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고 어둡고 꼬질꼬질한

by 미르mihr


떠나기 일주일 전의 늦은 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비행기표를 사 '버렸다'. 그때부터 이것저것 알아보고 준비할 때는 그냥 그랬는데, 막상 떠나기 전날 밤. 문득 두려움과 함께 '내가 왜 그랬을까'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일 내가 정말로 '혼자서' 해외로 여행을 간다고? 저질러 놓고도, 믿기지 않았다.


*


처음엔 당연히 배낭을 메고 떠나려고 했다. 여름 나라니깐, 가벼운 여름옷 몇 벌만 챙기면 되지 않겠나. 또 혼자 가니까, 있는 듯 없는 듯 다니려면 배낭이어야지. 그런데 처음 혼자 해외여행을 가면서, 겁도 없이 7박이네. 게다가 혼자 가서 아프기라도 하면? 여름 나라라고 정말 반팔만 필요할까?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하다는데? 이런저런 두려움과 무지로 인해 부려놓은 짐이 점점 많아져, 배낭으로는 어림도 없어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까치발을 하고 손을 뻗어 선반 위에 모셔 둔 트렁크를 내려, 다시 주섬주섬 짐을 챙겨 보았다. 이제 트렁크니깐, 마음 놓고 이것저것 또다시 짐을 늘린다. 그랬더니 넉넉하던 트렁크도 꽉 차버린다. 짐을 덜어냈다가 다시 채웠다가를 몇 번이나 반복하다가, 마침내 지퍼를 채워본다. 그러다가 무의식적으로 트렁크를 잠갔다. 어, 그런데 비번이 뭐였더라?


결혼기념일? 내 생일? 남편 생일에 아이들 생일까지 모두 돌려봤지만 가방은 열리지 않는다. 혼자 여행가지 말라는 하늘의 계시일까? 그렇더라도 비번은 풀어놔야 할 텐데. 대체 몇 번일까? 가방을 열기 위해 나는, 세 자리 숫자로 만들 수 있는 모든 수-조합을 차례차례 해 보기로, 밤을 새워서라도 알아내기로, 결심한다. (0,0,0)을 시작으로 맨 뒷자리부터 하나씩 바꿔나갔다. 막상 해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별로 안 걸려서, 밤은 새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4, 7, 2)쯤을 돌려보고 있을 때, 둘째가 학원에서 돌아와 나를 보곤 이렇게 말했다.


"엄마, 그거 비번 (0,0,0)인데?"


엥? 그건 맨 처음에 해봤는데. 그렇다. 나는 비번을 잊은 게 아니라, (얼마나 오랫동안 안 썼으면!) 트렁크 여는 법을 잊었던 것이다. 잠금쇠 옆 여는 버튼을 밀어야 하는 것을, 비밀 번호가 맞으면 저절로 지퍼 손잡이가 튀어 오를 것이라 생각했다. 휴. 이건 혼자 여행가지 말라는 계시가 아니라,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계시 아니겠는가.


*


초저녁에 출발한 비행기는 밤이 까맣게 깊어진 후에야 치앙마이에 도착했다. 좁고 불 꺼진 상점이 곳곳에 늘어선 침침한 늦은 밤의 공항. 낯선 냄새와 꼬불꼬불한 상형문자 같은 글자…그런 사이를 지나 택시 승강장으로 나왔다. 앱을 이용할 수도 있지만, 도착 첫날밤이니깐 나는 '안전하게' 시에서 운영하는 정액제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공항직원의 지시에 따라 번호를 받고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타고 가는 택시를 보니 다들 최신형 자가용처럼 보인다. 좋은데? 그런데 잠시 후 도착한 내 택시는, 다른 택시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닌가. 과연 달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오래된 연식에, 꼬질꼬질하고 찌든 냄새가 나는 택시. 그런 '위생' 상태 때문에 '안전'마저 의심되기 시작한 나는, 택시 안에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구글맵을 계속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슬쩍슬쩍 바라본 바깥 풍경은 어둡고 낯설고, 내가 탄 택시 때문인지, 무척이나 꼬질꼬질해 보였다. 길은 점점 더 좁고 어두워졌고, 그런 골목길 한 모퉁이에 사진으로만 봤던 숙소가 나타났다.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내겐 영겁 같았던 시간이 끝난 것에 안도하며, 나는 그 꼬질꼬질한 택시 기사에게 거스름돈 50밧을(약 2,300원) 팁으로 주려했다. 그러면서 슬쩍 그에게, 내 최초의 치앙마이 여행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해야지, 그런 알량한 생각을 했지만 그는 내 콩글리쉬를 알아듣지 못했다. 이 여자가 대체 거스름돈을 안 받겠다는 거야 받겠다는 거야, 긴가 민가 하는 표정이더니 끝내 자기에게 준다는 내 의도를 이해하고는 마냥 땡큐만 연발했다.


*


숙소 주인은 밤이 늦어 파티에 갔다며,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메시지만 보내왔다. 아무나 열 수 있을 것 같은 허술한 대문을 열고 다 보이도록 숨겨놓은 열쇠를 찾아 들어간 내 방은 사진으로 본 것과 완전 똑같았다. 그러면 예뻐야 하는데 뭔가 이상하다. 마치 내가 타고 온 택시처럼, 연식이 오래되고 그 탓에 구석구석이 어쩐지 꼬질꼬질하고, 오래된 에어컨은 커다란 소음을 내고, 비도 오지 않는데 창 밖에선 어디선가 물이 계속 똑똑 떨어지고, 알 수 없는 요상한 염불 소리 같은 것이 주기적으로 들리고....하아.


사진과 똑같은 예쁜 무늬의, 그러나 면이 아니라 폴리에스테르가 분명한, 몸에 척척 감기는 숙소의 침구 위에 누워 잠을 청하는 동안 나는, 대체 왜 이런 어둡고 무섭고 꼬질꼬질한 데를 그것도 혼자서 와 버렸을까 하는 마음에 울고 싶어지고 말았다.



같은 듯 다른 에어비앤비 사진(좌)과 내가 가서 직접 찍은 숙소 사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