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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Aug 01. 2023

신중하다면, 그는 대담할 것이다

에픽테토스 느리게 읽기


철학자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들은 대체로 '비굴하고 소심한' 것처럼 보인다. 굴곡 없이 행복하기만 한 삶에는 (그런 삶이 진짜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철학이 필요 없을 것이다. 철학은 폭압과 고통으로 짓눌리는 삶 속에서 태어난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그런 시대를 바꾸기 위해 용감하게 깃발을 들고 앞으로 달려 나가지 않았던 이들이다. 대신 그들은 매우 '소심하게' 펜을 들고 방구석에 들어앉아, 우리에게 철학을 남겼다.


에픽테토스가 살던 시대도 폭군 네로 황제 치하로부터 시작되었다. 폭군을 몰아내기 위한, 계속되는 반역과 음모와 정권의 찬탈을 위한 싸움의 시대. 어떤 이들은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아첨을 했을 것이고, 또 다른 이들은 반역을 꾀하거나 또는 항거했을 것이다. 그런데 세네카나 에픽테토스와 같은 철학자들은, 폭군이 추방하면 순순히 추방당하고 (물론, 그들은 추방당한 곳에서 더 열심히 철학을 했다) 심지어 자살하라는 명령에도 그저 순순히 죽었을 뿐이다.


대체 왜, 그들은 폭군을 쫓아내려 (육체적) 힘을 쓰거나 폭군에 대한 반역에 가담하지 않는 것인가? 왜 그들은 끝끝내 철학에만 매달려있다가, 그저 담담히 추방당하거나 그냥 죽어버리는 것일까? 철학자들은 '신중한 물러남'이 반역보다 훨씬 더 용감하고 능동적인 이성적 행위라 여기기 때문이다.


"신중함이 발휘되어야 하는 것은 의지의 영역 안에 있는 것들에 관련해서이고, 의지의 영역 밖에 있으며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대담함을 발휘할 필요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동시에 신중하고 대담하게 될 수 있을 것이며, 제우스에 맹세코, 신중함 때문에 대담하게 될 것이네."


*


엄밀하게 사고하는 철학자들에게 용기와 무모한 대담함은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이다. 최초의 심리학자이기도 한 (들뢰즈에게 철학자들의 그리스도라 불리운) 스피노자는 '용기' 이렇게 정의한다.


"용기란 각자가 오직 이성의 지령에 따라서만 자신의 유(有)를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욕망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애초에 우리말로 '용기'라 번역된 원어는 라틴어 'Animositas'인데, 영역본에는 'tenacity'(끈질김, 결연함)으로 표현되어 있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재번역하려 시도하는 진태원 선생은 이를 굳건함, 일이관지(一以貫之)로 표현했다. 이는 이성적인 욕망이며 인식하는 정신의 힘에서 비롯되는 능동적 기쁨이다.


반면 철학자들은 우리가 보통 '용감하다'라고 말하는 "대담함(Audacia, daring)이란 동배들이 맞서기를 두려워하는 위험한 어떤 일을 하도록 인간을 자극하는 욕망"이라 여긴다. 이런 욕망을 철학자들은 '비이성적'이라 판단한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내적 원인에 따라 (자기 정신의 사고의 결과에 따라) 능동적/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더 강력하게 외부에서 작동해 들어오는 힘(타인의 인정, 명예욕, 야심 등)에 의해 움직여지는 수동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성의 지령에 따라서만 자신의 유(有, being)를 보존한다'는 것 또한, 그저 숨쉬기를 연장한다는 말과는 아마도 전혀 다른 말일 것이다. 이는 에픽테토스의 신중함과 통할 것 같다. 철학자의 신중함은 자기 목숨을 보전하기 위한 신중함이 아니라, 어떤 것이 더 이성적이며 능동적인가, 에픽테토스 말로 하자면 '무엇이 나에게 달려있는 것인지를 따져보는 일'일 것이다.   


*


그들에게 폭군의 명령은 자기의 통제와 계획 속에 들어오지 않는 외부의 사건이다. 따라서 폭군의 명령이나 위협은 자연의 천둥번개와 다르지 않기에, 그 자체로서는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나 가치가 없다. 그러나 그 앞에서는 신중해야 한다. 자연을 조종할 수는 없어도 우리는 그것을 잘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해가 나면 빨래를 널지, 그 반대로는 하지 않듯 말이다.   


"그것들의 사용은 선악과 관련 있기 때문에 주의해서 사용해야만 하고, 이와 동시에 그 사용된 질료는 (선악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의 굳건함과 마음의 평정심을 지니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그와 반대로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일 앞에서 신중하려다가 소심해지고, 신중하게 의지를 발휘해야 하는 일 앞에서는 대담해져서 비이성적으로 불의를 저지른다.  

   

"그러므로 우리의 대담함은 죽음을 향해야 하고, 신중함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향해야 하는 것이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그와 정반대의 행동을 취하고 있네."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에픽테토스는 우리에게 주사위 놀이꾼을 본받으라 한다.


"어떻게 우리는 마음의 굳건함과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부주의와 지각없는 행동에서 멀어질 수 있는 조심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주사위 놀이를 하는 사람들을 모방할 수 있다면 충분하네... 무엇이 떨어질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떨어지는 것을 조심스럽고 능숙하게 사용하는 것, 그것은 이제 내 임무인 것이네."


*


폭군은 비이성적 인간이고 철학자는 이성적인 인간이다. (이성적으로 행위할 줄 모르는) 비이성적인 인간에게 이성적으로 항거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럼에도 폭군이 추방이나 자살을 명령할 때까지 철학자들은 비이성적인 그들에게 이성적으로 말을 건네는 걸 멈추지 않았다.) 또한 이성적인 철학자는 결코 폭군과 똑같이 비이성적인 방법-폭력을 사용해 그를 제압할 수도 없다. 그러니 '우연'이라는 외적 사건이 자신을 삼켜버릴 때까지 그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할 수밖에!


그러면 '세상은 대체 누가 바꾸나'하는 의문이 든다. 그러나 철학자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그는 아마 세상을 바꾸는 가장 빠른 방법은 '너 자신을 바꾸는 일'이라고 대답할 것 같긴 하다. (나는 바뀌고 싶지 않고)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건, 어쩌면 그건 그저 내가 지금 서 있는 자리와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누군가의 자리를 맞바꾸고 싶다는 말일지 모르고, 그렇다면 그건 아마 세상이 바뀌는 게 전혀 아닐 수도 있다. 혹은 세상이 바뀌기 전에는 결코 내가 먼저 바뀌는 손해를 입지 않겠다는 마음일텐데, 모두가 그런 마음이라면 세상은 또한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 바꾸겠다고 나서는 철학자들이야말로, 가장 용감한 자들이 맞도다!)

 

세상을 바꾸는 건, 철학자들에 따르면, 내 의지의 소관이 아니다.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을 인식하고, 특히 그중에서도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나를 작동시키는 욕망의 방향을 이리저리 비틀어보려 노력하는 일'뿐일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각자가 모두 그런 식의 노력을 하고 있다면, 그건 아마 누군가 나서서 바꿀 필요도 없는 이미 바뀐 세상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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