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로 Moreau Jul 13. 2023

다리 하나 때문에 우주를 비난할 텐가

에픽테토스 느리게 읽기

폭우가 쏟아지는 오늘도 나는 동네 도서관에 와 앉아있다. 오늘 같은 날에는 웬만하면 나도 안락한 집에 머물면서, 뽀송뽀송하게 있고 싶었다. 그러나 고요한 오전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어수선한 거실을 피해 학교에 간 딸아이 방에 요리조리 세팅해 자리를 잡고 앉았더니, 현관과 가까운 딸아이 방으로 천둥 같은 공사 소음이 진짜 천둥소리와 서로 전투를 벌이는 것이 아닌가. 오래된 아파트에서는 지금 몇 달째 계속 엘리베이터 교체공사 중인데, 하필 바로 오늘이 우리 동의 우리 층 차례였던 것이다.


천둥소리에 놀란 마음을 달래려 나는 잠시 거실로 피신을 나왔다. 그때 여느 때와 달리 집에 있는 나를 발견한 엄마가 (아마도) 반가운 마음에 (방금 기차 화통을 삶아드신 것만 같은) 큰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자, 천둥소리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고 내 안에 웅크리고 있던 짜증이 왈칵 치솟아 올랐다.


엄마는 보통 사람들보다 목소리가 크다. 엄마 말로는, 전쟁이 끝난 뒤 엄마 살던 동네에 미군 비행장이 들어서는 바람에 어릴 때 비행기 굉음에 노출된 터라, 귀가 잘 안 들려서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동네에서 엄마와 가장 친하게 지내며 자란 엄마 친구의 목소리는 웬일인지 굉장히 조용조용하다!) 반면에 내 귀는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예민하다. 그리하여 이 두 모녀간의 대화는 언제나 비극적이다. 엄마에게 뭔가를 말해야 할 때 나는 다른 이에게 할 때보다 두 세 배 정도는 목과 배에 힘을 더 줘야 하고, 엄마가 내게 말을 할 때에는 귀를 살짝 막거나 조금 먼 거리로 재빨리 이동해야만 한다. (아, 이렇게 써놓고 보니 엄마는 아니고 나에게만 비극적이구나!) 그래서 내 인생의 화두는 언제나 이런 질문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엄마에게서 나 같은 자식이 태어났을까?"


*


천둥소리 같은 공사소음과 기차화통 같은 엄마 목소리를 피해, 고요한 도서관에 자리 잡은 나는 다시 에픽테토스를 펼친다. 제12장의 제목은 <마음의 만족에 대하여>인데, 마치 딱 지금의 내게 말하는 것만 같은 노예 선생의 목소리가 (예민한 내 귀에) 울려오기 시작한다.

 

" '이런 아버지와 어머니를 두고 있는 나는 얼마나 가련합니까! 뭐라고? 미리 부모를 선택하고, '이 남자가 이 여자와 이 시각에 동침해서 내가 태어날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 너에게 허락되었느냐? "


그렇다. 나는 내 맘에 드는 부모를 선택해 태어날 수 없다. 그러기에 가족이란, 일종의 숙명 같은 것 아니겠나. 그렇다면 이 노예 선생은 우리가 어떤 부모를 만났든 간에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도덕적 언명을 내리는 것인가? (그렇다면 책을 덮어버리리라!) 그러나 (다행히도) 이어지는 글을 계속 읽어나가 보면, 노예 선생이 하고자 하는 말은 실은 전혀 그런 말이 아니다(아닌 것 같다).

  

"아니, 그것은 허락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들이 너희에게 달려 있는 것 안에 놓아두지 않았던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초연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고, 또 단지 너희에게 달려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게 하신 것에 대해 신들에게 너희는 감사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너희 부모에 관련해서는 신들이 너희에게 모든 책임을 면제해 주셨다네. "


내게는 부모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말을 들으니 문득,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러나 초연함에 대한 허용이 곧 부모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책임까지 없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다만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일, 내가 바꿀 수 없는 일('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은 일')에 대해 슬퍼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걸 재빨리 알아차리라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가 그들과 교제한다고 해서,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또 누가 우리에게 그러한 힘을 부여했을까?... 그들 쪽에서는 그들에게 좋게 보이는 것을 행할 것이지만, 우리 쪽에서는 자연과 일치하는 상태로 있어야만 할 것이네. 하지만 너는 견딜 수 없으며 만족하지 못하네."


누군가가 내 귀에 대해서, 그가 아무리 내 귀가 안 예민하기를 바라더라도 내 귀는 그렇게 바뀔 수 없는 것처럼, 나 역시 엄마의 목소리가 엄마 친구의 목소리처럼 고요하게 되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그건 아마도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누르면 문이 닫히고, 열림 버튼을 누르면 문이 열리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무도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누르면서 문이 열리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만은,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종종 바란다. 그런 결코 일어나지 못할 일, 아니 어쩌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을 기다리며, 그 상태에 머물러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을 짓는다.


"모든 것을 극히 만족스럽게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의 징벌은 무엇이겠는가?... 그들이 응당 받을 그만큼의 징벌이네. 홀로 있는 것에 불만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럼 홀로 있게 놔두라. 그는 자신의 부모에게 불만이 있느냐? 그럼 나쁜 아들로 슬퍼하게 놔두라. 자식에게 불만이 있는가? 그럼 나쁜 아버지로 내버려 두라.... 그의 감옥은 이미 그 자신이 있는 곳이네. 그는 자신의 의지에 반해서 그곳에 있으며, 또 누군가가 자신의 의지에 반해서 있는 곳마다, 그곳은 그를 위한 감옥인 것이네. "


*


에픽테토스가 '신들이 우리에게 초연함을 허용한 것들'에 대해 재빨리 알아차리라 말하는 이유는, 살아가는 동안 삶의 도덕적 진보(進步)를 이루기 위해서다.  


네가 회피하고자 하는 것으로 떨어지는 것을 회피하려고 하면서 여전히 떨면서 슬퍼한다면, 말해 보게, 네가 어떻게 진보를 이루어 낼 수 있을지를?"


도덕적 진보라고 해서 그가 우리더러 성인군자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도덕적 진보란, '좋은 것을 욕망하고 나쁜 것을 혐오'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좋은 것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슬픔에 빠져있는 동안에는 분별심을 잃어버리고, 우리는 자신에게 더 나쁜 것 쪽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철학자들의 그리스도인 스피노자 역시, 만약 우리를 슬픔에 떨게 만드는 신이 있다면 그건 신이 아니라 미신 즉 오류라고 말했던 것이다.


"즐거워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살벌하고 슬픈 미신뿐이다.... 어떠한 신도 또 질투심이 강한 사람 이외의 어떠한 인간도 나의 무능력과 불행을 기뻐하지 않으며, 또한 우리의 눈물, 탄식, 두려움, 그리고 그 외의 무력한 정신의 표지인 이런 종류의 것들을 덕으로 여기지 않는다." (스피노자, <<윤리학>>)


슬픔이란, 내가 어쩔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나에게 닥쳐와 내가 무력감을 느끼는 상태다. 그때 우리의 명석함은 당연히 방해받는다. 한 인간의 힘은 너무 미약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무력감을 종종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그런 무력한 상태에 빠졌음을 재빨리 알아차리는 것, 또 그런 때마다 거기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만한 (예를 들면, '울고 싶어지면, 밖으로 나가 달린다'와 같은) 행동의 준칙에 대해서,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한 평상시에 정해두고, 실제 상황이 되면 마치 훈련처럼 시도해 보라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신께 맹세코, 사소한 일로부터 실천해야만 하고, 그것으로 시작한 후에 더 큰 일로 나아가는 것이네. '머리가 아파요.' 슬픔을 표현하지 말라. '귀가 아파요.' 슬픔을 표현하지 말라. 그런 일에 신음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너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신음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이 원칙들에 신뢰를 두면서, 올곧고 자유롭게 너의 길을 걸어 나가야만 하는 것이네."


*


나의 예민한 귀는 외부의 소음에 취약하지만, 다행히 나는 시끄러운 소음으로부터 재빨리 달아날 수 있다. 그러나 노예로 태어나 철학자로 죽은 에픽테토스는, 평생 절뚝거리는 자신의 한쪽 다리의 불편함을 결코 피할 수 없었다. 그런 그는 자기 자신과 이런 대화를 나눈다.


"'그럼 내 다리를 절게 했어야만 했나요?' 노예야, 보잘것없는 다리 하나 때문에 우주를 비난하는 것이냐? 너는 전체에게 그것을 그냥 선물로 내놓지 않을 텐가?... 전체에 비교해서 너의 부분이 얼마나 작은지 알지 못하는가? 너의 신체에 관련해서는 그렇다는 말이네. 그러나 적어도 이성에 관련해서는, 너는 신들보다 열등하지도 않고 또한 그들보다 더 작은 것도 아니네. 왜냐하면 이성의 크기는 길이와 높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판단의 질에 의해서 측정되는 것이기 때문일세."


철학자들이 신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건, 그만큼 인생에는 신음하고 슬퍼할 일이 많다는 뜻일 게다. 내 삶의 비극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며 눈물을 흘리는 건 당연한 일이고, 대체로 (남들 눈에) 불행해 보이는 삶을 살았던 철학자들 역시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많은 날들엔 신음하며 울지 않았을까? 그러나 나를 찾아온 불행 앞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를 따져보는 잠깐의 동안에는 비탄을 멈출 수도 있고, 어쩌면 웃음이 나올 수도 있고, 또 에픽테토스의 말처럼 우리가 신과 거의 동등한 이성을 지닌 존재로서의 삶인 영생(永生)을 살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순간만큼은 그저 사는 게 아니라 '도덕적으로 진보하는' 좋은 삶을 산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좁아터진 집보다 널찍하고 시원하고 조용한 도서관에서 에픽테토스와 몇 시간을 보내고 나니, 젖은 옷은 다 말랐고 내 안에서 울리던 '귀가 아파요'라는 신음도 어느새 사라졌다. 둘러보니, 이곳에 함께 모여 앉은 낯선 이들에게서 고마움과 왠지 모를 동지애 또한 느껴진다. 이제 나의 예민한 귀보다 이성의 크기가 좀 더 커진 것인가? 그렇다면 노예야, 너의 도덕적 진보라는 수련을 위해 (기차화통을 삶아 드신 것만 같은) 엄마의 큰 목소리를 다시 만나러 가 보아라.

매거진의 이전글 문 닫힌 어두운 방 안에서도 결코 혼자라고 말하지 말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