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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Jul 18. 2024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스피노자 <<에티카>> 느리게 읽기


'무의식'이나 '심리학' 같은 표현을 쓴 적이 없지만, 그의 책 <<에티카>>를 읽다 보면 스피노자야말로 무의식 심리학의 원조라는 걸 알게 된다. 말로써 '의식'과 '무의식'을 (혹은 '전의식' 혹은 '하의식' 등) 나눌 수 있을 뿐, 일원론자 스피노자에겐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그저 우리 안의 '관념'일뿐이다.


'의식의 스펙트럼'이라는 말을 쓴 융도,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고 항상 변화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의식'과 '무의식'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일은, 어쩌면 그저 뭐든 확실히 하고 싶은 우리의 이분법일 뿐이다. 곰곰이 따져보면, 무의식적인 일이라고 해서 우리가 아예, 완전히 못 알아채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


신체에서 어떤 사건-변용이 발생하면, 정신 속에서도 동시에 관념이 발생한다. 그런데 인간의 신체는 매우 복잡하고도 복합적인 '장소'인지라, 수많은 사건사고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 따라서 관념들 역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게 되는데, 그중 많은 것들을 우리는 그저 내버려 둘 것이다. 그렇게 완전히 잊혀버릴 위기의 무의식도 물론 문제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중 어떤 것들은 전혀 관련성이 없는 엉뚱한 서랍 속에 넣어버리는 일이다. 그러면 엉뚱한 의식의 사슬이 생겨난다. 예컨대 이상하게도 노란색에 끌리는 어떤 사람이, 그날따라 잘 안 입던 노란 옷을 우연히 입게 된 누군가를, 평소 잘 가지 않던 장소에서 우연히 마주쳐서, 그를 자기 정신 속 '매력'이라는 서랍에 정리해 넣을 수도 있다.


"모든 사물은 우연에 의해서 기쁨이나 슬픔, 또는 욕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3부 정리 15)


*


그러나 사건이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의 오해는 또 다른 오해를 불러오게 마련!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그 사람에게 나 또한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지 않겠는가. 따라서 그는 노란 옷을 입은 그 사람을 자세히 관찰하게 되며 그 사람이 좋아하는 (그렇다고 스스로 상상하는) 일을 하고자 한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만든다고 표상(상상)하는 일을 행하면, 그 사람은 자기가 원인이 되는 기쁨에 의해 변용될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을 기쁨과 함께 바라볼 것이다." (3부 정리 30)


노란 옷을 입은 사람은 어쩌면 실제로는 그 행위를 원하거나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매력적인 그 사람을 기쁘게 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사람은, (자신의 상상 속에서) 스스로 기쁨의 원천이 되어버리고, 그에게 (실은 자기 자신의 기쁨 속에) 점점 더 빠져들게 된다.


*


그렇다면 노란 옷의 그 사람은? 만약 그가 자존감과 자긍심이 도에 넘쳐 자만심에까지 이른 사람이라면, 타인의 호의를 아무런 부담 없이 받으면서 도리어 더 의기양양해질 수 있다. 그에겐 (자신의 상상 속에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 관심을 보이고 잘해주는 사건은 좀 당황스러울 것이다. 처음엔 경계하고 살펴보겠지만 그에게서 별다른 위험요소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별로 잘한 것도 없는데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까? 또 별로 특별한 것도 없는 나를 매력적으로 봐주는 그 사람을, 나 역시 호의적으로 대할 가능성이 높지 않겠는가?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을 표상(상상)하지만 자신은 그 사랑의 원인이 될 만한 것을 행하지 않았다 믿는 사람은, 도리어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3부 정리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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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에 끌리는 사람은, 자기가 왜 노란색에 끌리는지 잘 모른다. 혹은 자신이 노란색에 끌린다는 사실조차 그 자신은 모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노란색에 끌리게 된 필연적 이유는 분명 있을 것이다. 기억하거나 의식하지 못한 어떤 때에, 노란색은 그의 기쁨과 연결되어 있어서 그는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노란색만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걸  알게 된다면, 그는 노란색을 입은 사람 그 자체에게는 아마 덜 매력을 느끼지 않겠는가?


우연히 노란 옷을 입었던 그 사람 역시, 자신을 매력적으로 오해(!)한 노란색에 끌리는 사람의 필연성을 모른다. 자기 자신조차 모르는 일을, 타인이 어떻게 알겠는가?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노력을 통해서 나를 사랑하는, 온갖 정성이 들어간 행위를 나에게 자유롭게(!) 행하는 그 사람이야말로, 더 고맙고 더 애틋한 법이다.        


"우리가 자유롭다고 표상(상상)하는 사물에 대한 사랑 및 증오는, 다른 사정이 같다면, 필연적이라 표상(상상)하는 사물에 대한 사랑 및 증오보다 클 수밖에 없다." (3부 정리 49)


스피노자에 따르면 놀랍게도, 우리가 누군가를 증오하게 되는 것 역시 사랑에 빠지는 메커니즘과 완전히 똑같다! 단지 처음의 한 우연 속에서, 자기 자신을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응시하게 되는 점만 다를 뿐이다. (그러니 필요하다면, 이 글의 제목을 “나는 왜 너를 증오하는가”로 바꿔도 무방하다!)


*


글을 쓰며 되돌아보니 나 역시 연애 시절, 남편을 사랑해서 수백 통의 편지를 쓴 건지 아니면 수백 통의 편지를 쓰기 위해서 (써야만 하는 필연성에 의해서) 사랑을 한 건지 무척 헛갈리누나.


우리는 그때 어쩌면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스피노자가 되살아나 내게 위의 정리들을 들이밀면서 '그래도 또 사랑 같은 걸 할 텐가?' 하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때는 오해였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내가 무지했던 온갖 '우연'의 외투 아래 감춰진 그 필연성들까지도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들어서(?) 그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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