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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Jun 30. 2023

나는 나 자신에게 장애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에픽테토스 느리게 읽기

겨울이 지나 봄이 오는 사이에, 나는 지난해 내가 공들여 쓴 글들을 모으고 다듬어 모처에서 진행하는 우수콘텐츠 제작 지원 사업에 응모해 보기로 결심했다. 당선되고 싶다는 마음보다, 그런 기회에 내가 쓴 글을 다시 돌아보면서 고치고 정리하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실상 허술한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이 여러 해동안 꼼꼼히 준비해 온 실력자들이 수없이 많을 테니, 그런 당선은 (아직은) 가당치 않다. 그래서 결과 발표 일정에는 신경 쓰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발표일자가 다가오자 내 마음은 나의 예상과 달리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당연히 탈락되었을 텐데, 나도 인간인 이상 그래도 기분이 상하면 어떡하지? 그러면 나는 '탈락해서 실망한 나 자신'을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할까. 아니지 그것보다, 혹시라도 운이 좋아 선정이라도 된다면 그건 더 큰일이다. 이 부족하고 부끄러운 글을 행여 더 많은 사람들이 읽게 된다면, 그건 너무 부끄러워서 어쩌면 죽고 싶을지도 모른다. 대체 나는 왜 이런 데 응모한 거지? '아, 어쩔끄나!' 이런 하나마나한 '씨잘데기 없는' 망상들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안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런 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내겐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나는, 옆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말보다 이상하게도 오래전 죽은 사람들이 남긴 책의 말을 더 잘 듣는 나는, 온라인 서점 장바구니에 담아 둔 책 목록을 살펴보았다. (나의 서점 장바구니에는 언제나 못 다 산 책들이 즐비하다!) 그랬더니 그중 두 권의 책이 눈에 계속 밟혔다. 2천 년 전 노예로 태어나 철학자로 죽은 <<에픽테토스의 강의>>와 현대의 문학과 예술, 정치와 혁명에 대해 친구들과의 대화를 나누는 모리스 블랑쇼의 <<우정>>. 둘 다 곁에 오래 두고 읽을만한 책이지만, 두께도 책값도 만만치 않아 장바구니 속에만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래, 만에 하나 운이 좋아서 내 작업물이 우수 콘텐츠로 선정된다면, <<우정>>을 주문해서 열심히 읽기로 하자.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건 내 보잘것없는 글의 의미를 알아준 누군가를 만났다는 것이고, 부끄럽지만 더 많은 이들에게 친구가 되자고 손을 내미는 일이 될 테니까. 아마 당연한 일이겠지만, 선정에서 탈락된다면 <<에픽테토스의 강의>>를 주문해서 읽기로 하자. 노예로 태어나 철학자로 죽은 그는 분명, '탈락의 고배'를 마신 내게 담담한  위로와 따끔한 채찍질을 선사해 줄 수 있으리라. 이런 결심을 하자, 나는 금세 기분이 좋아지고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 이건 마치, 책을 사기 위해 우수 콘텐츠에 응모한 것만 같은 것이다!)


*


선정작 발표가 있던 날 나는 나의 예상대로, <<에픽테토스의 강의>>를 주문하게 되었다. 책이 도착하자마자, 첫 장을 펼쳐보니 제1장의 제목이,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과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다. 딱 적절한 타이밍에 내게 잘 들어맞는 이런 절묘한 문장이라니! (역시 나는 이 책을 읽기 위해 우수 콘텐츠에 응모하고 탈락되었던 것인가!) 나는 천천히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고대 희랍어를 번역한 문체가 어색하기도 하고, 에픽테토스가 직접 책을 쓴 것이 아니라 서른 살쯤에 그의 강의를 들었던 아리아노스가 쉰 살쯤이나 되어서야 그의 강의를 기록한 책이라 그런가 강의의 문맥들도 조금 두서가 없어서 읽기에 편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런 모든 불편함을 무릅쓰고 읽고 싶게 만드는 '명 문장'들이 수두룩하다. 특히 강의 중에 에픽테토스가 '이 노예야'하고 나를 부를 때, 여전히 노예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떠올라 뜨끔해서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된다.   


책의 처음에, 에픽테토스는 무엇이 우리에게 달려있는(속한) 것이고 무엇이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은(속하지 않은) 것인지에 대한 분별을 촉구한다. 그는 우리의 몸조차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은 외부의 사건이라 부른다.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다. 어느 날 우연한 유전자들의 조합으로 생겨난 내 몸은 또 어느 날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을 맞이해 다른 것으로 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혼 속에서 판단하면서 내가 행위하도록 만드는 나의 의지뿐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잘 훈련되어야만 실제로 나 자신에게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훈련된 이성적인 능력을 '인상(phatasia)을 사용하는 능력'이라 부른다.


"신들은 모든 것 중에서 단지 가장 뛰어난 것, 다른 모든 것들을 지배하는 것, 즉 인상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만을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에 놓아두었던 것이네."


"우리가 외적인 것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제우스께서는 나 자신의 몫을, 즉 충동과 반발의 능력, 욕구와 회피의 이 능력을 한마디로 말해서 인상을 사용하는 능력을 줬던 것이네."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 것인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을 최선을 것으로 만드는 것이고, 다른 것들은 그 자연대로... 신의 뜻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네."


그러나 보통 우리는 자신에게 속한/달려있는 것보다는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달려있지 않은 외부의 것들에 훨씬 더 마음을 쓰며 산다. 그래서 안달복달하고, 불안하고, 슬프고, 때로는 기쁘지만 그 기쁨은 내게 속한 것이 아니기에 곧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더 큰 공허감이 치고 들어온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느라고 우리는 자신에게 속한 것을 그냥 내버려 둔 채로,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기쁨이나 행복은 알지 못한 채로 살다가 죽는 것이다.


그렇기에 에픽테토스가 철학을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내리는 처방은, 무엇이 내게 속한/달려있는 일이고 무엇이 내게 속하지 않은/달려있지 않은 것인가를 분별하는 훈련, 그리고 내게 속하지 않은/달려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본래의 주인에게로 되돌려주려는 태도에 대한 훈련이다.


"그러면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를 돕기 위해 무엇을 가까이 준비해 두어야만 하는가? 내 것이 무엇이고 내 것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 또 내 능력 안에 있는 것과 내 능력 안에 있지 않은 것을 아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있겠는가?"


"네가 이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너의 모든 것을 이 능력에 내맡긴다면, 결코 방해받지 않을 것이고, 결코 훼방받지 않을 것이고, 결코 깊은 한숨을 내쉬지 않을 것이고, 결코 누군가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고, 결코 누구에게도 아첨하지 않을 것이네."


"나는 죽어야만 하네. 지금 당장이라면 당장 죽자. 잠시 뒤라면 식사할 시간이 왔기 때문에 지금은 식사를 할 것이네. 그런 연후에 죽는 것으로 하자. 어떻게?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되돌려주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것처럼."


*


우수 콘텐츠 선정은 내게 달려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그걸 이용해서 내가 쓴 글을 다시 고쳐보겠다는 나의 의지는 내게 달려있다. 내게 달려있는 것과 내게 달려있지 않은 것들은 내 삶에서 이런 식으로 계속 뒤섞여 있고, 내게 속하지 않은 것을 내게 속한 것에 대한 훈련에 이용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잠시 정신줄을 놓으면, 내게 속하지/달려있지 않은 것들은 거대한 힘으로 나를 압도한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내게 달려있지 않은 것에 대해 재빨리 간파한 나의 의지가 '인상을 사용하는 능력'을 발휘한 덕분에, 나는 평소에 읽고 싶던 책을 손에 넣었고 그 안에서 다시 내게 속한 것과 아닌 것을 일깨우는 스승을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스승님은 뭐랄까... 너무 냉정해서 '쎄'하지만 그래서 또 쿨한 것 같고, 너무나도 이성적이지만 동시에 어쩐 일인지 유머감각이 탁월해서 자꾸만 나와 내 의지를, 매료시킨다. 그래서 아직 책을 몇 장 읽지 않았는데도, 자꾸만 '지금 이것이 내게 속한-달려있는 것인가, 속하지 않은-달려있지 않은 것인가'를 자꾸 묻게 만든다. 게다가 그런 물음들 앞에 놓인 것들은 대체로 내게 속하지 않은 것들이라, 그것들로부터 내 신경을 거두고 내 의지가 하려던 일에 (물론 아주 잠시 뿐이긴 하지만) 다시 매진하게 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는 중이다.


" '그렇다면 나는 너를 결박할 걸세.' 인간아, 너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나를 결박한다고? 나의 발을 결박할 수는 있지만, 나의 의지만큼은 제우스조차도 지배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너를 감옥에 처넣겠다.' 내 보잘것없는 육체를. '나는 너의 목을 베겠다.' 왜, 내가 언제 자를 수 없는 목을 가졌다고 말한 적 있는가? 이 모든 것들을 철학하는 자는 연습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들을 날마다 글로 써야만 하고, 또 이것들을 통해 자신을 훈련시켜야만 한다."


그렇지. 철학이란 읽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고, 그저 한 순간 깨우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몸에 달린 손으로 날마다 쓰면서 몸에 새기는 것이고, 그러면서 동시에 몸과 딱 붙어있는 영혼에까지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신체적 훈련을 통해야만 비로소 내 영혼의 의지가 내게 속한 의지가 된다는 것을, 또 깜빡 잊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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