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요즘 말로 '썸 타던' 한 남학생이 있었다. 나는 어느 날 그에게 내 마음을 가득 담아 편지를 써 보냈다. 그런데 며칠 뒤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내 편지를 받았는데, 이해가 안 간다면서 이 문장은 이런 뜻이냐 또 저 단어는 이런 의미냐라며 내게 질문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런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나는, 그래도 처음엔 내가 쓴 글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설명을 해 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고 대충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었다. 물론 내 마음의 정확한 표현을 원하던 그 남학생과, 내 마음의 상태를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했던 나도, 잘 되지 않았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내가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의 요지는 아마 ‘네가 좋다’는 것일 텐데, 그는 내게 왜 그렇게 정확한 의미를 묻고 싶었을까? 또 나는 그 짧고 쉬운 말을 두고, 왜 길고 뜻 모를 어려운 문장을 만들어 그를 곤란하게 한 걸까? 그러나 또 잘 생각해보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정확하게 그저 ‘네가 좋다’는 것은 아니었을 것 같다. 좋다는 것에도 여러 종류와 차원과 상황과 뉘앙스가 있으니 말이다. 엘리아데를 읽다 보니, 나는, 나의 내적 체험을 즉 전달 불가능한 것을 전달하려 했던 것이고, 나와 같은 체험을 하지 못한 그에게 그것은 전달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잘 될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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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할 기호로 가득했던 세상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된 농경과 도기 제조 등은 기술인 동시에 비의(祕儀)이기도 했다. 거기에는 한편으로 우주의 신성성이 내포되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론 입문 의례에 의해 전수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주론적 상징성에 지배되던 세계에서 어떤 대상은 그 자체일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것 즉 대상의 존재적 차원을 초월하는 기호이거나 집합소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경작된 밭은 한 조각의 땅 이상의 어떤 것으로서, 대지모의 몸이고 삽은 남근이며, 경작은 인간의 노동일뿐만 아니라, 대지모의 신성 결혼에 의한 풍요를 약속하는 성적 결합인 것이다.
고대 동양의 야금 작업과 금은 세공술은 엄격한 의미에서 기술이나 과학이었다. 그러나 이런 조작은 의례를 겸하고 있었다. 고대 후반까지도 어떤 기능이든 단순한 기술이 아닌, 각종 기능은 그 비법 속에 종교적 맥락과 의례적 성격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천 년간 서양세계를 지배하던 연금술 규율에 금을 모조하려는 시도를 결부시키는 것은 그들의 지적, 정신적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연금술이 독창성을 갖는 부분은 ‘물질의 복합적이고 극적인 생명’이라는 개념이다. 이런 체험은 비의를 통해서 가능한데, 비의에 접근하기 위한 통과의례의 본질은 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 궁극 목적은 인간의 변환이었다. 요컨대 연금술사는 비의에서 신이 취급되는 식으로 물질을 취급한다. 즉 광물질은 수난받고 죽어서 새로운 존재 양상으로 재탄생한다.
통과의례 : 전달 불가능한 것의 전달법
정신의 차원에서 궁극적으로 자유와 계시와 불멸에 이르는 통과의례적 시련은 물질의 차원에서 보면 변환과 현자의 돌에 대한 접근을 의미한다. 극과 수난의 통과의례적 의미를 수용함으로써 물질은 정신으로서의 운명도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먼저 ‘죽음’이 없으면, 초월적 존재 양상으로 ‘부활’하고 변환에 도달할 희망도 없는 것처럼, 연금술사들 역시 시간에 의해서 이미 마멸된 ‘형태’로부터는 변환을 획득할 수 없기에, 우선 이들 ‘형태’를 ‘용해’시켜야 했다. 그들은 ‘금속의 완벽성’을 추구함으로써 스스로의 완벽성을 추구한다는 점을 처음부터 의식하고 있었으며, 작업실에서 자신의 심리적 생리적 생활과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체험에 조작을 가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연금술 문헌마다 연금술사의 덕성과 자질을 강조하는 데 입을 모은다.
그러나 연금술 문헌은 작업의 예비 단계와 여러 국면에 관해 극도로 장황하게 설명하지만, ‘위대한 신비’에 대해서는 대부분 은밀하게 암시하는 것으로 그친다. 많은 연금술서는 현자의 돌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우화와 비유’를 사용하는 시와 마찬가지로, 신비적으로 전수되어야 한다고 경고한다. 이것은 원시사회의 샤먼과 역사상 종교의 신비학에서 볼 수 있는 ‘비밀의 언어’이다. 이는 일상 언어로 중개하면 전달이 불가능한 체험에 대한 표현이자, 상징의 감추어진 의미에 대한 은밀한 전달이다. 연금술적 체험과 주술적 종교적 체험은 공통적이고 유사한 요소를 갖는다.
자연과 노동의 세속화
현대 과학은 눈부신 비약을 거듭하면서, 연금술의 유산을 망각하거나 혹은 거부하였다. 그러나 연금술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해버린 것도 아니고, 실험과학의 승리가 연금술사들의 꿈과 이상을 무가치한 것으로 돌려놓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무한한 진보의 신화를 중심으로 형성된 새 시대의 관념 체계는 어떻게 보면 천 년을 이어온 연금술사의 꿈을 수용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참된 사명은 자연을 변화, 변형시키는 것인데 여기서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의 완성과 속죄라는 구제론적 신화는 자연 전체를 ‘에너지’로 ‘변환’시키려는 산업사회의 비장한 계획 속에 숨겨진 채로 살아남아 있다.
그러나 물론 연금술의 유산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현대인에 의해 이해되고 실현되었다. 현대 과학은 자연을 세속화함으로써만 성립될 수 있었다. 과학 현상이 밝혀지기 위해서는 ‘신성 현현의 소멸’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이다. 또한, 연금술사는 시간을 대신하면서도 시간의 역할을 침범하지 않도록 충분히 경계했다. 그는 시간적 리듬을 가속화하며 자연보다 빨리 금을 제작하고 싶어 했지만, 훌륭한 철학자나 신비가로서 시간을 두려워하였다. 연금술사는 통과의례적인 ‘죽음과 재생’을 체험하면서 시간을 지배했다. 그러나 연금술사의 개인적 몽상이 사회 전반에 의해서, 집단적으로 현실화되자, 시간에 대한 방어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19세기적 꿈과 야망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려면 노동이 세속화되어야 했는데,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은 “자연보다 더 잘, 더 빨리 행하기 위한” 고된 일을 아무런 예전적 차원도 거치지 않고 떠맡아버린 것이다. 다른 사회에서라면 예전적 차원을 통해서 견딜 수 있는 힘든 일을, 세속화된 일 속에서, 소비된 에너지의 시간과 단위로 표시되는 일 속에서, 인간은 시간적 지속의 그 느린 속도와 무게를 가차 없이 경험하고 느끼게 된다. 요컨대, 현대사회의 인간은 말 그대로 시간의 역할을 맡아 시간을 대신하여 자신을 소모시키며 일함으로써, 오로지 시간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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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모든 대상에서 의미와 상징을 찾던 인간의 마음에는 ‘종교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현대 과학기술이 그런 세계를 세속화시킨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미신적’이 되었기 때문인 탓도 있다. ‘종교심’은 인간에게 더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게 하고 모든 물질에 고귀한 정신성을 부여하며, 더 강한 심신으로 세상에서 만나는 고통을 이겨내고 뛰어넘도록 단련시킨다. 그러나 인간의 약함과 불안을 이용하는 ‘미신’은 항상 앞으로 닥칠지 모르는 더 큰 두려움에 대한 생각으로 떨게 만들고, 고통을 회피하며 더 작은 세상에 머물러 사는 것에 만족하게 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인간의 정신 역시, 도달하기 어려운 고귀한 아름다움보다는, 쉽게 얻을 수 있는 순간적이고 짜릿한 쾌감에 만족할 것이다.
그 자체로 시간적 존재가 되어 스스로를 소모시키며 일하며 살게 된 현대의 인간에 대해 한탄하는 엘리아데는 아마도 잃어버린 ‘종교심’을 되찾고 싶은 것일 게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종교심’과 특정한 ‘종교’를 혼동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교회나 절에 다닌다고 곧 ‘종교심’을 가졌다고 보기도 어렵고, 과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 해서 ‘종교심’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물론 특정한 종교를 맹신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게 어떤 사상이든지 혹은 과학 기술이나 합리성이라도 그것만을 맹신한다면 그 역시 ‘미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고대나 중세에도 아마 엘리아데가 말하지 않은 연금술사 중 누군가는 ‘미신적’으로 연금술을 대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종교심’은 어디서 어떻게 되찾아 올 수 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나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시작하는 것은 맞을 것 같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의미를 내 바깥의 누군가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신들’과 함께 용감하게 세상을 해석하고 거기에 믿음을 가질 때, 또한 그런 믿음을 맹신하거나 미신화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다시 재해석해볼 용기를 가질 때, 진정한 연금술사들이 새로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물론 나의 내부가 이미 외부의 기준과 미신들로 잠식되어 있지 않다는, 혹은 그것을 잘 알고 있다는 조건하에서!)