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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Aug 01. 2024

기쁨 속의 덕(Virtus)

스피노자 <<에티카>> 느리게 읽기


감정 역학의 마지막 법칙 - "기쁨에서 생기는 욕망은, 다른 사정이 같다면, 슬픔에서 생기는 욕망보다 강력하다." (4부 정리 18) - 을 설명하던 스피노자는, 문득 바로 이 지점에서 이성의 명령 즉 덕(Virtus)이란 무엇인가를, 갑자기 몇 번이고 반복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한다.


"이성은 본성(자연)에 반대되는 것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이성은 각자가 모두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자기에게 진실로 유익한 것을 추구하며... 절대적으로 각자가 가능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4부 정리 18의 주석)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덕은, 주로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라든가 '이기심은 나쁘고, 이타심이 좋은 것' 아닌가? 그러나 스피노자는 철학자답지 않게, '너 자신을 사랑하라'라고 또한 '너의 이익을 추구하라'라고 설법하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내가 이것을 여기에서 제시한 이유는, 각자는 모두 자기의 유익(이익)을 추구해야 마땅하다'라고 하는 이 원칙이 덕과 도덕의 기초가 아니고, 부도덕의 기초라 믿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이다." (4부 정리 18의 주석)


*


스피노자가 말하는 덕(virtus)의 가장 좋은 예는 아마도 그의 삶일 것이다. 그는 날 때부터 유대인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하고 키워낸 사유와 철학은 그런 공동체 안에서는 보존되기 어려웠다. 그가 키우는 사상의 내용을 알게 된 공동체는 역사상 가장 큰 저주로써 스피노자를 파문했다.


그가 속했던 유대인 공동체는 역사적인 운명 공동체이자 경제공동체이기도 했다. 스피노자는 한동안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아 공동체 내에서 제법 잘 나가는 상업에 종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런 생활 역시 그의 새로운 사유와 철학을 보존하는 데에 부적합했던 것 같다. 공동체에서 파문된 스피노자는 안경 세공 장인이 되어 낮에는 생계를 위해 렌즈를 깎았다. 그러면서 아직은 너무 새로운 자신의 철학을, 철저하게 믿을 만한 친구들하고만 토론하고 공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은 알려지고 말았고, 대학의 교수직을 제안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철학할 자유"를 위해 명예와 부를 약속하는 교수직을 거절했다. 그리고 꼭 필요하다 판단할 때, 자신의 사상을 '익명으로' 발표했다. 그렇게 스피노자는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추구하고 보존하려고 노력했고 덕분에 4백 년 후 지구 반대편에서 살아가는 내가, '내게' 진실로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느리게 생각해 보면서 글을 쓰고 있다.


*

 

스피노자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개체가, 본성적으로 자기 실존을 유지하려는 무한한 충동(Conatus)을 지닌다 여겼는데, 그게 바로 우리가 스스로 의식하는 욕망이다. 욕망은 본성상 스스로를 확장시키기를 원한다. 우리가 느끼는 기쁨은 그런 욕망이 충족되었다는 느낌이다. 따라서 기쁨과 욕망은 서로를 증대시킨다.


그러나 욕망이 무언가의 방해를 받는다면, 자신의 힘이 축소되었다는 느낌 즉 슬픔을 느끼게 된다. 슬픔이란 힘의 좌절이고, 자기 본성과 반대되면서 더 센 외적 힘에 의해 자기 본성이, 본성을 확장하려는 욕망이, 억눌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따라서 "기쁨에서 생기는 욕망은, 다른 사정이 같다면, 슬픔에서 생기는 욕망보다 강력하다." (4부 정리 18)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욕망은, 그 자신의 본성과 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기쁘게 살기 위해서는 자기 본성과 일치하는 것을 찾고 그것과 결합해야 한다. 그러면 자기 본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건 다시, 내게 '본성적으로' 느껴지는 기쁨 속에서만 파악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유덕함의 덕목을 나열하거나 절대적인 덕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에게 느껴지는 기쁨에 대해서, 비록 그것이 아직은 수동적인 기쁨일 뿐일지라도, 잘 이해해 보라 말할 뿐이다. 그래서 그는 '기쁨의 철학자'라 불린다.


*


손흥민의 다리를 기쁨으로 뛰게 한 것과 조성진의 손가락을 기쁨으로 뛰게 만든 것은 다른 본성일 것이다. 물론 우리 모두 그 정도의 완전성에는 가 닿지 못할지라도, 각자는 자기만의 독특한 본성이 있다. 또 자신의 본성과 같은 본성을 만났을 때 기쁨을 느끼고야 만다는, 공통된 본성도 있다.


그러니 인간의 공통된 본성인 기쁨 속에서, 저마다의 독특한 본성에 대해서 탐구하라. 그러면 자신의 기쁨에 대해 이기적으로 탐구하는 일이 곧바로, 이 세상에 크거나 혹은 작게나마 공헌하는 일임을 알게 될 것이다. 스피노자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하니, 나도 따라서 한번 더 내 귀에 못을 박아본다.


"참으로 유덕하게 행동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기초로 하여 - 이성의 지도에 따라서 행동하고, 생활하고,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는 것 (이 세 가지는 같은 것을 의미한다)일 뿐이다." (4부 정리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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