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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Jul 11. 2024

감정과 사고의 랩소디

스피노자 <<에티카>> 느리게 읽기


나의 요즘 MBTI는 INTJ다. 얼마 전까지는 INTP였다. 수십 년 전 혹은 수십 년 후라면, 혹시 I가 E로 완전히 돌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지만, 세 번째 자리의 T(Thinking)는 왠지 언제까지고 변하지 않을 것만 같다. MBTI의 원조인 융도 유형의 나침반에서 감정적 판단(Feeling)과 사고적 판단(Thinking)을 서로 대척점에 놓았다. 사고형인 사람이 반대편으로 돌변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말이다.


사고형 인간은, 일어난 사실에 집중하면서 아주 객관적인 사고를 한(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 같은 인간은, 자기 꿈에 대해 말할 때조차 감정을 배제한다. (어느 날 내 꿈 이야기를 듣던 남편이 "그래서 꿈에 기분이 어땠냐?"라고 물어봐줘서 알게 되었다.) 그런데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런 사고의 이면에서 그러한 사고의 잣대가 되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감정이다.


"각자는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무엇이 더 좋은 것이고 더 나쁜 것인지를 자신의 감정에 의하여 판단하고 평가한다." (3부 정리 39의 주석)


*


나와 같은 사람들은 종종, 자기감정과 상관없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옮고 그름'에 대해 말하면서 타인을, 또한 자기 자신을, 평가하고 비판하기를 아주 잘한다. 요즘처럼 덥고 습한 날에 가족들이 에어컨을 '쉽게' 켜려고 하면, 나는 환경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인간 신체의 자가 면역체계까지 들먹인다.


그러나 실은, 나는 에어컨 바람 앞에 서면 바로 콧물이 줄줄 흐르는 비염인이다. 거기에 내 살가죽과 뼈와 내장 사이에는 근육과 지방이 매우 부족해, 에어컨의 찬 바람은 나의 뼈와 내장 기관들을 바로 강타하는 것이다. 반면 다른 가족들은 나와 달리 에어컨 앞에서 훨씬 더 쌩쌩하다. 그래서인지 스피노자는 선과 악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린다.


"나는 선(善)을 모든 종류의 기쁨을 가져오는 것, 특히 온갖 열망을 만족시키는 것이라 이해한다. 또한 악(惡)을 모든 종류의 슬픔, 특히 열망을 좌절시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물이 선하다 판단해서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욕망하는 사물을 선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3부 정리 39의 주석)


*


에어컨 문제는 그렇다 해도, 정말로 객관적으로 나쁜 절대 악(惡)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일원론자인 스피노자에게는, 선-악의 절대적 구분 같은 것은 없다! 평상시에는 살인이 죄악이지만, 전쟁터에서는 그렇지 않다. 살인이 죄인 것은 단지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데에 그 편이 훨씬 더 사람들에게 이롭고 사람들 자신을 기쁘게 하기 때문이다.


에어컨을 틀면 환경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은, 백 번 맞는 말이 맞다! 하지만 관심 없는 이들에게 그건 좀 멀게 느껴지는 반면, 내가 비염이고 약골인 뼈가 시리다는 건 어쩌면 좀 더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나의 약함과 괴로움에 대해 호소하기보다는, 객관적이고 보편적 선(善) 운운하면서 (약골인) 나의 우위를 지키고 싶은 것은 아닌가? 가족들을 환경 파괴범으로 몰아가는 나는, 스피노자에 따르면, 그들에겐 열망을 좌절시켜 슬픔을 유발하는 악-가정 파괴범-이 되고 만다.


*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은 대체로 수동이다. 외적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슬픔과 기쁨-부적합한 관념-이 대부분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또한 스피노자에 따르면, 능동적인 감정도 있다.


"정신은 자기 자신 및 자신의 활동능력을 파악할 때 기쁨을 느낀다. 정신이 자기 자신을 고찰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나면, 그로 인하여 정신은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며... 그만큼 큰 기쁨을 느낀다." (3부 정리 53)


능동적 정신에서 생산되는 능동적인 감정에는, 일말의 슬픔도 없다. 왜냐하면 슬픔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의 힘과 활동 역량이 축소되는 느낌인 것인데, 인식의 영역을 넓혀가는 중에 있는 능동적 정신에겐 그런 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또한 스피노자에 따르면, 진정으로 사유하는(Thinking) 사람이라면, 항상 기쁨 -적합한 관념-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에어컨의 폐해에 대해 떠들어 댈 때 나는 기쁜가?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기분이 나쁘기 때문에 이런저런 사실들을 끄집어 내, 그들을 간접적으로 비난하는 것이다. 물론 MBTI의 원조인 융에 따르면 이런 과정은 모두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고, 그래서 감정형(Feeling)과 사고형(Thinking)이 서로 반대로 변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본 것이다. (실상 MBTI 검사 결과는, 모두 스스로 판단하는 자아 '의식'의 소산일 뿐이다!)


*


무의식적인 감정을 대신해 단지 사고하는 척하는 게 아닌, 진정한 사유자라면 언제나 두 종류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용기(굳건함)이다. 이는 이성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욕망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본성에 대한 인식이 필수적이다. (에어컨의 환경적 폐해를 알기 전에, 나는 나 자신의 약함과 그 대처법에 대해 더 잘 알아야 한다!)


두 번째는 아량(관대함)이다. 이는 이성적으로 다른 사람을 돕고 그들과 우정으로 연결되려는 욕망이라고 한다. (먼 곳의 북극곰과 연대하려는 나도 훌륭하지만, 내 신체에 매우 밀착된 전혀 다른 신체들에 대한, 우정 어린 이성적 이해가 절실히 필요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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