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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Aug 09. 2023

너 자신에게서 얻으라

에픽테토스 느리게 읽기


무더위가 계속되는 지난 주말, 엉성한 채식지향주의자인 나는 삼겹살을 성심껏 구웠다. 나를 제외한 모든 가족들은 삼겹살을 좋아한다. 나 또한 십 년 전만 해도 삼겹살을 즐겨 먹었다. 그러다가 우연한 계기로 공장식 축산 현실에 대한 다큐를 보게 되었고, 과도한 육식이 불러오는 끔찍한 사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그러면서 저절로 나와 같은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여럿 알게 되었는데, 그들과 이런저런 소통과 친교를 나누는 사이 점차 육식과는 자연스럽게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내가 그런 일들로 바쁜 동안, (저녁에만 만나는) 가족들과의 친밀도는 상대적으로 매우 낮아질 수밖에 없었고, 육식에 대한 태도 또한 서로 멀어졌다. 집에서 음식을 담당하는 나는, 내가 배워 아는 대로 고기 없는 밥상을 차리고자 했다. 그러나 내겐 자연스러운 일이 가족들에게는 스스로 결심하지 않은 부자연스러운 절제였다. 집에서 고기를 덜 먹게 되었다는 내 이야기를 들은 한 이웃은, '어쩐지 우리 집에 놀러 온 너희 애들이 고기를 환장하고 먹더'라는 증언을 들려주었고, 고기 앞에선 가족들은 내 눈치를 살피며 마치 부정의한(?) 일에 동참하는 것 같은 죄책감을 갖는 눈치였다. (아뿔싸!)


고기를 피하는 내게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의 건강을 염려하면서 고기가 얼마나 건강에 좋은지, 또 얼마나 맛있는지 밤새워 말하고 싶은 눈치다. 그러나 나 역시 (공장식으로 생산된) 고기가 얼마나 건강에 해로운지, 그 생산 과정은 얼마나 부자연스러운지 밤새도록 말할 수도 있다. 같은 것을 대하는 나와 그들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러나 채식을 원하는 이들이나 육식을 좋아하는 이들의 공통점도 있으니, 그건 모두 자기가 건강하게 살기를 바라고 또한 자신이 느끼기에 가장 맛있는 것을 먹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선(先) 개념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이며, 하나의 선개념은 다른 선개념과 모순되지 않는 것이네. 우리 중에서 누가, 좋음이 유익하고 바람직한 것이며, 또 모든 상황에서 그것을 찾아야만 하고 추구해야만 한다는 것을 상정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언제 모순이 일어나는가? 개별적인 경우들에 우리의 선개념을 적용할 때 생겨나는 것이네."


*


나를 비롯한 보통의 사람들은 외부의 사물, 이를테면 채식이나 삼겹살에 대해 그게 좋다 나쁘다 평가한다. 그러나 철학자들에게 좋음과 나쁨에 대한 분별은 자기 외부의 사물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좋음의 본질은 어떤 성향의 의지이고, 나쁨도 마찬가지로 어떤 성향의 의지이다. 그러면 외적인 것들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의지를 위한 재료들로, 그것들과 관계됨으로써 자신의 좋음과 나쁨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삼겹살은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사물이 아니다. 다만 내가 외부의 재료인 삼겹살에 대해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생각한 그대로 행동할 때, 나 자신을 향해 '좋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자가 아닌 그림자 노동자-가정주부인 내게 사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삼겹살을 먹으며 내게 미안해하는 가족들은 폭군이 아니며, 나 역시 사랑해서 건강한 걸 먹이고 싶은 것이지 가족들의 폭군이 되고 싶은 건 아니다. (아마도 철학이란 이미 철학자가 된 사람이나 철학을 증오하는 폭군보다는, 나처럼 이런 쓸데없는 고민이 많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일  것 같다.)


철학자들의 그리스도라는 스피노자 역시 에픽테토스와 마찬가지로 외부의 사물을 그 자체로 선(善)이나 악(惡)으로 여기지 않는다.


"동일한 사물이 동시에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으며, 선과 악에 무관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예컨대, 음악은 우울한 사람에게는 좋고, 슬퍼하는 사람에게는 나쁘며, 귀머거리에게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스피노자, <<윤리학>> 4부 서문)


우리가 외부 사물에 대해서 선이나 악이라 여기는 건, 자기 안의 본성을 강화하는가 아니면 본성을 해쳐 실존을 위협하는가에 따른다고 말하는 그는, 에픽테토스보다는 좀 더 심리학적이며 현실적이다. 이때도 문제는, 무엇이 자신의 본성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래야 자기 본성에 맞는 것을 외부로부터 구할 테니 말이다.


"사물은 우리의 본성과 일치하는 한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선이다." (스피노자, <<윤리학>> 4부 정리 31)


"이성은 본성에 반대되는 것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므로, 이성은 각자가 모두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자기의 이익(진실로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추구하고,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인도하는 것을 욕구하고, 절대적으로 각자가 가능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스피노자, <<윤리학>> 4부 정리 18의 주석)


*


그렇다면 내가 삼겹살을 먹거나 혹은 안 먹는 것이 모두 나의 본성일까? 스피노자에 따르면, 그렇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삼겹살을 먹거나 안 먹을 때의 나는, 나의 이성의 힘에 의해 본성을 따르는 정도-강도가 다르다. 외적인 영향력에 더 많이 휘둘릴수록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사는 힘-강도는 약해진다. 그러나 외부의 사물이라도 어떤 면에서 자기와 공통된 본성을 지녔다면, 그 공통된 본성끼리의 결합을 통해 자기 본성을 더욱 강화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인간들이 외적 사물에 휘둘리지 않을수록 (이성적이 되어),  서로의 공통된 본성을 발견하고 결합-일치-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은 이성의 지도에 따라 생활할 때 전적으로 자기 본성의 법칙에 따라 행동하며, 또 그러한 한에 있어서만 다른 인간의 본성과 항상 필연적으로 일치한다." (스피노자, <<윤리학>> 4부 정리 35의 따름 정리 1)


그런데 같은 것을 놓고 서로 가지겠다고 싸우는 인간들을 보면, 스피노자의 말과는 달리 본성이 같아서 싸우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같은 것을 두고 싸우는 이유를 세밀하게 분석해 보면, 둘 모두에게 좋은 것을 한쪽은 더 많이 소유하고 다른 쪽은 더 적게 소유하는 (것 같다고 느끼는), 외적 사물에 대한 소유의 불일치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조건 상 아마 항상 정확하게 일치되기 어려울 것이다.)


삼겹살 앞에서 갈등하는 나와 가족들의 불일치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그 역시도 소유의 문제인 것 같다. 다만 이때의 소유는 외적 사물이라기보다는 사물에 대한 앎을 내적으로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삼겹살을 즐겨 먹던 때 나는 삼겹살이 내게 주는 (에픽테토스가 강조하는) '인상'에 대해 음미하지 않고, 그저 먹던 습관대로 '맛'만 음미하며 먹었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로 그 '인상'을 음미한 결과, 그것을 먹지 않은 것이 내 본성에 더 맞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지금 나는 믿고 있다).


"어떻게 하면 좋음을 얻을 수 있는가? 재료들을 과대평가하지 않음으로써. 재료에 관한 그 판단이 올바르면 의지를 좋게 만들고 그 판단이 꼬이고 비뚤어지면 의지를 나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신이 정하신 법이고, 그는 '네가 좋은 것을 원하면, 너 자신으로부터 얻으라'고 말씀하시네."


삼겹살이건 삼겹살을 좋아하는 가족이건, 그것들은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쁘지 않다. 그 모든 것들은 아직까진 감춰진 내 본성을 발견하고 그에 따른 좋음을 찾아내기 위한 재료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삼겹살을 좋아하는 가족'이 주는 인상에 대해서는, '삼겹살'이 주는 인상만큼 적절하게 음미하지 못한 것 같다. 그들 앞에서 마음이 불편하고 때로 슬픔에 잠긴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성적 사고의 결과는 오직 기쁨으로만 발현되기 때문이다.


*


외적 사물 자체에 대한 소유욕은 불화를 부른다. 삼겹살이 좋지 않다는 내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어찌 보면 사물에 대한 소유욕보다 더 좋을 것도 없는, 타인에 대한 소유욕의 일종이다. 그러나 사물 그 자체의 소유가 아닌, 사물에 대한 진실한 앎에의 소유욕은 더 윤리적인 삶을 부른다. 알게 되면 먹는 일도 식욕이나 미각이 아닌  윤리의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처럼. 그 사물의 속성을 안다는 것은 내가 내 안에서 그 외부 사물과 일치된 속성- 내 안에 있는지 몰랐던 새로운 감각을 발견했다는 뜻이고, 그만큼 이 세계의 사물과 일치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신이 있다면, 아마도 그는 이 세계 자체와 일치할 것이 아닌가.)


"신의 참된 본질이 찾아지는 곳에, 또한 좋음의 본질도 있을 것으로 보이네. 그러면 신의 본질은 무엇인가? 살(肉)? 결코 그렇지 않네. 대지? 결코 그렇지 않네. 명성? 결코 그렇지 않네. 그는 지성, 앎, 올바른 이성이네. 그러므로 좋음의 참된 본질을 추구해야 하는 곳은 오직 거기뿐이네."


외적 사물에 대한 소유욕은 인간을 외적 사물에 구속시킨다. 그러나 자기 안으로부터만 얻을 수 있는 사물에 대한 (진정한) 앎은, 스피노자가 '(자기 안에 있는)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이라고 표현했듯, 무제한적이면서도 아무도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인간을 더 자유롭게 하는 욕망이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삼겹살을 정성껏 구우며, '삼겹살을 좋아하는 가족들'이라는 인상을 진하게 음미하려 다. 그와 동시에 가족들 역시 (그리고 다른 사람들 또한) '삼겹살'이라는 외적 사물과 '삼겹살을 먹지 않으면서 삼겹살을 정성껏 굽는 인간'이 주는 인상에 대해 시간을 들여 음미해보기를 기다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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