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여행 동안 바티칸 미술관에 두 번 갔던 우리는, 실은 트레비 분수에는 세 번이나 갔다. 20여 년 전 로마여행에서 나도 분명 수많은 관광객들처럼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졌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분수 앞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 나도 따라 했긴 했는데, 대체 분수가 어떤 모양새였는지 기억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인상이 남아 있지는 않았다. 단지 그 근처에서 먹었던 피자가 정말 맛없던 기억뿐이다.
당시 세 밤을 자며 이틀 동안 머문 로마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소는, 자그마한 분수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하고 웅장한 콜로세움과 온 세계 젊은이들이 칸칸이 빽빽하게 주저앉아 젤라토나 맥주를 마시면서 웃고 떠들던 스페인 계단이었다. 그러니 아이들도 콜로세움을 보면 당연히 나처럼 그 웅장함에 넋이 나갈 거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콜로세움을 돌아보는 동안 한없이 지루해하던 아이들은 눈앞에 트레비 분수가 나타나자마자, 오래전 내가 콜로세움 앞에서 했던 것 이상의 경탄을 쏟아내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더 이상한 건, 아이들과 함께 20여 년 만에 다시 보는 트레비 분수가 내게도 아주 낯설고, 새롭고, 그리고 진짜 콜로세움보다 아름다워 보이는 게 아닌가!
"엇, 이상하다. 트레비 분수가 예전에도 이렇게 생겼었나? 왜 이렇게 새롭고 멋지고 아름답지?"
검색해 보니 2015년쯤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한 모양인데, 그렇다고 같은 분수가 그렇게까지 달라 보일 수 있을까? 그렇다고 그 웅장한 콜로세움보다 그냥 골목길 한 모퉁이에서 솟아 나오는 분수가 어떻게 더 멋져 보일 수가 있을까? 쓸데없는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또 쓸데없는 문제에 대한 분석을 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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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내가 로마를 방문한 건 2003년이었는데 그때 내게는 <<글래디에이터>>라는 영화에 대한 기억이 아주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콜로세움에 들어 선 순간, 영화 속 장면들이 떠오르면서 무너진 담과 바닥들이 내 상상 속에서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기에 그곳은 내겐 그냥 폐허가 아니었다. 피 흘리는 검투사들과 그곳을 가득 채운 군중들의 함성마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내게 그렇게 깊은 인상이 남아있는 곳이었기에 나는 이번 여행에서는 그때는 가볼 수 없었던 콜로세움의 지하까지 탐험해보고 싶었다. 알아보니 지하는 가이드 없이는 들어갈 수 없었고, 약 1시간가량 콜로세움의 공식 가이드 투어가 있었다, 물론 영어로 진행하는. 나는 아이들에게 그 정도의 영어 듣기가 가능한지 사전에 의견을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둘 다, 자신들의 영어 '듣기 평가' 실력을 과시하며, 게다가 다른 외국인들과 함께하는 투어라니 기대가 된다며 흔쾌히 예약하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오후 1시쯤 진행하는 투어를 예약했다. 내 계획상으로는 오전에 콜로세움으로 가서 여유롭게 전체 외관을 둘러본 후에, 점심을 먹고 투어에 참가하면 되겠다 싶었다. 그러나 예상이 언제나 빗나가듯, 계획은 언제나 변경된다. 볼 게 너무 많아서 한 생으론 부족하다는 로마에서,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걸어 다닐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의 체력은 하루 이틀 시간이 갈수록 급격히 소모되었고 그래서 숙소에서 나오는 것도 점점 더 늦장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도 늦장을 부리며 숙소에서 느릿느릿 나온 우리는, 숙소부터 걷자면 20분은 걸린다고 알려주는 구글맵을 들여다보면서 그렇다면 오늘은 버스를 한번 타 보자고 했다. 미리 계획하고 알아보기를 좋아하는 나는 로마의 버스표는 'TABACCHI'라고 쓰여 있는 가게에서 사면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버스에 타면 티켓을 펀칭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걸어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TABACCHI'를 목격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들어가서 말했다.
"버스표 좀 줘."
"버스표 없어."
엥? 왜 없지, 다 나갔나? 당황한 나는 가게 주인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내가 어디서 버스표를 살 수 있는지 알려줄 수 있어?"
"나가서 쭉 간다음에 오른쪽으로 돌아서 가봐"
그가 알려주는 대로 가보니, 다행히 또 다른 'TABACCHI'가 있다.
"버스표 좀 줘."
"버스표 없어."
엥? 왜 또 없지, 여기도 버스표가 다 나갔나? 나는 당황해서 또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내가 어디서 버스표를 살 수 있는지 알려줄 수 있어?"
"몰라."
엥? 왜 버스표가 또 없지. 두 번이나 실패하자, 아이들은 그냥 빨리 걸어가자고도 하고 택시를 타자고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상한 오기가 발동해서, 반드시 버스를 타야겠다는 아니 반드시 버스표를 손에 넣어야겠다는 참을 수 없는 욕망이 솟구쳐 오르는 게 아닌가. 나는 어차피 버스를 한 두 번은 타야 할 테니 생각난 김에 버스표를 구해두자고 아이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지나가는 길에 보이는 모든 'TABACCHI'에 들렀는데, 그들은 모두 내게 "버스표 없어"라는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뭐지? 인종차별인가? 아니면 내가 여자라서 그런가? 별의별 추측을 다 해봤지만, 별로 논리적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어쨌든 결론은 'TABACCHI'에서 버스표를 사는 건 글렀다는 거였다. 나는 지나가는 버스 안에 탄 사람들을 아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들을 붙잡고 '당신들은 대체 어떻게 버스를 타고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나는 로마의 한복판에서 절규했다.
"아~ 정말, 너~어~무 버스 타고 싶다~!"
처음엔 버스'표'에 집착하는 나를 말리려다가, 저 혼자 미쳐 날뛰는 욕망을 도저히 막을 수 없다는 걸 알아챈 딸들은 '어디 한번 갈 때까지 가보슈'라는 심사로 나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결국 절망하고 절규하는 어리석은 나를 토닥거리며 위로까지 해줬다. 그런 인내심 많은 딸들 덕분에 마음의 평안을 되찾고 생각해 보니, 대체 요즘에 누가 버스'표'를 쓰겠냔 말이다, 이 '지지리 궁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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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가다 보니, 걸어서 20분 걸린다는 콜로세움까지 1시간쯤 걸려 도착하고 말았다. 나는 버스'표'에 기운을 뺏기고, 딸들은 그런 나에게 기를 빨렸으니, 콜로세움 앞에 선 우리는 우선 뭔가를 먹어서 기운을 차려야만 했다. 투어 예약 시간까지는 벌써 얼마 남지 않았기에,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곳을 찾아 거의 달려가서 (주문한 음식은 꼭 이럴 때마다 왜 그렇게 늦게 나오는지) 급하게 먹고 다시 달리다시피 투어 시작 장소를 찾아갔다. 하~ 그런데 로마에서는 그렇게 달릴 필요가 없다는 걸, 우리는 아직 몰랐다.
우리가 예약한 투어 시작 시간은 오후 1시 15분이었고, 착실하게 살아온 나는 그렇게 여러 나라의 사람이 함께 모이는 행사이므로 10분 전쯤에는 모여서 분위기 파악과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입구에서부터 아직 예약시간이 아니라며 정각에 오라는 말과 함께 퇴짜를 맞은 것이다. '오잉? 들어가서 만남의 지점까지도 찾아가는데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을 텐데. 그래그래 사람들이 너무 많이 들어가면 복잡하니 그럴 수 있지. ' 우리 셋은 남은 시간 동안 입구 옆 계단에 앉아 숨을 고르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우리처럼 정시가 되기 전에 찾아온 사람들이 우리처럼 퇴짜 맞는 모습을 지켜보니,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것에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드디어 들어갈 시간이 되어 입장을 하니 어느 표지판 아래에서 기다리라는 안내를 받았다. 기다리고 있자니 우리와 함께 투어를 갈 사람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저 사람이 왔으니 이제 출발하려나 했지만, 잠시 후 또 다른 사람들이 왔고, 아 저 사람들을 기다리느라 아직 출발을 안 했나 싶었으나, 잠시 후 또 다른 투어객이 왔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가이드처럼 보이는 사람은 나타나지를 않는 거였다. 그렇게 콜로세움 지하의 추위 속에서 사람들 구경을 하면서 40여 분의 시간을 보내고 나자, 드디어 아름다운 가이드가 나타나 우리를 지하로 안내했다.
그러나 콜로세움까지 오면서 이미 너무 많은 힘을 뺐고, 급하게 점심을 먹고 쓸데없이 뛰어다닌 데다가, 그날따라 해도 없는 추위 속에서 오래 기다린 탓일까. 콜로세움 지하는 더욱 춥고 음산하게 느껴져 중요 포인트에 멈춰 아름다운 가이드가 오래 설명할 때마다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만 들 뿐이었다. 딸들의 표정을 보니 나와 비슷한 마음인 듯했다. 지하 투어가 끝나고 전망대에 오른 딸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콜로세움이 하나도 안 웅장해서 실망이야"라면서 인스타에 올릴 셀카만 계속 찍어댔다.
*
그런 딸들 옆에서 바라보자니, 아닌 게 아니라 내게도 콜로세움이 예전의 그 콜로세움이 아닌 것 같았다. 온갖 고초를 겪으며 너무 힘들게 와서일까? 아니다, 힘들여 만난 존재는 오히려 더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하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아니면, 딸들의 분석대로 베드로 성당과 바티칸 미술관이라는 최고 문명의 산물을 먼저 보았기 때문에, 그 '따위' 폐허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일까.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고대의 유적 '콜로세움'이 일개(?) 분수보다 못하다는 평가는 너무 야박한 것이 아닐까.
그날들의 사진을 다시 오래 들여다본 나의 결론은, 아무래도 날씨 때문이 아닐까 싶다. 따뜻한 겨울임에도 황사 따위는 하나도 없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파란 하늘로 우리를 매료시켰던 로마의 하늘이, 콜로세움에 가는 날에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인간도 자연이므로 당연히 자연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날 내가 미친 듯이 버스'표'에 집착했던 것도 어쩌면, 날씨 탓일지도 모르겠다(라는 변명을 해본다).
이렇게 트레비분수와 콜로세움 사진을 나란히 놓고 보니, 새파란 하늘에 새하얀 대리석에 수놓은 화려한 장식적인 조각들이, 음산한 폐허의 돌무더기보다는 추운 겨울날 여행자의 마음을 잡아끄는 면이 있을 것 같다. 그래도 그렇지. 나에게 20여 년간 로마를 그리워하게 해 줬던 콜로세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다시 20여 년 전 사진첩을 뒤적거렸다.
그때까지는 아직 사진 인화(印畫)의 습관이 남아있어서, '디카'로 찍은 것들 중 중요한 사진은 다시 사진첩에 종이 실물로 꽂아두었던 것이다. 그렇게 프린트한 몇 장 되지 않는 사진들 중에 일개(?) 트레비 분수는 당연히 들어있지 않은 반면, 콜로세움은 꽤 여러 장이 들어있다. 그때는 콜로세움 지하가 개방되어 있지 않아서 위에서 아래로만 내려다볼 수 있었다. (왼쪽 사진) 이번에는 콜로세움 지하 투어를 예약한 탓에, 밖을 둘러볼 새도 없이 먼저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올려다보아야만 했다. (오른쪽 사진)
보이지 않는 그곳이 얼마나 깊은지 또 그 아래 깊은 곳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채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때 느껴지는 존재감과 안에 든 것을 다 알고 나서 겉을 바라볼 때에 느껴지는 존재감에는 분명 큰 차이가 있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를수록, 큰 신비감이 뿜어져 나올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나. 그러니 혹시 콜로세움에 가게 된다면, 지하 투어는 가장 마지막으로 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