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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Jul 26. 2023

음악가의 귀를 얻을 때까지

에픽테토스 느리게 읽기

한 친구가 어떤 '또라이'에 대한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친구가 설정한 '또라이'의 기준은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 모습과 남들이 생각하는 자기 모습 간의 차이가 큰 사람'이라 했다. 순간 나는 좀 뜨끔했다. 아마 나도 무의식적으로는 나 자신의 모습을 그려볼 텐데, 그걸 다른 이들이 그려주는 이미지와 (무의식적으로 느끼기는 했을지언정) 의식적으로 대조해 본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의문도 들었다. 그런데 '다른 이이 판단하는 나의 모습은 과연 옳거나 정당한가?' 사람들이 모두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판단능력을 가졌다면 그럴 테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히나 무의식적으로는) 자기 삶의 조건에 유리한 방향으로 모든 사태를 판단하게 되지 않을까? 아마 그래서 철학자들은 철학의 시작을 무엇보다 "너 자신을 알라!"로 삼아왔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철학자들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우리 안의 이성 즉 논리적 추론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화하는' 논증들과 '가설적 논증들'의 연구, 질문을 통해 전개된 논의의 연구가 삶의 적합한 행위와 관련이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네."


"추론에는 무엇이 약속되어 있는가? 참을 확립하고, 거짓을 거부하며, 불명료한 것에 대해서는 판단을 중지하는 것이네.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검사하고 어떻게 판별할 것인지를 알며, 네가 적절하게 인정한 것에서 따라 나오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네."

 

*


살아가면서 우리는 매 순간 외부의 많은 것에 대해 판단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외부 대상에 대한 판단의 권한을 가진 재판관에 대해서는 거의 판단하지 않는-못하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때때로 흔들림의 기로에 서는 건, 그런 자기 안의 재판관에 대한 확실한 판단과 신뢰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이성 혹은 이성적으로 배우는 지성(知性)은 자기 안의 재판관에 대해 수없이 돌아보고 판단하는 훈련과 연습이다.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이성 혹은 지성만이, 외부 대상과 동시에 스스로에 대해서도 돌아보고 판단할 줄 안다.   


"고찰하는 것 자체와 고찰하는 대상이 같은 부류일 때는 그 그 자체를 고찰의 대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테지만, 다른 부류일 때는 그 자체를 고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성 그 자체는 무엇인가? 어떤 종류의 성질을 가진 인상들로 구성된 모음이다. 따라서 이성이 그 자체를 고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본성상 적합한 것이다."


에픽테토스는 윤리적 덕목의 실천과 마찬가지로 '논리학 공부가 중요하다'라고 여러 번 강조한다. '논리학'이라는 말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어려운 논증이나 수학적 증명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논리학은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학문적인 것은 아니다.


"철학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자 첫 번째 임무는 여러 가지 인상을 음미하고 인상들을 판별하는 것이며, 적절하게 음미되지 않은 어떤 인상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시금(試金)자는 한 번 내는 소리로 만족하지 않고 반복해서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음악가와 같은 귀를 얻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과 감정의 준거에 대해, 시간을 들여 음미한다면 좋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에픽테토스는 말하고 있다. 물론 누군가 열악한 환경에서 살 수밖에 없다면, 사회적 경험이나 알 수 있는 지식이 적어 불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시간만 들일 수 있다면, 누구나 적합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철학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왜냐하면 정보의 수집과 축적인 지식(知識)과 달리, 인간 이성의 판단 능력인 지성(知性)은, 외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여기기 때문이다.


"지성은 본유의 능력으로 자기를 위하여 지적 도구를 만들며, 그것으로 또 다른 지적 작업을 위한 능력을 얻고, 이 작업으로부터 다시 다른 도구들 또는 그 이상의 탐구능력을 얻으며, 그렇게 지혜의 절정에 이를 때까지 점진적으로 나아간다." (스피노자)


*


판단력-이성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이라는 삶의 기술은 자기 스스로 '배울 수 있을 뿐, 아무도 그에게 가르쳐 줄 수 없다.' (이반 일리치) 마치 거대한 나무를 품고 있는 독특한 작은 씨앗처럼 혹은 수천만 개로 독특하게 접혀있는 주름이 하나씩 천천히 펼쳐지는 것처럼(들뢰즈). 그것은 자기 안에 잠재되어 있는 것들을 스스로 깨닫고, 그것들을 스스로 피워내기 위해 삶의 조건을 이용하면서 또다시 자신의 능력을 펼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체로 살기에 바쁘다. 시간이 없을 때, 우리가 가는 '지름길'은 법과 도덕과 유행일 것이다. 남들이 사는 대로 '적당히' 살기. 좋게 보이는 대로 '착하게' 살기. 그렇게 살아도 별일 없을 것이고, 그렇게만 살아도 실상 훌륭한 삶 아닌가. 현실과는 동떨어진 '논리적 사고 연습'에 들일 시간에, 세상에 쓸모 있는 일 하나를 더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에픽테토스에게도 누군가 이런 딴지를 걸었었나 보다.


"'그럼 내가 이런 문제들에서 길을 잃는다고 해도, (내가) 내 아버지를 살해한 것과 같은 것은 아니지요. 그렇지 않은가요?'"


"말해보게, 노예여. 지금 같은 경우에 자네에게 살해당할 아버지가 어디에 있단 말이냐? 그래서 너는 실제로 무엇을 했단 것이냐?... 우리의 인상을 되는 대로,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사용해서,... 질문과 답변에서 자신의 입장과 일치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게 되는 것 - 이것들 중 어느 것도 잘못이 아니라는 말인가?"


*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성적이라면, 이성적 사유 훈련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에픽테토스의 시절에도 사람들로 하여금 길을 잃게 만드는 '화려한 언변'의 소피스트가 있었고, 지금이야... 말해 무엇하랴! 어쩌면 우리에게 논리적 사고 연습을 할 시간이 부족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돌아보고 판단해 볼 시간이 거의 없는 이유는 우리가 그런 '화려한 언변들'에만 시간을 내어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로 시간을 들일 필요가 있는 것들은, 그 모든 것들을 적합하게 잴 잣대를 제대로 만드는 일일 것이다.


"곡물을 측정할 때 그 척도를 검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듯이, 먼저 측정 단위가 무엇이며 저울이 무엇인지 결정해 두지 않는다면, 어떻게 무언가를 측정하거나 무게를 잴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만, 측정하는 그릇은 나무 조각에 불과하고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것을 인정한다 해도 논리학은 다른 모든 것들을 분별하고 고찰하고, 말하자면 그것들을 측정하고 무게를 달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네."


엉뚱한 잣대로 측정된 것들이 계속 쌓여나가는 인생에 대해 상상해 본다. 아니, 일부러 상상할 필요도 없이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 속에도 그런 것들은 실상 이미 많이 쌓여있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그 시간이 쌓아놓은 것들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앞으로 도래할 삶 속에서 '아버지가 살해될 위험'은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여 내게 남은 날 동안에는,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내 안의 재판관과 내 밖의 재판관을 대질시켜, 나는 얼마만큼 '또라이'인가에 대한 연구를 가장 시급히 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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