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솔 출판사의 융 기본저작집 제1권 <<정신요법의 기본문제>> 중에서 '정신 치료'와 관련된 자료들을 읽고 나서, 필자의 사적 편견에 따라 주관적 해석으로 쓴 것임을 미리 밝힙니다 #
어쩌다 보니 지금 나는 예전 같으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자는 동안에 꾸는) 꿈에 관심을 갖고 있다. 꿈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였던 철학책을 읽던 중, '진정한 사유'를 강요하는 '비자발적 기억'에 관해 들었던 게 계기였다.(들뢰즈) '비자발적 기억'이란 의식적으로 의도하지 않는데도 자꾸만저절로 떠올라오는 기억이다. 그래서 아무런 의식적 전제나 목적도 없는 그런 기억의 출현에 대해, 어떤 해석을 하려면 의식은 그야말로 완전한 창조적 생성을 해내야만 한다.
누군가의 의식적 사유가 그런 작업을 해낸다면, 그는 그저 지나처버린 과거의 한 순간을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현실로 부활시킨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그의 의식 속에서는 지금까지 의식적으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독특하고도 영원한 하나의 진리-가치가 창조된 것이기에, '진정한 사유'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새로운 것을 생성하는 '진정한 사유'의 반대말은, 전제된 목표를 따라가는 예측가능한 결론이고, 이미 누군가 창조한 진리-가치에 대한 모방이나 답습, 재생산, 재탕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그렇게 꿈에 관심을 갖고 그에 관한 탐색을 하던 중, 분석심리학자로 알려진 융을 만나게 되었다. 여러 가지 신화와 종교, 비교문화적이고 인류학적인 그의 글은 처음엔 그저 매우 흥미롭기만 했다. 그런데 그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는 (정신의학자나 심리학자라기보다는) 철학자 편에 매우 가깝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예컨대 그는, 정신치료의 개념을 치료자로부터 환자에게 내려지는 일방적 처방이 아닌, 둘의 상호작용 속에서 양쪽이 함께 변화되는 과정이라 말한다.
"정신치료는... 어떤 의미로는 변증법적 과정, 즉 두 사람 사이의 대화, 또는 토론이다. 변증법은 원래 고대 그리스 철학의 대화술인데, 예로부터 새로운 합성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일컫는다. 한 인간은 하나의 정신 체계이다. 그것이 다른 인간에게 작용할 때 다른 정신 체계와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
이런 설명은 내게 스피노자 철학에서 윤리적관계를 위한 '공통관념의 형성' 혹은 들뢰즈가 제시하는 독특한 다양체들의 섞임 속에서 새로운 변신이 일어나는 '되기' 등과 같은, 생성에 관한 철학적 개념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재미 삼아 계속되는 그의 글 속에서, '치료자와 환자'를 '나와 타인'으로 치환시켜 다시 읽어보았다.
"치료자나는 묻는 자일뿐 아니라 대답하는 자로서 다른 정신 체계와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나는 이미 우월한 자도 많이 아는 자도 아니고, 재판관이나 충고를 주는 사람도 아니며 함께 체험하는 자로서, 환자타인이라고 부르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변증법적 과정 속에 속해 있는 것이다."
"나는 환자타인과 함께 환상하려고 힘쓰고 있다. 나는 환상을 가치가 적은 시시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환상의 영역을 결코 벗어나 있지 않다... 상상력의 창조적 활동은 인간을 다만 무엇에 '불과'하다는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놀이의 중재자 상태로 끌어올린다."
"내가 목표로 하는 작용 Wirkung이란 환자타인이 그 자신의 본질을 실험하기 시작하여, 그의 정신적 에너지가 고착되거나 절망으로 굳어지지 않고 흘러 움직이면서 변화되어 미래의 무엇인가가 되는 정신적 에너지를 일으키는 것이다. 환자와 나타인과 나는 둘 다 그 여행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른다. 종종 그것은 헤아리기 어려운 어둠 속을 더듬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해놓고 보니 더욱더 그의 책은 정신치료서라기보다는, 매우 수평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생성적이고 철학적인 인간관계론에 더 가까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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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주 얄팍하게) 경험한 심리학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정신의학으로서의 심리학인데, 거기에서는 행복을 선으로 고통은 악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서양의 신체의학이 건강상태를 선으로 여기고 병은 제거해야 할 악으로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게. 또 다른 부류는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이다. 그 영역에서는 인간의 행복이니 선-악이니에 대해서는 (객관성을 지녀야 하는 과학답게) 아무런 견해가 없다. 그저 정신을 탐구하는 객관적 연구 방법의 연구에 매진하면서, 보이지 않는 정신에 대해 양적 측정치를 부여한다. 그렇게 만들어 낸 정신의 통계수치는 산업과 조직현장에서 인간 자체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데 쓰인다.
이런 심리학들은 인간을 그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그들이 지닌 세계관이나 그들이 살아가는 역사-사회적 시스템 등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개별 인간의 정신적 문제는 '오로지' 개인적인 문제가 된다.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야 할 윤리적 사회를 희망하는 철학자들은 심리학의 바로 그런 지점을 비판한다. 특히 정신의학으로서의 심리학은, 현 체제에서 규정된 정상성에 자발적으로 적응하도록 만들기에 사회변화를 요원하게 만든다. 그런데 정신치료의 원조 중 한 사람인 융은, 내가 지금까지 (얄팍하게) 경험했던 치료적 심리학과는 좀 다른 말을 한다.
"학식 있고 개성이 뚜렷한 사람들 중에서 자신의 신경증을 감수하면서, 병의 의미를 이해하고 자신의 신경증적 증상에 감사하는 것을 배웠다고 나에게 고백한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증상은 하나의 기압계처럼 언제 어디서 그가 자신의 개인적인 길에서 벗어났는지, 또 언제 어디서 중요한 문제를 무의식에 남겨 놓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정신치료의 주목적은 환자를 상상할 수 없는 행복으로 이끌어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고통을 참는 철학적 인내와 꿋꿋함을 갖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삶의 전체성과 충만을 위하여 기쁨과 고뇌의 균형이 요청된다. 사람들은 가능한 한 커다란 행복에 대해서만 말하며 행복 또한 적절한 고통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중독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다. 신증경의 이면에는 환자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자연스럽고 필요한 고통이 자주 발견된다."
"병적인 것은 이물질처럼 간단히 제거될 수 없다. 그렇게 할 때 어떤 본질적인 것, 살려야 할 의미 있는 어떤 것을 병적 성향과 함께 제거할 위험이 있다. 우리의 과제는 병적인 것을 말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라고자 하는 것을 돌보고 키워서 그것이 심혼의 전체성 안에서 그 자체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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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행복을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는 융은, 행복에도 중독되어서는 곤란하다고 말하면서 (현 상태에서 추구되고 있는)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또한 병적으로 보이는 개인의 고통에 대해서 그게 혹시 삶이라는 항해에서 놓치고 있는 방향계는 아닌지 통찰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병적' 증상들은 무의식적이고, 의식은 무의식에 대해 무지하다!
그래서 융은, 무의식의 대표주자이자 (들뢰즈가 지목한) 비자발적 기억인 '꿈'에 의지한다. 그리고 그의 논리에 따르면, 한 개별적 인간 신체의 유전자 안에 전 인류가 거쳐 온 역사가 들어있듯, 한 개별적 인간의 정신(그 일부인 의식된 자아와 구별하기 위해 심혼 또는 자기라 부른다) 속에도 전 인류의 역사가 담겨있다.
"개인적인 것을 강조하는 심리학은 인간의 개인적 요소가 미치는 부분에 있어서만 타당하다. 그러나 인간을 세계의 일부로 보는 한 그는 세계, 즉 초(超)개인적인 것, 하(下)개인적인 것을 그 안에 지니고 있다. 그의 모든 신체적 정신적 토대는 전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초개인적이고 하개인적인 것에 속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중요성을 사람들에게 인지시켰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그러나 그는 무한한 무의식의 세계를 다시, 억압된 성적 욕망이라는 의식적으로 제시된 아주 확실한 하나의 관점으로 좁혀버렸다고 융은 말한다. 그 해석 또한 유용하지만, 절대적인 건 아니다. 들뢰즈식으로 말해보면, 비자발적인 기억에 의식적 전제를 덧씌운 성욕설은 (그 시조인 프로이트 자신에게는 진정한 사유였겠지만, 그 원칙에 따르기만 하는 다른 모든 이들에게는) '진정한 사유'가 되지 못한다.
정신치료자 융이 환자와 함께 환상하면서 둘 간의 변증법적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 애썼던 것처럼, 의식과 무의식도 서로 그런 관계로써 만나야 하지 않을까? (개인적 경험과 지금 아는 것으로 제한된) 전제를 버리는 의식과 의식에게 자꾸 새롭고 엉뚱한 (인류와 자연 심지어 우주 전체로 확장된) 전제를 던져주는 무의식. 이런 둘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진정한 사유'가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다만 꿈이 환자에게 미치는 작용만을 알 뿐이다. 하나의 사물이나 하나의 사실은 그 자체로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확실한 것은 해석을 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항상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 사적 의견이 무엇이든 간에 그런 사실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생각은 꿈꾼 사람에게 하나의 재검토를 의미하고 이로써 어떤 태도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합리적으로는 전혀 꾸며낼 수 없는 그런 작은 변화를 통하여 무언가 움직이게 되고,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정체 상태가 극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