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간 인턴 과정을 마치고 부모님과 함께 일본 여행을 떠났습니다. 9월 말 오사카 날씨는 한국의 장마철과 유사했습니다. 오사카에서 종종 들리던 한국말은 하루카를 타고 교토로 넘어가자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숙소는 교토에 위치한 사찰 '청수사'와 5분 거리 떨어진 일본식 전통 가옥. 숙소까지 가는 길은 다소 험난했습니다. 언덕길이 이어졌고 50미터 간격으로 계속되는 자판기들에 일본에 왔음을 느꼈습니다. 2000년 당시 일본에는 560만 개의 자판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인구가 1억 3천만 명이었기에 계산해 보면 23명당 자판기가 1개꼴입니다. 예전 같지 않지만 지금도 400만 개가 넘게 있다고 합니다.
일본의 자판기 문화?
일본의 자판기에는 음료부터 칫솔, 맥주, 담배, 토스트까지 사실상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물건들은 전부 자판기로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자판기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판기 보급에는 일본의 경제적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일본은 버블 경제 당시 부동산 가격이 급격하게 상승하였고 지속되는 저출산 고령화 현상으로 인건비가 상승하고 노동력은 감소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판기사업은 자연스럽게 번창하였죠. 적은 공간을 활용하며 인건비를 아낄 수 있으니깐요.
숙소 가는 길에 찍은 청수사 골목 / 일본 전통 가옥 숙소 내부
일본 여행을 하며 일본의 문화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여전히 자판기와 현금을 선호하는 아날로그 감성을 지닌 나라. 장인 정신과 가업을 대대로 물려주는 사람들. 분명 경제적으로 발전한 국가임에도 색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과거를 이해해야 합니다. 저는 현재 일본의 모습을 영화를 통해 풀어보고자 합니다.
먼저, 일본의 경제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아날로그 문화, 장인 정신, 가업 계승은 글로벌 트렌드와는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아날로그 문화를 가진 일본의 경제 수준은 여전히 높습니다. 물론, 1980년대 일본에 비해서는 급격하게 경제적으로 폭락하였습니다. 일본은 1990년대 버블 경제 붕괴로 아주 오랜 경제 침체를 겪고 있습니다.
2019년에 개봉한 '날씨의 아이'는 일본의 사토리 세대가 느끼는 일본의 현재 경제 상황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일본 사토리 세대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 초반에 태어난 세대를 말합니다. 이들은 일본의 경제적 불황, 저성장 그리고 급변하는 사회를 모두 경험하면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날씨의 아이' 감독인 '신카이 마코토'는 한국인에게 친숙한 감독입니다. <스즈메의 문단속>, <너의 이름은>의 감독을 맡았으며 이 영화들은 한국에서 꽤나 흥행했습니다. 감독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기생충'과 '날씨의 아이' 모두 시대적인 영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시대를 반영하지 않아도 사회 분위기를 호흡하며 영화를 만들면 시대를 담은 영화가 나오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날씨의 아이'는 '비'를 소재로 일본의 사회 분위기를 그려냅니다. 오랜 시간 비가 그치지 않는 도쿄, 취업이 어렵다고 말하는 나스미, 알바를 전전하지만 대책을 찾지 못하는 젊은이들. 영화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오랜 기간 경제 침체로 고통받고 있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랜 비로 물에 잠긴 도쿄를 보며 "도쿄는 원래 바다였다. 원래 바다였던 곳이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라고 말하는 한 노인.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한때 버블 경제로 부풀 었던 일본의 경제가 무너지며 원래로 돌아감을 표현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잠깐동안의 꿈이었던 것이죠.
일본의 버블 경제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일본은 경제적으로 엄청난 호황기를 누립니다. 당시 호황기를 일반적으로 일본 버블 경제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폐전국인 일본은 폐허가 된 일본을 복구하고 기존의 장인 정신과 근면, 성실함으로 급성장을 이룹니다. 1980년대 세계 50대 기업의 대부분이 일본 기업인 것으로 보아 일본의 세계적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당시 미국은 경제적으로 침체기였습니다. 레이건 정부의 고금리 정책은 미국 경제를 최악으로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현재 바이든 정부에서 논의되는 미국 '셧다운'이 레이건 정부 때는 8번 '셧다운' 되었습니다. 최다 셧다운 기록을 가진 레이건 정부입니다. '셧다운'이란 연방정부가 예산안을 통과시키지 못해 정부의 업무가 중단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레이건 정부의 고금리 정책으로 미국의 세계 시장에서의 산업 경쟁력은 하락하였습니다. 당시 미국의 대외 무역수지 불균형으로 심각한 재정적자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일본 제품은 미국 시장에서 호황이었습니다. 무역수지 불균형이 심각해지자 미국은 극단적인 조치를 취합니다. 바로, <플라자 합의>입니다. 미국 뉴욕에 위치한 플라자 호텔에서 미국은 G5 국가들에게 각국의 통화 가격을 높여 달러화 강세를 유도했습니다.
뉴욕 플라자 호텔 모인 G5 국가 재무장관들
버블은 이때부터 징조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달러가 강세를 보이자 일본 대미 수출은 저조해지고 일본 정부는 내수 시장 활성화를 위한 정책을 펼칩니다. 먼저, 금리를 인하해 내수 시장 활성화를 유도했습니다. 기업과 개인은 저금리로 대출을 받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대출받은 돈은 내수시장 활성화가 아닌 부동산, 주식 시장에 쏠리기 시작합니다. 니케이 지수는 치솟았고 주식 시장이 활성화되자 사람들은 대출을 받아 투기를 시작합니다. 부동산 시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일본의 땅값은 미국의 100배가량이었습니다. 기업들은 대출 자금으로 설비 투자가 아닌 부동산 시장에 투자하였고 부동산을 구매하고 다시 그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 형태를 반복합니다.
일본 경제 버블은 심각해졌고 일본 정부는 심각성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그리고는 부동산 대출 규제와 금리 인상을 감행했습니다. 당시 부채 수준이 높았던 일본 기업들은 파산하였고 개인들은 빚에 허덕였습니다. 버블은 단숨에 꺼졌고 일본의 긴 경제 침체가 시작됩니다.
최근, 투자의 귀재 '워렌 버핏'이 일본 종합 상사 지분을 늘리며 일본 주식 시장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최근 닛케이 225 지수는 33년 만에 일본 버블 경제 시기인 1990년 7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식 시장 반등에도 일본인들은 저축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정작 일본인들은 "주식에 손대지 말라"는 부모 아래서 큰 버블 경제 이후 세대입니다. 오랜 침체에 빠진 일본인들은 자국에 대한 신뢰가 낮은 상황입니다. 영화 '날씨의 아이' 에서 날씨를 다루는 소녀 '히나'가 만든 맑은 날씨의 도쿄는 일본인들의 오랜 염원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