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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Jul 26. 2024

예속된 운명의 인간

스피노자 <<에티카>> 느리게 읽기


절대적  일원론자 스피노자는 선과 악에 대해서도 절대적 분별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선악의 '저편'이 아니라 '이편'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말(선과 악)을 보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 본성의 모형(전형)으로 여기는 인간의 관념을 형성하고자 욕망하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보존하는 편이 우리에게 유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4부, 서문)


스피노자가 말하는 '인간 본성의 모형에 관한 관념'은, 플라톤의 '이데아'나 융의 '원형'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떤) 사람들은 자꾸만 이상형을 만들고, 그걸 실현해보고자 하면서 그로부터 또다시 새로운 이상형을 만들어 낸다. 좋은 사회, 좋은 지도자, 좋은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는 이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그런 이상형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그렇게 '더 이상적인 것을 꿈꾸는' 것이 인간의 '본성' 안에 있다고 본다.  


*

 

그런데 문제는 그런 좋은 것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서로 합의하고, 규정하면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쪽을 향해 가지 못한다. 왜?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가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는 이유는, 가난하거나 부모를 잘못 만나거나 배울 기회가 없었거나 아니면 정치가들이 썩어빠져서 등등이 아니라, 우리가 감정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감정을 제어하고 억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력을 예속(Servitudo)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감정에 종속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운명의 지배 아래에 있으며, 스스로 더 좋은 것을 보면서도 더 나쁜 것을 따르도록 운명의 힘에 의해 강제되기 때문이다." (4부 서문)


(물론 가난하거나 부모를 잘못 만나거나 배울 기회가 없었거나 아니면 정치가들이 썩어빠져 있다면, 그건 어마어마한 감정의 화산 폭발을 일으켜 우리를 더욱 예속시킬 것이다.) 


*


'나의' 감정이라는 말은 곧잘 우리를 속인다. 실제로는 감정에 예속되어 있는 처지인데도, 마치 감정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다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니 '감정의 나'가 오히려 맞는 표현이리라!) 종소리는 종을 움직이게 하는 다른 힘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결코 울려나오지 않는다. 마치 종소리처럼, 우리의 감정은 (내가 제어하지 못하는) 주변의 힘들이 내 신체에 가해지고 있다는 걸 알려준다. 그러나 종소리와는 달리, 우리의 감정은 내게 작용하는 힘이 지금 나에게 선(좋음)인지 아니면 악(나쁨)인지까지 알려준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한 인간이 오로지 자기 본성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변화만 겪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4부 정리 4)


"선과 악(좋음과 나쁨)에 대한 인식은, 우리에게 의식된 기쁨 또는 슬픔의 감정일 뿐이다."(4부 정리 8)


*


'윤리학'이라는 뜻의 스피노자의 <<에티카>> 3부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에 대해, 마치 사물처럼 분석했다. 이어지는 4부에서 스피노자는 감정을 마치 사건처럼 다룬다. 자연의 일부에 불과한 내 신체와 나를 둘러싼 거대한 외부의 힘이 마주칠 때 일어나는 사건들. 그런데 자연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언제나 역학의 법칙에 따른다. 


감정은, 인간도 자연이며, 자연의 힘에 예속된 실존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사건이다. 따라서 감정의 역학 법칙을 탐구하고, 나를 예속하는 것들이 과연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만약, 그 작동 원리를 (역으로) 이용해 잠시의 자유라도 맛보기를 원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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