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유난로] 500원짜리 입장료에 포함되지 않았던 것

신발 속에 남겨진 뎁혀진 온기

by 사소한수집가
나는 그날의 추위가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는 나를 북극곰처럼 만들었다.

패딩 지퍼가 턱 끝을 자꾸 찔러서

고개를 내릴 수가 없었다.


턱밑에 단단히 묶인 목도리 매듭 때문에 숨이 막혔다.

목도리 털이 날려 입안으로 들어오면

손가락을 넣어 빼내야 했다.


엄마의 입술이 바쁘게 움직였지만,

목도리 안에서는 그냥 웅웅 거릴 뿐이었다.


현관 바닥에 앉아 신발을 신는데

발가락이 꽉 뭉쳐 있었다.

엄마는 기어코 양말을 두 겹이나 신겼기에

신발 안이 꽉 찼다.


발등이 터질 것처럼 아팠지만

나는 조용히 신발 뒤축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턱 끝을 찌르는 지퍼를 참고 가만히 서 있는 게

밖으로 나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놀이터는 텅 비어 있었다.

그네에 앉아 발끝으로 모래바닥을 툭툭 쳤다.


발가락이 신발 안에서 꼼짝도 안 하니까

모래 그림도 잘 안 그려졌다.


놀이터 입구를 바라보며

약속하지도 않은 친구들을 기다렸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기에는 억울했다.

문득 저쪽 골목 끝에 있는 방방이가 생각났다.




“문 안 열었을 거야, 분명히 안 열었을 거야.”



혼자 중얼거리며 방방이를 향해 갔다.

평소라면 안에서 뛰는 아이들의 형태가 보여야 하는데,

날이 추워 그런지 비닐하우스가

안개라도 낀 것처럼 뿌옜다.


하얀 수증기가 서려 속이 전혀 보이지 않자

기어코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입구까지 가서

고개를 빼꼼거렸다.


비닐하우스 입구에는 방방이 아저씨가 서 있었다.



“방방이 타게?”



아저씨가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머니에서 손가락 끝에 닿는 차가운 500원짜리 동전을 꺼내 아저씨의 장갑 위에 놓았다.


아저씨는 그물망 문을 철-컥 열어주었다.


신발을 벗고 그물망 위로 올라가자 발가락들이 겨우 퍼지는 것 같았다. 발바닥에 닿는 초록색 그물이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신났다.


중앙으로 뛰어가서 발가락 힘으로 힘껏 날아올랐다.

통, 통. 몸이 위로 붕 뜰 때마다 턱을 치던 목도리가 스르르 풀려 그물망 저 끝에 던져두었다.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아무도 없었지만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 봐

아주 작게 중얼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아무도 없는 지금 방방이를 정복한 나는 세일러문이다.


이번에는 셜록스에게 잡히지 않을 만큼 빠른 천사소녀 네티처럼 모서리 쪽으로 아주 빠르게 뛰었다.


발바닥이 두꺼운 도화지처럼 딱딱해졌지만

아무 생각 없었다.

그냥 계속 더 높이 날아오르고만 싶었다.


킁, 하고 콧물을 끌어올려 보내도

더 이상 올라가지 않고 입술까지 흘러서야

방방이 문을 열었다.


계단 밑으로 내려와 신발을 신는데,

발이 커졌는지 아까보다 신발이 더 안 들어갔다.


구겨 신지 않으려고 손가락을 틈새에

끼워 넣어 억지로 뒤축을 세웠다.


그때 아저씨가 나를 불러 세웠다.



“이제 가려고?”



“.. 네.



“여기 들어갔다 가렴.”




아저씨는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뒤돌아 앞장섰다.

나는 별수 없이 그 등 뒤를 쫓아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기름 냄새랑 지저분한 땀 냄새가 섞여 났다. 훅 하고 들어오는 따뜻한 바람 때문에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그제야 아! 춥다.

입술이 달달 떨렸다.

방 안에는 아저씨 옷들이 여기저기 던져져 있었고, 가운데 있는 난로는 기름때 때문에 찐득찐득해 보였다.


‘아, 여기에 방이 있었구나!’


“여기 앉아.”



아저씨가 바닥에 놓인 옷뭉치를 치워주었다.

나는 엉덩이만 아주 살짝 붙이고 무릎을 세워 앉았다.


바닥이 지저분해서 내 몸이

최대한 안 닿게 하기 위한 자세였다.

아저씨가 내 다리를 잡더니

훅 난로 쪽으로 다리를 쭉 펴게 만들었다.


땀과 녹은 눈으로 축축해진 양말 바닥이

아저씨 손에 닿을 때 발가락을 오므렸다.



'아저씨는 아무 말도 없었다.

이럴 거면 나를 왜 여기 데려온 거야!'



어른이면 재밌는 얘기라도 해줘야지.

아무 소리도 없는 방 안은

꼭 끝나지 않는 수업 시간 같았다.


나는 무릎을 꼿꼿이 펴고 앉아

손톱으로 장판만 벅벅 긁었다.

바닥에선 딱딱하고 기분 나쁜 소리가 났다.


하는 수 없이 시간을 보낼 것을 찾다가

등유 난로 속 불꽃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탁, 탁, 불꽃 튀는 소리가 꼭 초침 소리 같았다.

불꽃은 아주 진한 오렌지색이었다가

끝부분만 파랗게 변하기도 했다.


이 방은 좁고 냄새나고 지저분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그래도 집에 가면 언니랑 남동생한테 자랑할 거리가 생겼다.


아무도 못 들어오는 저 철문 안에는 방이 있고,

나는 거기 들어가 봤다고 얘기해 줄 셈이다.


방방이 아저씨는 이제 다른 아이들보다

나랑 더 친할 거다.



​발가락이 뜨거운 온도에 간질간질하면서 녹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다 녹은 발을 티 내려고 발가락 춤을 췄다.






아홉 살의 나는 알지 못했다.
500원을 벌기 위해 방방이를 열었던 아저씨가 내 발을 녹여주려 등유난로를 내어주던 그 마음을.
난로 앞에서의 지겹고도 어색했던 시간,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신발 안을 가득 채웠던 온기는 기억보다 오래 피부에 남았다.

​어른의 간섭이 불편하던 아이의 마음과,
오지랖을 부릴 수밖에 없던 어른의 마음을 이제는 동시에 품고 산다.
나를 키워낸 건 이토록 뭉근하게 전해지던 체온의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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