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탤런트 뺨쳤다
어린 엄마가 한창때 점심도 못 먹고 자전거나 타면서 더 배고파했던 건, 따지고 보면 바뀐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술만 마시던 무능한 아버지 탓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나는 엄마가 한 번도 자신의 아버지, 즉 나의 외할아버지에 대해 원망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 그게 좀 이상해서 물어보면 엄마의 대답은 한결같다.
"우리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예뻐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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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고향에서 엄마의 아버지는 '면장님'이었다. 엄마가 다니던 '국민학교'는 아버지의 사무실 바로 옆에 있었다. 당시에는 다들 그랬지만, 엄마집부터 학교까지는 족히 십리길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산 넘고 물 건너 학교를 다녔고, 어린 엄마 역시 그랬다.
그러나 엄마의 아버지는 달랐다. 면장님에게는 공무수행을 위해 기사까지 달린 '찝차'가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모두 걸어가는 길 사이로, 아버지의 '찝차'를 타고 지나가면 얼마나 기분이 우쭐해지겠는가. 그러나 아버지는 그 멋진 '찦차'를 결코 태워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영특했던' 엄마는, 수업이 끝난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아버지의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 그리곤 아버지가 나오는 시간에 맞춰, '찝차' 앞에 나뒹굴면서 비명을 질렀다.
우렁찬 엄마 : (땅바닥을 뒹굴며)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친구 1 : (깜짝 놀라 큰 소리로) "어머어머, XX야, 너 왜 그러니?"
친구 2 : (난리법석을 떨며) "XX야, 너 배가 많이 아프니? 어떡하니!"
친구 3 : (아버지의 '찝차'에 매달려서) "아저씨, XX가 많이 아픈가 봐요!!"
어차피 집에 가는 길인데, 아픈 아이들 좀 태우고 간다 하여 면장 체면이 구겨질 리 없다. 그리하여 한바탕 신나는 공연을 끝낸 엄마와 친구들은 아버지의 '찝차'에 태워져, 개선장군처럼 자랑스럽게 집으로 돌아왔다. 아프던 배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언제나 씻은 듯이 나았지만, 아버지는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는커녕 흐뭇한 눈으로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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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들을 때면, ('딸바보 아빠'가 난무하는 세상에 사는 나로서는) 이게 과연 엄마의 아버지가 엄마를 예뻐한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엄마가 아버지를 예뻐한 것은 아닌지, 아리송하다. 내게는 엄마를 예뻐했다는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서울에 올라온 뒤 술만 마셔댔기 때문인지, 엄마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래서이지 않을까. 엄마의 기억 속에서, 자신을 고생길로 몰아넣은 오랜 시간 무능했던 아버지는 아주 작다. 대신 고향에서 아주 잠깐 매우 자랑스러웠던 아버지의 모습은 훨씬 크고 강력하다. 기억 속에 남는 일에는 대체로, 짧은 것들이 유리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