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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Jul 07. 2023

문 닫힌 어두운 방 안에서도 결코 혼자라고 말하지 말라

에픽테토스 느리게 읽기


아주 어릴 적 잘 준비를 모두 마친 후, 나는 할머니를 따라 베개맡에 무릎을 꿇고서 십자고상을 향해 두 손을 모아야만 했다. 그러나 할머니가 눈을 감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주기도문을 외기 시작하면, 어린 나는 할머니 몰래 실눈을 뜨고 하늘 어디에 어떤 아버지가 계신가 매번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십자고상보다는 그 옆에 걸린 사진 속의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아무래도 하늘에 계시다는 아버지에는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어릴 적부터 기도에 단련된 나는, 자라면서도 또 성인이 되어서도 각종 종교 모임에 번갈아가며 출석했다. 그러나 착한 사람이 모인 곳에서 그들처럼 착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은 번번이 중단되고 말았는데, 어디서든 공부가 무르익으려 할 때마다 강조되는 '순종(順從)' 때문이었다. 순종이란, 뭔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버리고 계율에 따르는 것이며, 자신의 이성으로 확인해보지 않고서 믿는 것이다. 그러나 아주 어릴 적에도 실눈을 뜨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보려던' 내게, 그런 순종은 당최 헤쳐나가기 힘든 안개였다.


*


그러던 어느 날부터 나는 우연한 기회로 인문학공동체를 들락거리며 철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너무나도 이성적인 서양 철학자들의 논리는 내 맘에 쏙 들었고, 희망하는 바를 그저 믿는 게 아니라 그런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삶의 원리에 대해 알고자 하는 그들의 정신성은 감탄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보지 않고 믿을 것이 아니라, 남들이 못 보고 있는 것을 더 많이, 더 자세히 '보라'고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지금 알고 있는 것에 갇혀버리는 좁은 시야를 벗어나게 해주는 새로운 앎이 필요하다고 내게 알려줬다.


그러나 철학과 철학자들에게 대해 오래, 깊게, 생각해 볼수록, 철학자들은 모두 마음 깊은 곳에 (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굳건한 '믿음'을 간직한 이들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특히나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철학자-니체는 대놓고 '믿음'을 가지라'라고 강조한다. 믿음이란 일종의 신앙 속에서만 지속할 수 있는 법이다. 고대철학자 에픽테토스 역시, 강의 중에 신에 대한 믿음과 확신에 관해 여러 번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의 말을 세심하게 읽어보면 그에게 철학을 한다는 것은, 신의 존재에 대해 확신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우리 모두가 원래 신으로부터 태어났으며, 신은 인간들과 신들의 아버지라는 이 판단에 대해 진정으로 확신할 수만 있다면, 자신에 대해 결코 비천하거나 비열하다는 생각을 품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지상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모든 존재, 특히 이성적 존재들이 그것들(인간과 신으로 구성된 사회)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 왜냐하면 이성적인 존재들만이 이성을 통해 신과 결속됨으로써 본성적으로 신과 친교를 맺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네.' 이것을 이해한 그 사람이 스스로를 우주의 시민이라고 부르지 말아야만 하는가? 왜 신의 아들이라고 부르지 못하는가?"


*


자신을 포함해 모든 철학하는 자는 신의 아들임을 주장하는 에픽테토스의 논리는 하나의 공리(公理)에서부터 출발한다.  


"만물이 하나의 통일체로 한데 묶였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동의해야만 다음의 명제가 참이 되고,


"그러면 여기 땅 위에 있는 것들이 하늘에 있는 것들의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이 명제가 참이 되면, 그로부터 따라 나오는 다음의 명제들도 역시 참이 되며,


"신의 명령으로부터 온 것처럼, 식물에게 꽃이 피라고 하면 꽃이 피고, 싹이 트라고 하면 싹이 트고.... 이러한 규칙성이 도대체 어떻게 정연하게 일어날 수 있겠는가?... 식물과 우리의 몸이 전체(우주)와 그토록 밀접하게 결속되어 있고 전체의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면, 우리 혼들도 훨씬 더 높은 정도로 그러하지 않겠는가?"


그 결과 신(제우스)이 인간 각자에게 할당해 준 영(다이몬)적 존재, 즉 '결코 잠들지 않고 속임을 당하지 않는' 그 영혼의 수호자에 대해 확신할 수 있으므로,


"네가 문을 닫고 방 안을 어둡게 했을 때라도 결코 혼자라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사실상 너희는 혼자가 아니다. 신이 너희 안에 있으며, 너희의 영(다이몬) 또한 네 안에 있으니까 말이네."


*


에픽테토스 시대의 사람들은 감각적으로 단번에 동의하던 '만물은 하나의 통일체'라는 명제가, 자유와 개성이 중요해진 근대에 이르러 더 이상 공리가 아닌 게 되었다. 그때 철학자들의 그리스도라 일컬어지는(들뢰즈) 스피노자가 나타나, '유일하고 무한한 실체(신)'의 존재를 수학적 형식으로 증명한다. (그가 증명한 신은 종교적 신이 아니었기에, 그는 일찍이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속했던 유대인 공동체에서 파면당한 채 홀로 철학을 하면서, 먹고살기 위해 안경 세공일을 해서 살아갔다.)


나로서는 작정하고 읽어도 자꾸만 정신이 몽롱해져 한 페이지를 넘기기 힘든, 그가 수학의 형식을 빌려와 공들여 작성한 <<윤리학>>의 제1부의 제목은 다름 아닌 <신에 대하여>다. 어쨌든 그렇게 신을 증명하면 그 결과, 인간이 무엇인지는 자동적으로 함께 따라 나온다. 하나의 인간은 무한하지 않기 때문에 실체 자체가 아니지만, 실체는 유일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 유일한 실체의 부분일 수밖에 없다. 수많은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그 증명 과정에 대해 논쟁을 벌여왔으므로, 나 같은 사람으로선 그 과정을 명확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인간들이 서로 잘 지내는데 필요한 <<윤리학>>의 맨 처음이 왜 신의 존재에 대한 것이어야만 하는지, 그 신은 우리와 멀리 떨어진 초월적인 신이 아니라, 나 자신은 물론이고 세상 만물이 모두 포함되는 무한하고 유일한 하나인 신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에픽테토스의 이 한마디로도 실상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너 노예야, 제우스를 아버지로 해서, 말하자면 너와 같은 씨에서 태어나고, 너처럼 위로부터 씨를 이어받은 네 형제(이를테면, 게으른 노예)를 참아 낼 수 없다는 말이냐? 네가 다소 더 높은 위치에 있었다고 해서, 자신을 곧장 참주로 만들고 말 것인가?"


" '하지만 나는 그들을 샀으며, 그들이 나를 사들인 것은 아니에요!' 너는 어디를 보고 있느냐? 흙덩이나 구덩이나, 죽어야 할 것의 그 비참한 법을 보고 있는데, 너는 신들의 법은 보지 않는가?"


*


철학자들이 말하는 '윤리'는 도덕적 계율이나 정치적 법률이 아니다. 신의 아들인 그들은, '신들의 법'으로 현재에 절대시되는 도덕적 계율이나 법을 뛰어넘는다. 그런데 신들의 법은 어디에 쓰여 있나? 그건 바로 신의 부분인 우리들 각자의 안에 있고, 우리들 각자는 모두 부분 부분이기 때문에 서로서로 그 조각들을 맞춰보려고 노력해야만 전체에 대해 알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성을 통한 결속'인 것이다.


나는 (근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수학적 증명은 매우 어려우므로) 잠시 몽상에 잠겨본다. 내 조상들 중에 신들의 법을 알아보려는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벌써 '칠거지악'으로 죽음을 면치 못했겠구나. 거대한 아버지를 피해 자기 방에 틀어박혀 문을 걸어 잠겄던 카프카가 우리에게 걸어온  <<소송>>의 근거는, 그곳에 그와 함께 있던 신들의 법전이었겠구나. 우리 엄마의 자궁을 빌어 태어난 나는, 우리 엄마의 딸이기 이전에 신의 딸 혹은 신의 아들일 수도 있겠구나.


오래전에 내가 거부감을 느끼며 '결코 순종할 수 없다'라고 여겼던 것들은 아마도 (절대화된) 인간의 법이었을 것이다. 신을 아는, 무한한 신을 끝없이 알고자 하는 (그들은 그런 걸 신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알아낸) 신의 법에 기쁘게 순종한다. 자기 자신이 신의 일부이기에, 신에 대한 순종이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순종이기도 할 것이니, 왜 안 그렇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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