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롤모델은 황서방이었다
엄마가 '젤로 좋아하는' 반찬은 태양초 고춧가루가 담뿍 들어간 김치와 빠알간 고추장이다. 만성 고혈압인 엄마는 그런 두 가지를 조합해 먹으며, (내가 '잉카의 바닥 모를 우물'보다 더 깊은 한숨을 쉬거나 말거나) 늘 같은 '레퍼토리'를 시작한다.
"옛날에 우리 집 황서방은, 맨날 이렇게 먹고도 일 잘하고 튼튼하기만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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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생각하는 건강 밥상의 롤모델 황서방은, 어린 엄마를 향해 '영특하다'라고 침이 마르게 칭찬하던 친할머니 집 큰 일꾼이었다. 인민군을 앞세운 동네깡패들에게 할머니 대신 잡혀가 흠씬 두들겨 맞은 사람도 황서방이었고, 그렇게 맞고 돌아와서 떠난 피난길 내내 어린 엄마가 다리 아플까 등지게에 지고 묵묵히 오래 걸었던 사람도 바로 황서방이었다.
그런 황서방은 다른 일꾼들과 달리 홀로 독상을 받는 특권을 누렸다. 그런데 어찌나 밥을 맛있게 먹었던지, 어린 엄마는 그 모습을 구경(?)할 때마다 입 안에 침이 저절로 고였다. 커다란 사발에 수북한 보리밥을 우선 빨간 고추장으로 썩썩 비벼서 크게 한 숟가락을 뜨고, 그 위에 빨간 고춧가루 담뿍 넣어 담근 (잘게 자르지 않은) 길다란 열무김치를, 그것도 젓가락 나부랭이가 아닌 맨손(!)으로 쓱 집어 밥 숟가락 위에 척 올려 한입 가득 넣은 다음, 와작와작 씹는 황서방의 소리는 정말 너무 먹음직했다.
어린 엄마 : (침을 꼴깍 삼키며) "할아버지, 그거 안 매워?"
집안 큰 일꾼 황서방 : (계속 와작와작 소리를 내며) "하나도 안 매워, 엄~청 맛있어!"
어린 엄마 : (황서방 밥상에 더 바짝 다가가며) "진짜, 안 매워?"
집안 큰 일꾼 황서방 : (좀 더 맛있는 소리를 내며) "응, 진짜 안 매워!"
어린 엄마 : (황서방 숟가락 쪽으로 입을 쭉 내밀며) "그럼, 나도 한 입만 줘봐!"
그러면 황서방은 빙그레 웃으며 딱 한 숟가락만 맛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 맛은 어린 엄마에겐 사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매웠다. 그래도 엄마는 황서방이 원망스럽기는커녕, 이렇게나 매운 것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그가 그저 위대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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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팔십이 다 된 지금도, 보리밥을 고추장에 썩썩 비벼 그 위에 김치를 척 올린다.
심약한 딸 : "혈압에 매운 거 안 좋다니까!"
우렁찬 엄마 : "시끄럿!! 내가 좋아하는 거 먹고, 그냥 빨리 죽을 거야!"
그리곤 와작와작 소리를 내며 오래전 밥상 앞의 황서방과 일체가 된다.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에피쿠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