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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Jul 04. 2023

다른 길이 없다면, 적어도 그것을 싸게 팔지는 말게나

에픽테토스 느리게 읽기

아주 오래된, 그런 만큼 아주 드문드문 만나는, 친구가 하나 있다. 만날 때마다 그는, 나로서는 감히 해 볼 엄두도 낼 수 없는 새로운 사업에 늘 투신 중이다. 지난번 만났을 때의 그는 부동산 중개업소 사장님이었는데, 이번에는 유명한 프랜차이즈 카페의 사장님이 되어있었다. 개업을 축하하러 갔더니 그는, 내가 묻지도 않은 그 사업에 관한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아르바이트생들의 선발과 관리, 본사의 교육과 홍보 전략, 그 와중에 시작된 법률적 싸움 등 그는 그 모든 것 해내느라 방광염까지 걸렸다고 했다. 사업에 '사'자도 모르는 내가 그런 골치 아픈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는 친구의 삶을 그냥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방광염에 걸려버릴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온 나는, 엄마에게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릴 적 서로의 집에 놀러 다니면서 컸기에 엄마도 아는 친구이고, 오래간만에 엄마와 이야기를 주고받을 '공통의 화제'가 생긴 기회였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 이야기가 나오자 내 예상대로 엄마는 흥미를 보였다. 나는 최대한 여러 이야기를 덧붙여 그간 친구의 활약상과 그런 활약 덕분에 얻은 방광염까지를 (길게 말하는 걸 못하는 나로서는 좀 피곤했지만) 최대한 자세하게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런 친교의 노력은 결과적으론 둘 간의 다툼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 시작은 내 이야기를 듣던 엄마의 입에서 튀어나온, 나로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이 한마디였다.


"너도 걔처럼 그런 것 좀 해봐~!"


*


아이들이 어릴 때 엄마들이 보통 남에게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건, 공부 잘하는 자식이다. 읽고 쓰는 것에 적성이 맞는 내겐 학교 공부는 (수학 빼고!) 별로 어렵지 않았고, 그래서 대체로 좋은 성적을 유지했는데 우리 엄마도 역시 틈만 나면 남들에게 그걸 자랑거리로 삼았다. 나는 그게 싫으면서도 좋았고, 좋으면서도 싫었다. 그런데 아마 좋은 쪽이 조금 더 우세했던 것일까? 나는 읽고 쓰는 것에 대한 사랑보다는, 어디서든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점점 더 가까이 걸어갔던 것이다. (몸도 마음도) 어린 내겐 이런 말을 해 줄 에픽테토스와 같은 스승이 없었기에. (아니 어쩌면 들리지 않았을 수도...)         


"누군가가 일단 외적인 것들의 가치를 비교하고 또 그것들을 평가함으로써, 그러한 질문들을 시작하자마자, 그는 자신의 고유한 인간(퍼스낼리티)의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이니까 말이네."

 

에픽테토스의 강의 제2장은 <어떻게 인간은 모든 상황에서 자신이 누구인가에 따르는 것을 보존할 수 있는가?>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임을 보존하며 살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생각에 인간은 자기 자신임을 잃어버린 채로 계속 살아가기도 어려운 것 같다. 자랑거리 맛에 취해 살던 내가, 나이 마흔을 넘긴 어느 날부턴가 계속 이런 식으로는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느낀 것처럼 말이다. 그제야 나는, 에픽테토스 같은 스승의 말을 잘 들었더라면 사춘기에 할 수도 있었을, '내게 어울리는 일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진지하게 시작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에요.' 그것은 내가 아니라, 네가 고려해야만 하는 사항이네. 왜냐하면 너는 너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이고, 너는 너 자신에게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또 어떤 가격에 너 자신을 팔지를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네. 다른 사람들은 다른 가격으로 그들 자신을 파니까 말이네."


자신이 누구인가에 따르는 것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내가 누군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세상 어느 누구도 아닌, 나뿐이지 않을까? 물론 이런 '자기 인식'은 지난한 탐색과정이 필요한 길고 어려운 작업이다. 그런데 나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해 보기도 전에, 내가 '되고 싶은 것'에만 골몰했고 (세상이 내게 말해주는 대로)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나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고도 믿었던 것이다.


누구나 좋아하고 자랑할 만한 사람이 되려면 (내가 누군가와는 상관없이) 남들이 원하는 걸 나도 원해야 하고, 게다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내가 누군가와는 상관없이) 모두가 원하는 걸 다른 누구보다도 훨씬 더 강렬하게 원해야 한다. 사람들은 스스로 원하지 않는 걸, 어쩔 수 없이 원하면서 살아간다. 그건 우리가 천국이 아니라 속세에 살기 때문이고,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 연극을 훌륭히 해낼 수 있는 좋은 배우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연극을 의식할 수도 있고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런데 스스로는 원하지 않는 걸, 스스로 원하는 정도가 너무 커지면 자기 안에서 탈이 날 수밖에 없다. 어릴 적 좋은 성적을 원했던 나는, 읽고 쓰고 배우는 것 또한 함께 원했다. 그러나 학교가 아닌 다른 인생에서도 원했던 좋은 성적에는, 읽고 쓰고 배우는 것은 빠져 있었고, 그래서 원하지 않는 것들만 원하며 살아가던 나는 탈이 나 버렸던 것이다.


*


내가 누구인가 안에는, '엄마의 딸'이라는 역할도 포함되어 있고, 그 배우는 아주 오랫동안 주연을 맡아왔다.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나 자신을 아주 열심히 탐색하고 읽고 쓰면서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등 뒤에서 엄마가 소리 없는 눈총을 쏘고 지나가는게 느껴진다. 그러면 '엄마의 딸' 역할을 맡은 배우가 또다시 자기가 주연이라고 꿈틀거리며 글쓰기를 방해하기 시작한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카프카의 <아버지께 보내는 편지>나온다. '거대하기만 한' 아버지를 피하기 위해 카프카는 '몹시 바쁜 일이 있는 것처럼' 급히 자기 방으로 가서 문을 걸어 잠그고, 소파에 누워 몽상을 하고 자기 꿈을 기다렸다고 한다. 물론 나는 카프카 같은 위대한 작가도 아니고, 걸어 잠그고 몽상에 잠길 방도 없으며, 아무것도 안하면서 몹시 바쁜 척할 배짱도 내겐 없다. 그렇다고 이제 겨우 시작한, 나에 대한 탐색을 멈출 것인가?


나는 (귀찮고 힘들지만) 두껍고 무거운 <<에픽테토스의 강의>>를 들고 엄마에게 다가간다. 2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의 말과 글이 아직도 '실물로' 남아있다는 걸 보여주면서 말을 걸자, 엄마는 순간 '그~래~?'하면서 놀라는 척 해준다. 그런 엄마의 얼굴엔 사장님인 내 친구 이야기를 할 때보다 훨씬 더 흥미가 없는 표정이 역력하지만, 그간 '엄마의 딸' 때문에 주연을 못 맡았던 내 안의 다른 배우들의 얼굴엔 색다른 활기가 돌기 시작하는 걸 어쩌겠는가!


"내가 자연적으로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해 내 모든 돌봄을 포기해야만 할까? 전혀 그렇지 않네. 에픽테토스가 소크라테스보다 더 나을 수는 없을 것이지만, 그 경우에도 지나치게 나쁘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로서는 충분하네.... 한마디로 말해서, 단지 내가 최고의 것을 성취하는 것에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연습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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