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솔 출판사의 융 기본저작집 제1권 <<정신요법의 기본문제>> 중에서 <심리학적 유형에 관한 개설> 부분을 읽고, 필자의 사적 편견에 따라 주관적 해석으로 쓴 것임을 미리 밝힙니다 #
사람들은 누구나 저마다의 독특함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 또 서로 비슷하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의 '유형'이 만들어질 수 있고, 그런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누군가를 눕혀보는 일은 무척 흥미롭기도 하다. 요즈음 많은 이들에게 거의 진리처럼 여겨지고 있는 MBTI 역시 유사 이래 끊임없이 만들어져 온 인간 유형론 중의 하나인데, 이 유형이 제시하는 원리를 만든 원조는 다름 아닌 심리철학자 융이다. 그는 저마다 독특한 인간이 공통적으로 타고나는 몇 가지 요소를 관찰해, 각자가 지닌 관심의 방향 혹은 에너지 움직임의 방향에 따라 우선 크게 외향형과 내향형으로 구분했다.
"자연에는 생명체들이 적응, 번식하는 두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길이 있다. 하나의 길은 자손을 많이 퍼뜨리되 개체의 방어력과 생존 기간은 떨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의 길은 개체가 여러 가지 자기 보존 수단을 갖추되 자손은 많이 퍼뜨리지 않는 것이다. 이런 생물학적 차이가 두 가지 심리적 적응 형태들의 보편적 토대가 되는 것 같다. 외향적인 사람은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다 쓰고 모든 것에 자기 자신을 집어넣어 퍼뜨리는 반면, 내향적인 사람은 바깥의 요구에 맞서 자신을 지키고 객체에 직접 관계되는 에너지 지출을 삼가며, 대신 안전하고 강한 위치를 마련한다."
이 구분은 요즘 아주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더 중요하고 재미있어 보이는, 이런 의식의 태도는 언제나 정반대 되는 무의식적 태도를 강하게 동반한다는 그의 설명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예컨대 그가 의식적인 외향형이라면 그의 무의식적인 태도는 내향형이라는 것. 또 그가 의식적인 외향적 감정형이라면 무의식적 태도는 내향적 사고형이고, 의식적인 내향적 사고형이라면 무의식에서는 외향적 감정형이 나타난다. 우째 이런 일이?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역사 전체와 인류의 역사를 지니고 다닌다. 그것들은 (한 인간 안에서) 현명함을 제시해야 할 필요를 느끼기에, 처음부터 존재해 온 억압된 소수는 저항한다. 인정을 못 받을수록 그는 유아적(유치하게)으로 또 고태적(어리석고 무자비하게)인 무의식적 태도로 표출된다."
한 알의 씨앗에 온 우주가 들어있듯, 한 인간 안에 '인류 전체의 역사'가 들어있다. 한 인간이 걸어갈 때, 마치 등에 집을 지고 다니는 달팽이처럼, 그는 인류의 역사를 지고 걷는다. 그가 만약 너무 협소한 교육만 받아 너무 치우치거나 위험한 선택을 할 것 같은 순간이 오면, 그의 등짐 속 인류 중 하나가 크게 소리쳐 경고한다. '제발 전체성의 균형을 잃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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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적 태도에서 크게 외향과 내향을 구분하고, 다시 무의식과 의식을 구분하고, 또다시 거기에서 합리와 비합리를 구별하고, 다시 합리적 성향 속에서는 사고와 감정이, 비합리적 성향 속에서는 감각과 직관이 세심하게 구분된다. 그 모든 설명을 읽다 보면 어떤 하나의 유형이 내게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모든 유형들의 일부 특성들이 내 안에 전부 있는 것 같은 것도 사실이다.
서로 마주 보는 기능들은 같은 유형이면서도 서로 상반되는 대극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게 의식되지 않는 것, 즉 (나의) 무의식이라는 게 억압된 것이든(프로이트) 아니면 기능적으로 덜 분화된 것이든(융), 융에 따르면 그 무의식이 우리가 안다고 믿는 의식보다 때로는 훨씬 더 잘 드러나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사고형이라 해도 내게 있는 무의식적 감정, 감각, 직관이 무심결에 흘러나오며, 만약 내가 내향일지라도 무의식적인 외향적인 측면이 무심결에 더 많이 표현되는 것이다.
"무의식이 몇 개의 층 아래 파묻혀 있어 고생스럽게 뚫고 들어가야 발견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와 반대로 무의식은 의식되는 심리 속으로 끊임없이 흘러들거니와 그 정도가 상당해서 어떤 특성들이 의식적 성격에, 어떤 특성들이 무의식적 성격에 귀속되는지를 밖에서 보고 알아내기 어려울 때가 많다."
"무의식의 태도가 의식을 보상한다는 사실은 심리적 균형으로 표현된다. 정상적인 외향적 태도는 그가 언제 어디서나 외향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심리적으로 내향성의 기제라 할 만한 것을 많이 나타낼 것이다. 가장 많이 분화된 기능이 외향형이고 덜 분화된 기능은 내향성을 띨 때 외향형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딱 들어맞지도 않을 이런 유형을, 그는 대체 뭐 하러 구분한 것일까? 우선, 그는 각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특히 자신의 심리적 정신적 안녕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해 보기를 촉구하는 수단으로써 유형을 제시한다. 어떤 유형에 나를 혹은 타자를 끼워 맞추는 게 아니라, 나와 타인이 관계 속에서 힘들 때 과연 왜 그런가를 점검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하자는 의미다.
"독자는 인간의 행동 유형에 관한 이 네 가지 규준(감각-사고-감정-직관)이 의지력, 기질, 상상력, 기억력 등의 개념 가운데 네 가지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하기 바란다. 다시 말해 이 네 가지 유형은 결코 유일한 정설 혹은 불변의 원칙이 아니다. 다만... 나는 내가 부모를 그 자식에게, 남편을 부인에게 혹은 부인을 남편에게 설명해야 할 때 이 규준들이 특히 유용함을 알았다."
외향인과 내향인이 만나면...
융이 저마다 독특한 인간들을 굳이 유형으로 나누어 제시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그가 '내향'으로 구별한 사람들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현대-자본주의라는 이 시대는 외향형 인간을 요구하고, 내향인들을 쓸모없는 인간으로 취급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내향인들은 마치 외향인인 양 살아가면서, 자기 안에서 발견되는 내향적 특성에 대해 스스로 무가치하고 열등하다고 평가하면서 정신적 괴로움에 시달린다.
융은 유형 설명의 많은 지면에서, 이런 소수자적 '내향인'에게 설 자리와 자부심을 되찾아 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 안에 태곳적부터 있어 온 '원형'에 집중하는 그런 이들이 없다면 기존 세계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문학과 예술, 철학과 종교는 가능하지 않다고 말이다.
"외향형보다 내향형은 더 오해를 받는다. 시대가 내향적인 사람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숫자상으로가 아니라 감정상 소수파에 속한다. 그는 일반적 스타일-외향형을 따라가면서 자기 자신을 무너뜨린다... 이런 편견에 대해 내향적 사람 대부분은 반박하지 못한다. 자신의 주관적 판단이나 주관적 지각들이 무의식적으로는 보편타당한 전제들을 가진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내면에서 보는 것을 남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옮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안다면, 그런 사람들을 더 공정하게 판단하고 더 관대하게 대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들(내향인)의 삶으로부터 무엇보다도 그들의 가장 큰 오류인 의사 전달 능력의 부족으로부터 우리 문화의 가장 큰 오류들의 하나인 말과 서술에 대한 미신, 말을 통한 방법들에 의한 가르침의 지나친 과대평가를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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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MBTI 유형을 서로 말하다 보면, 어떤 이는 평소 내가 느끼던 것과는 전혀 다른 유형인 경우가 종종 있다. 그건 아마 융이 말하는 것처럼 스스로 의식하는 것과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행위가 상반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융은 유형의 판정자는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 유형은 내 의식이 결정한다!' 그래야만 권위자나 다수의 압력이 아니라, '각기 다른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상 우리 모두 어떤 유형에 속해 있는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에, 아무도 다른 사람에 대해 편견 없이 관찰할 수 없고 그래서 전적으로 객관적으로 다른 이의 유형을 규정할 수 없다.
"이렇게 보는 관점에 따라 의견이 달라지기 때문에 심리적 사실들을 서술하고 이해하는 일이 심각하게 어려워지며 오해의 가능성이 말할 수없이 커진다. 이 오해들에서 생겨나는 논의들은 보통 절망적인데, 서로가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경험은 내가 서술에서 개인이 주관적으로 의식하는 심리에 기초를 두게 된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그렇게 하면 최소한 하나의 특정한 객관적 발판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심리학 이론을 알고 있고, 거기에 상응하는 기술을 습득하고 있다고 해서 분석가내가 그런 (유형들 간의) 차이를 초월한 초인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심리학의 이론과 기술이 인간의 정신을 두루 파악할 수 있는 절대적인 진실이라는 가정이 가능할 때만 피분석자타자보다 우월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가정은 대단히 위험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분석가나 자신이 확신을 가질 일은 아니다. 분석가나는 자기 삶의 정체를 동원하여 피분석자타자의 전인간성을 직면하지 않고, 이론이나 기술만으로 피분석자타자를 대할 경우 말 못 할 의혹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분석가나 자신도 시험대에 오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칼 융, <<인간과 상징>> <무의식에 대한 접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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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뭔가를 개선하고 싶을 때 우리는 유형으로부터 '비폭력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유형이 비록 정확하지 않다고 해도 자신의 본성이나 습성에 대해 대략 감지 가능하고, 그것에서 당장 완전히 자유롭게 벗어나거나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다. 이를테면 외향형이 어느 날 갑자기 내향형으로 변신할 수 없고, 사고형이 어느 날 갑자기 감정형으로 탈바꿈하기는 어렵다. 그렇게 폭력적인 변화, 즉 자기의식에 억지로 가해지는 폭력은 또 다른 심리적-신체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내가 보기에) 비폭력주의자인 융은 경고한다.
이런 때 융의 제안은, 의식이 주로 사용하는 기능에 완전히 대극이 아닌 각자의 제2의 기능을 찾아 활용하기를 권한다. 예컨대 (내향이든 외향이든) 합리적 판단 유형인 사고와 감정은 서로 대극이다. 사고는 감정을 억제해야만 활성화되고, 사고는 감정활동에 방해가 된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 의식적인 사고형이라면, 그 사고를 정면으로 방해하는 감정이 아닌, 지각이나 직관 쪽에서 서서히 노력해 보는 것이 좋다고 한다. 사고를 통해 세상살이에 적응한 그의 의식이, 그 기능들을 감정보다는 훨씬 '덜' 억압하고 있기에 그들은 도움을 요청하는 사고를 외면하지 않고 도와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