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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Jul 28. 2024

감정 역학은 일단 이렇습니다만

스피노자 <<에티카>> 느리게 읽기


스피노자에 따르면, 감정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자연 현상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단순한 하나의 법칙이 감정들 사이의 역학 관계에 토대가 된다. (일단 외워 둡니다!)


"감정은 그와 반대되고 더 강력한 다른 감정에 의하지 않으면, 억제될 수도 제거될 수도 없다." (4부 정리 7)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듯, 강한 감정이 약한 감정을 잡아먹는다는 말이다. 너무 냉혹한가? 그러나 예컨대, '사랑(의 아픔)이 다른 사랑으로 잊히는' 경우처럼 반드시 냉혹하지만은 않은, 오히려 낭만적인 상황도 연출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감정이 더 강하고 어떤 감정은 더 약한 것인가?


*


"감정은 그 원인이 함께 있지 않다고 표상되는 경우보다, 그 원인이 현재 함께 있다고 표상되는 경우가 더 강력하다... 따라서 미래나 과거의 사물에 대한 감정은, 다른 사정이 같다면, 현재의 사물에 대한 감정보다 약하다." (4부 정리 9와 따름 정리)


내게 더 좋은 것이 무엇인지 뻔히 알면서 더 나쁜 것을 선택하는 이유는, 좋은 것이 가져다주는 결과가 너무 멀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꾸준히 오랫동안 해야 얻을 수 있는 건강이나 시험 성적 같은 건 항상 멀리 있고, 혀를 기쁘게 하는 음식의 달콤함과 같이 놀자고 불러내는 친구들과의 즐거움은 늘 가까이에 즉각적으로 함께할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하는 사물에 대한 감정은, 가능적인 것 또는 우연적인 것 즉 필연적이지 않은 것으로 표상하는 사물에 대한 감정보다 강하다." (4부 정리 11)


또한 맛있는 음식과 좋은 친구들은 나를 배신하는 법이 거의 없다. 그러나 시험 성적은 그때의 운과 난이도에 따라 나를 배신하며, 건강은 오랜 운동을 통하지 않더라도 좋은 영양제와 과학적이고 빠른 병원 처방으로도 왠지 가능할 것만 같지 않은가.


*


정신적 사건인 감정은 신체적 감각과 비슷하다. 예컨대 더위에 대한 내 감각은, 내가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알건 모르건 간에, 별 차이가 없다. 마찬가지로 내게 '느껴지는' 감정은, 진실이 무엇인가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선과 악의 참된 인식은 그것이 참인 한에 있어서는 어떠한 감정도 억제할 수 없고, 단지 그것이 감정으로 간주되는 한에 있어서만 감정을 억제할 수 있다." (4부 정리 14)


내가 미워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사실 그는 좋은 사람이라고 누군가 알려준다 해도 내 안의 감정은 금세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그 얄미운 사람 덕분에 내가 곤경에서 벗어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면? 그에 대한 고마운 감정이 생겨나면서 미운 감정은 어느 정도 사그라질 수도 있다.)    


"선과 악의 인식에서 생기는 욕망은, 우리를 사로잡는 감정들에서 생기는 다른 많은 욕망들에 의하여 압도되거나 억제될 수 있다." (4부 정리 15)


건강을 위해서 꾸준히 운동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한들, 나를 둘러싼 주위 사람들이 모두 먹고 마시기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게다가 나는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리기를 바라는 외향형의 인간이라면? 그렇다면 잠시 생겨났던 운동의 욕망은 곧바로 억제되었다가 , 나도 모르는 새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


그렇다 해도 이 모든 (자연의) 법칙이 실상 핑계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을, 당신도 알고 나도 알고, 당연히 스피노자도 안다!


"그러나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는 것보다 무지한 것이 더 낫다거나, 또는 감정의 제어에 있어서 어리석은 자와 지자(知者)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결론짓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감정의 제어에 있어서 이성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우리 본성의 능력과 무능력을 모두 알아두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4부 정리 17의 주석)


그렇다면 나 하나의 의지를 압도하며 게다가 나의 앎 마저 무력화시키면서, 내 주변에서 강력하게 작용하는 감정의 힘 사이를 과연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기쁨을 진실로 소중히 여기는 이들에게는 감정 역학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진저,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뚜둥~! '기쁨의 철학자'인 스피노자의, 마지막 감정 역학의 힌트는 다음과 같다.


"기쁨에서 생기는 욕망은, 다른 사정이 같다면, 슬픔에서 생기는 욕망보다 강력하다." (4부 정리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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