를 마다하지 않고,
작업복의 가장 깨끗한 곳에 물기를 닦아 포도즙을 건네던 아주머니.
그 아무 말 없는 다정함이 아홉 살의 나를 지켜내던 든든한 하루였음을 이제는 안다.
나를 키워낸 건 누군가가 그냥 건네준 착한 마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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