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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르mihr Sep 11. 2024

내 손만 안 잡아주던 사람

엄마에게도 첫사랑은 있었다


지난겨울, 온 세상이 하얗게 눈으로 덮인 어느 아침, 유튜브와 함께 '비목(碑木)'을 이중창으로 불러 젖히는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의 불협화음은 귀에 거슬리고, 옛 노래 그 자체도 처량 맞기 그지없도다! 나는 유튜브와 엄마, 둘 모두를 당장 정지시키고 싶었다.


심약한 딸 : "아니, 눈이 예쁘게 왔는데, 왜 그런 노래를 불러?"

우렁찬 엄마 " "눈이 오면... 이 노래를 좋아하던 첫사랑이 생각나..."

심약한 딸 : "처... 첫... 사랑?"    


*


고향을 떠나 상경한 뒤, 엄마는 소녀가장이 되어 일하느라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물론, 엄마가 그렇게 번 돈으로 엄마의 남동생 셋은 모두 학교에 다녔다. 하아~) 너무 일찍 학업에서 멀어진 게 못내 아쉬웠던 엄마는, 어느 날 야간학교에 등록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그야말로 주경야독의 생활을 해 보리라.


그러나 되찾은 학업의 기쁨도 잠시. 낮 동안 일로 고된 몸은 밤공부에 대한 정신의 의지를 점점 흐리게 했다. 게다가 야간 여학교 앞에는 늘 배회하는 남학생 무리가 있었으니, 사건이 일어나는 건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우렁찬 엄마 : "일 끝나고 친구들이랑 같이 학교 가는 데, 갑자기 무슨 쪽지 같은 게 날아오잖아!"

심약한 딸 : "오잉? 쪽지?"

우렁찬 엄마 : "어.. 그러고 나서 우리 수업이 밤 9시 끝났는데, 쪽지 날렸던 남학생들이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더라고."


그 날 이후, 그 남학생 무리와 여학생-엄마와 친구들 무리는 한동안 주 2회 정기적인 만남(?)을 가졌다. 주말의 본격적인 만남과, 그 만남을 준비하기 위한 주중의 만남. 주말을 계획하는 주중의 만남은 주로 음악다방이었다. (나도 어릴 때, 주로 이덕화나 임예진이 까만 교복을 입고 등장하던 옛 영화 속에서 본 적이 있다.)


당시 음악다방에는 '시리' 말고, 제목을 쪽지에 적어 신청하면 사연과 함께 바로 틀어주는 진짜 사람 디제이가 있었다. 어린 엄마의 첫사랑이었던 남학생은 매번, 하고 많은 음악 중에서 내 신경을 곤두세우던 바로 그 노래, '비목'을 신청했던 것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전쟁 때 부모를 모두 잃었다고 했다.


어쨌거나, 그 여학생과 남학생 무리는 주말이면 함께 서울 변두리의 유원지로 향했는데, 주로 산에 올랐다. 가파른 오르막길에서 남학생들은 힘들어하는 여학생들의 손을 잡아끌어주었다. 그러면서 청춘남녀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매우 부자연스러운(!) 스킨십을 즐겼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의 첫사랑 남학생은, 다른 친구들 손은 다 잡아주면서 유독 엄마의 손만 잡아주질 않았다는 것이다.


심약한 딸 : "아니, 왜~?"

우렁찬 엄마 : "그야, 걔가 나를 좋아하니까 그렇지!"

심약한 딸 : "?!???!!!"


*


여럿이 함께 오르던 산길에서 엄마 손만 안 잡던 남학생과 단 둘이, 엄마는 '눈 덮인' 덕수궁 돌담길도 오래 걸었다. 물론 그때도 역시, 둘은 손 한번 못 잡았다. 그러다가 학교를 졸업한 남학생은 (생활을 해결하려) 군에 입대했고, 엄마는 계속 바쁘게 소녀 가장 노릇을 했다. 엄마가 편지를 한 번인가 썼던 것도 같은데, 답장은 받지 못했다. 때는 바야흐로 '개발의 시대'였고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도시-빈민-노동자였던) 엄마네는, 서울의 이쪽 변두리에서 저쪽 변두리로, 이리저리 이주해야 했다.


스마트폰도 삐삐도 심지어 전화기마저 드물던, 그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만 가능했던, 참으로 싱거운 사랑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 또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쩌면 오히려 이런 것이야말로 영원히 끝나지 않을 사랑 이야기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별 스펙터클도 없고 아무 결말도 없기에, 끝 모를 아쉬움으로 무수한 결말을 상상하며 그 시간 속으로 언제라도 다시 걸어 들어갈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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