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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Jul 19. 2023

그녀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어라, 그렇지 않다면

에픽테토스 느리게 읽기

"우리는 왜 화를 내는가?"


그건 당연히 상대방이 나를 괴롭히고 화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그와는 완전히 다르게 생각한다. 


"우리가 화를 내는 이유는, 우리가 빼앗긴 사물을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네."


우리의 노예 선생에 따르면, 내가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이유는 상대방 자체가 나빠서이거나 그의 행위 자체가 나쁘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그의 행위로 인해 상실한 것을 이때껏 나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도둑이 들었다고 해보자. 그런데 그가 나한테 전혀 필요 없거나 내일쯤에 내다 버리려고 계획한 물건을 가져갔다면, 화가 나기는커녕 얼마나 고맙겠는가! 그러니 도둑을 맞아 화를 내는 건, 그건 자기 자신의 소유욕과 집착 때문에 당하는 괴로움에 대한 표현인 것이다. 그렇다면 도둑질 한 인간은 어떨까?  


" '그들은 도둑들이고, 또 강도들입니다.'라고 누군가가 말한다. 도둑들과 강도들, 그게 무슨 말이냐? 선과 악에 관련해서 잘못 판단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에게 화를 내야 하는가, 아니면 차라리 연민을 느껴야 하는가?"


" '그러면 여기 이 도둑과 이 간음한 자를 죽음에 처하지 말아야만 합니까?' 결코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되네. 오히려 이렇게 물어야만 하네....'좋음과 나쁨을 구별하는 지성에서 눈이 먼 이 사람을 죽음에 처해야 하는가?' "


*


사람들은 모두 달라서 각자의 좋음과 나쁨은 아주 다양하다. 그래서 우리 눈에는 이 세상에 절대적인 좋음과 절대적 나쁨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절대적 진리도 없고 말이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마치 신앙인처럼, 모두에게 좋은 것, 즉 절대적 선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 같다. 물론 그들의 절대선은 '(항상)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라고 여기는 지점이, 결정적으로 종교인들과는 다르다. 


신의 일부인 인간은 실존의 특성상 모든 걸 다 알고 시작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한한 부분인 신체 너머를 볼 수 있는 정신의 눈을 뜬다면, 유일하고 무한한 전체인 신의 관점에서 좋음과 나쁨을 구분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서로 일치하리라. 그럼에도 신은 무한하기 때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끊임없이 서로의 조각을 맞춰보는 시도일 뿐이지, 절대선은 있음에도 결코 발견되거나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는다. 


또 신앙인들과는 정반대로 철학자들에게는 절대 '악'이라는 건 없으며, 그들은 '악'이라는 개념 자체가 오류-부적합한 관념이라 여긴다. 악한이란 아직 '좋음과 나쁨을 구별하는 지성'을 충분히 갈고닦지 못해 영혼의 눈이 먼 사람이며, 그래서 스스로에게 나쁜 행동이 자신에게 더 좋다고 잘 못 판단한 사람이다. 그러니 아직 더 좋은 것을 모르는, 가련하고 딱한 인간들에게 화를 낼 수 없지 않겠는가? 


" '누군가는 어떤 것이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 일이 가능할까?'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는 메데이아는 어떨까?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나쁘다는 것을 알지만, 분노가 내 계획의 주인이란 말인가?'... '예, 그녀는 잘못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있다면, 나는 두 가지 오류에 동시에 빠져있는 셈이다. 하나는 나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는 소유욕과 집착에 대한 무지요, 다른 하나는 내가 화내고 있는 상대방의 무지에 대한 무지-사건의 필연성에 대한 몰이해다. 물론 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아직은 철학자가 아닌지라), 매우 자주 이런 이중-다중적 무지의 쳇바퀴 안에서 맴돌며 살아가고 있고 말이다. 


*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 화를 내지 말라는 철학자들이 그러니 그냥 '가만히 있으라'라고 말하는 건 결코, 전혀, 아니다. 그들은 아직 철학자가 아닌 나를 향해, 화내는 것보다 확실히 '훠~얼씬'더 어려운 일을 주문한다. (사실은 아마도 이 어려운 일을 하기 위해서, 화내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리라.)


"그녀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과 그녀가 그것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그녀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어라. 그러면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그녀에게 그것을 보여 주지 않는 한, 그녀가 그녀에게 가장 좋아 보이는 것을 따르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것도 없네."


그리스 신화에서 자기 조국과 아버지를 저버리면서까지 영웅 이아손을 사랑한 메데이아는, 후일 그 사랑의 배신에 분노하면서 이아손의 두 아들을 죽여 복수한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그녀의 아이들이기도 한데, 배신자에게 최대치의 고통을 가하는 기쁨(?)을 위해 자식을 잃는 슬픔 속에 스스로를 가둬버린 것이다. 우리가 보기엔 그녀가 (계속해서) 나쁨을 선택한 것 같지만, 그녀 입장에서는 가장 좋다고 생각되는 행위를 했을 뿐이다. 노예선생은 누군가 지금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다면, 그에게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라' 한다. 그런데 어떻게?


*


시도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볼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뭔가를 보여주는 건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상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더 많은 것, 아직까지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된다는 건 '스스로' 그렇게 하고 싶어 져서 무던하게 노력하고 '애를 써야만' 겨우 달성할까 말까 한 일이다. 만약 그가 다른 걸 볼 수 있다면, 그는 이미 다른 사람일 것이다. 지식이나 힘으로 그에게 어떤 '행위'를 강제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그가 영혼의 눈을 떠서 그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게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는 그의 정신의 눈을 더욱더 감으려 하리라!) 


그러니 노예 선생이 말하는 '보여주라'는 말은, 예수처럼 기적을 행해서 장님의 눈을 뜨게 하라는 주문이거나, 만약 지금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없다면 그럴 수 있을 때까지, 그녀를 절대 포기하지 말고 (묵묵히 기도하면서) 자신을 수련하라는 게 아닐까 싶다. 


문제를 제기하는 철학자들은, 나를 고민하게 만들 뿐 결코 답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던져준 고민을 가지고 이리저리 굴리다 보면 비록 '그녀의 눈을 뜨게 하지는 못할지라도', 나 자신의 정신의 눈에 대해, 그것이 지금 향해 있고 보려고 하는 것들에 대해, 이리저리 상상해 보게 된다. 또 그러다 보면, '노예야! 네 눈이나 잘 뜨거라'라는 노예 선생의 (혹시 내가 기분 나쁠까 염려해?) (잘 숨겨둔) 기도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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